萍 - 창고 ㅈ ~ ㅎ/한민족 이야기

4 해양강국의 기원, 평저선

浮萍草 2015. 10. 26. 00:00
    한민족은 고대 동남아 바다를 누빈 유일한 해상세력이었다
    ㆍ해양강국의 기원, 평저선 서해 갯벌 덕에 개방된 배가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다. 우리의 전통 배 평저선은 세계 조선사(造船史)에서 아주 예외적인 배다. 선박 구조가 물살을 가르는 유선형이 아니고 특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박의 종류와 연대를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평저선 구조를 가진 배를 만들어 썻다. 이를 통 털어 ‘한선(韓船)’이라 불렀다.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 배들은 물살을 쉽게 가르기 위해 배 아래가 뾰족한 역삼각형인 첨저선이다. 유선형이기 때문에 평저선에 비해 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해상 운행에 유리할 뿐 아니라 해상전투 시에도 기동력이 좋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는 첨저선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평저선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조선의 평저선과 중국 및 일본의 첨저선

    우리나라에서 평저선 같은 독특한 배가 탄생한 이유는 갯벌 때문이다. 우리 서해안에는 조수 간만의 차가 커 갯벌이 널리 퍼져있었다. 서해 갯벌이 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대형 갯벌이다. 서해안에는 6시간에 한 번씩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있는데 간조와 만조 때의 조수 차이는 최고 9터 이상에 달한다. 이런 조건에서 어업을 하거나 운항을 하려면 배 밑바닥이 편평해야 했다. 배 밑이 역삼각형인 V자형 첨저선은 썰물이 나가면 갯벌에 쓰러진다. 평저선은 썰물 때 배를 갯벌 위에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했다. 그래서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평저선은 갯벌 출입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ㆍ고대 바다가 한민족의 바다였던 이유
    게다가 평저선은 바다 항해에 굉장한 장점을 가졌다. 앞쪽이 물에 30센티 박에 잠기지 않아 연안에 접근하더라도 해안 바닥에 걸리지 않고 접안시설이 없더라도 어디에나 정박할 수 있었다. 반면에 첨저선은 연안 접근 자체가 어렵고 접안시설이 건설된 항구에만 정박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중국 배는 주로 강을 오르내리는 도강선이었다. 게다가 서양의 갤리선처럼 노꾼들이 노를 저어 운행하는 배들이 많았다. 고대 바닷가에는 접안시설이 부족해 첨저선은 연안항해도 쉽지 않았다. 고대에 서해를 비롯한 동남아 바다 전체가 한민족의 바다였던 이유다. 따라서 고대에는 평저선만이 어느 바다나 겁내지 않고 사방을 휘젓고 다닐 수 있어 그 무렵 바다를 돌아다닐 수 있는 배는 평저선 뿐이었다. 고대로부터 우리 평저선이 먼 거리 바다 항해를 하며 파도와 해류에서 안정성을 높이다 보니 다른 나라 배에 비해 키가 길어졌다. 그리고 물에 잘 가라 앉지 않는 평저선이다 보니 배의 무게 중심을 아래로 내려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배에 돌을 싣고 다녔다. 이로써 먼 바다 항해를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 언더우드가 그의 저서에서 한선 특유의 긴 키가 원양항해에서 안정판 역할을 한다는 것과<표해록>에 원양항해 안전성을 위해 선체 하부에 밸러스트로 돌을 적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는 중국과 달리 전 국토가 대부분 험한 산맥이라 발전하려면 바다로 나가야 했다. 페니키아가 지중해를 석권했던 이유도 그들 뒤로 레바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바다로 나갔던 결과였다. 이탈리아 반도의 아말피나 제노바가 해양강국이 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뒤에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혀 발전하려면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ㆍ배 제작 쉬워 어업도 발달해
    배 만들기도 평저선이 훨씬 유리했다. 첨저선 배는 용골을 지지해 줄 받침대를 먼저 만들고 그 위에서 배를 만들다 보니 배 제작이 어렵다. 반면 평저선 배는 땅 위에서 직접 제작하니 만들기가 쉽다. 특히 큰 배를 만들기가 쉬웠다. 게다가 서해 바다는 수심이 낮은 대륙붕 바다라 어족이 풍부했다. 특히 발해만과 상해 앞 바다 주산군도 근해에 고기가 많았다. 이는 고대 한민족의 바다 어업이 발달했던 이유이자 발해만 문명이 가장 먼저 발흥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또 평저선은 높은 파도에 강했다. 한선은 파도가 높을 때 파도 위를 타고 나아가기 때문에 바닷물 속에 빠지지 않으나 선수가 뾰족한 첨저형 배는 큰 파도를 만나면 가르고 간다는 것이 잘못하면 오히려 파도에 휩쓸려 물속으로 처박히게 된다. 따라서 첨저선 배는 웬만큼 크지 않으면 바다에 나가지 못했다. 중국이 고대에 수로 운항을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한선은 멀리 주산군도까지 나가 어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ㆍ평저선이 해상전투에 강하다
    게다가 평저선은 해상전투에도 강했다. 평저선은 흘수 곧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 방향 돌리기가 쉬워 민첩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체가 크고 무거워 고대의 해상 싸움에 유리했다. 당시는 배끼리 들이박는 박치기 싸움이었다. 평저선이 해상전투에서 강했던 이유다. 고려 때 최무선의 함포가 강했던 이유도 평저선 덕분이었다. 장군은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유실되었던 화약 제조기술을 복원하고 대포를 만들어 평저선 위에 설치했다. 이로써 왜구들을 섬멸하여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뒤 왜구들도 대포를 만들어 배 위에 장착했지만 우리 한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구의 배는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자 최무선 장군이 재평가 받아야 되는 이유이다.
    임진왜란 때 물살이 빠른 울돌목을 활용한 명량대첩

    게다가 평저선은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평저선의 선회력을 이용하면, 한쪽에서는 발사를 다른 쪽에서는 장전을 하는 식으로 해서 상대방보다 훨씬 포를 빠르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평저선이 임란 때 나라를 구한 일등공신이었다. 후발국 영국이 당대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깰 수 있었던 이유도 평저선 위에 장거리 함포를 장착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이 화력이 월등한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사거리가 긴 장거리 함포가 절실했다. 그런데 어렵게 개발한 장거리 함포의 명중률이 형편없자 배 밑바닥을 편평하게 만들라는 아이디어는 당시 헨리 왕이 직접 냈다고 한다. 그 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휘했던 1588년 칼레 해상전투 때 영국은 전투선 34 척, 상선을 무장 시킨 무장상선 163 척 이외에도 평저선 30 척이 있었다. 평저선은 수심이 얕은 연안가에 정박이 가능하여 보급품 나르기도 수월했을 뿐 아니라 함포 명중률도 스페인 무적함대의 첨저선 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 무렵 해전은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근접 전투였는데 영국 함선은 장거리 함포로 80미터 밖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롭힌 끝에 이길 수 있었다. 칼레 해전은 유럽에서 전함에 대포를 장착해 적함을 화력으로 격파시킨 최초의 해전이었다. 이로써 당시 유럽 최강이던 스페인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영국이 바다를 장악하고 대국으로 부상했다. ㆍ항해술과 돛이 발달해 먼 바다 운행에 강했다
    고대 우리 범선은 오랜 해양 항해 덕분에 항해술과 돛 조작도 발달했다. 평저선인 한선은 독특한 사각 범을 달아 올려 바람을 받아 항해했다. 순풍을 받게 되면 돛을 좌우로 활짝 펴서 최고 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옆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도 갈지자로 사행하여 운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남 영암 앞 바다와 상해 앞 바다 주산군도 사이에는 해류가 흘러 이를 이용해 뗏목을 이어 만든 연선 운행도 가능했다. 기원 전후에 우리가 상해 앞 바다의 주산군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브라이언 페이건이 지은 <인류의 대항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류 최초의 장기 항해는 5만5000여 년 전 동남아시아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당시 해수면은 오늘날보다 낮아 육지 간 거리가 짧았다.” 바로 내가 주목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한민족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인류 최초의 발해안문명이 일어난 근거이다. ㆍ인도에 진출한 아랍과 유대상인과도 교역
    고대 한국은 갯벌에서 사용 가능한 평저선을 개발하여 기원전에 동남아 바다를 누빈 유일한 해상세력이었다. 그들은 주산군도와 양자강 유역을 그들의 주 무대로 하여 한반도와 긴밀히 교역하였을 뿐 아니라 인도에 진출한 아랍과 유대상인들과도 교역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페이건의 책에서도“기원전 100년 전후로 그리스인 히팔루스가 남서풍을 타고 아랍 해안에서 인도까지 직항으로 항해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뒤 그들은 매년 로마와 인도 간을 수십 척의 배로 왕래했다. 이는 동양과 교역하기 위한 항해였다. 고대 로마에는 기원전후에 비단이 유행하여 1세기 중엽에 이미 로마에 비단 전문시장이 들어섰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두 나라로부터 왔다고 했다. ‘세리카’와 ‘시나이’였다. 그리스 때까지만 해도 비단은 육지를 통해서만 들어왔다. 그 나라를 그리스인들은 세레스라 불렀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 이르러 바다를 통해서도 비단이 수입되었다. 로마인들이 육지를 통해 비단을 들여온 나라는‘세리카’라 불리는 중국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다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시나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확실히 구분했다. 이는 바로 '신라'를 뜻하거나 주산군도에 있었던 ‘신라’ 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론된다. 당시 신라와 로마가 어떤 형태로든 해상 교류가 있었음을 뜻한다. 유독 신라 고분에서만 고대의 로만글라스가 발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어로 된 이 지도는 고대 한민족 세력권 곧 한반도와 발해만 내역과 양자강 좌우를 비롯한 주산군도, 그리고 구주 등이 같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ㆍ한반도에서는 8천 년 전에 이미 고래잡이가 성행
    우리 조상들은 평저선을 이용해 일찍부터 조업을 발달시켰을 뿐만 아니라 어업도 수심이 얕은 서해 바다 뿐 아니라 수심이 깊은 동해 바다의 고래사냥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조직적으로 협동해야 하는 고난도 어업인데도 말이다.
    이를 증명하는 유적이 1970년 울산 대곡천 중류의 암벽에서 발견되었다. 이름 하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다. 암각화는 세계적으로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나타나는 유적의 하나다. 바위에 새긴 그림들은 우리 조상들이 벌써 8000년 전부터 고래사냥을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암각화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가 46마리나 그려져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옛날에 고래를 잡기 위해 협동어업을 했다는 점과 작살과 부구,낚싯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로 10m 높이 4m 크기의 암각화에는 고래,거북 등의 물고기와 사슴,범,곰,멧돼지, 토끼,여우 등의 짐승, 사람,배,그물,울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고래 종류만 6종이다. 여기에 7점의 집단 포경선이 있다. 그 중에는 20여명의 어부를 태운 대형선도 있다. 이렇듯 집단 포경업을 할 정도로 고대에도 우리 조선업과 항해술이 발달해 있었다. 이는 거친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는 평저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의 고대 문명을 추정할 수 있는 귀한 유적이다. 예사 그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Pub Chosun ☜       글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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