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민족 이야기

5 -흑요석은 고조선이 건국과 동시에 부강할 수 있었던 신의 선물

浮萍草 2015. 10. 26. 12:04
    백두산 화산 폭발 때 남쪽으로 흘러내린 이 것은 신의 축복
    
    ㆍ영험한 정기를 띤 백두산 
    반도는 산악지대가 국토의 약 70%를 이루고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국토의 등뼈인 산악 국가이다. 모든 산들이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다. 고대로부터 백두산은 영험한 정기를 띤 산으로 호랑이의 포호하는 입에 해당한다. 바로 이런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민족이 배달민족이다. 단군조선이래로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환웅이 내려오신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그 뒤 부여, 고구려와 발해도 백두산 기슭에서 둥지를 틀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자 역사의 발원지다. 백두산의 가장 이른 시기의 이름은 크고 흰 산이라 하여 태백산(큰 흰산)이었다. 산 정상이 사시사철 흰 눈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백산, 장백산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날을 잡아 이 산에서 귀한 흰 소의 머리(白頭)를 제물로 바쳤다. 백두산(白頭山) 이름의 유래이다.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 읍루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 고조선 이래 같이 살아온 우리의 형제 민족들도 백두산을 성산으로 받들었다. ㆍ격렬했던 화산 활동
    백두산은 지금도 내부에서 화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단지 쉬고 있는 휴화산일 뿐이다.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인류의 탄생 이전에 있었다. 격렬하고 넓은 범위의 화산활동이 한반도 지역에서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는 마치 끓는 용광로와 같았다. 이 시기 한반도에 화산활동이 격렬했던 이유는 당시 한반도의 위치가 지금의 일본과 비슷하게 태평양판이 대륙판인 유라시아 판 밑으로 말려들어가던 경계부였기 때문이다. 그 뒤 유라시아 판이 확장되어 동해가 생기면서 한반도는 안정된 지각으로 굳어지고 지판이 충돌하던 경계부위는 일본으로 옮겨갔다. 울릉도와 독도도 백두산, 제주도와 함께 이 시기에 생겼다 한다. 백두산은 그 뒤에도 화산활동이 격렬했다.
    서기 970년에 대분출이 있었다. 당시 백두산 화산폭발로 인해 백두산 주변과 개마고원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발해가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 화산재가 멀리 일본 홋카이도까지 날아가 1㎝나 되는 화산재 층을 만들어냈다. 2010년 유럽의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폭발 분출량의 1000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후에도 백두산은 간헐적으로 폭발이 이어져 마지막 분출이 1903년에 있었다. 선사시대 이래로 백두산의 이러한 격렬한 대분출은 많은 재앙을 수반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한민족에게는 흑요석이라는 보물을 안겨주었다. ㆍ동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흑요석 산지, 백두산
    흑요석
    흑요석(黑曜石, obsidian)은 신의 축복이다. 이 돌은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없다. 대륙이 갈라질 정도로 강렬한 화산 용암이 격렬하게 분출한 지역에서만 생성된다. 그것도 하늘로 솟구친 용암이 중요한 결정체가 생기기 전에 급격하게 냉각된 화산 용암이라야 한다. 그래서 고대의 흑요석 산지는 극히 드물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백두산 일대와 일본열도 노아의 홍수 근거지인 터키의 아라랏산 일대 등 과거 화산 분출활동이 격렬 했던 몇 군데서만 발견되었다. 백두산은 화산 폭발 때 흑요석을 사방에 흩뿌리지 않고 묘하게도 백두산이남 지역에만 토해 냈다. 백두산의 흑요석이 한반도 곳곳의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되어 지고 있다. 이로 보아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이미 구석기 시대 이전에 시작되었다. 중국이나 우랄 산맥,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는 흑요석이 없다. 그만큼 귀한 돌이다. 동북아 대륙에서는 격렬한 화산 활동이 있었던 백두산이 유일한 흑요석 산지다. 일부 화산지대에서 소량 나오더라도 크기가 작고 이물질이 많이 끼어 있어 질이 좋지 않다. 현재도 중국의 조선족기업이 북한과 공동으로 백두산에서 대량의 흑요석을 채굴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중국 측 백두산 지역에서는 아직 까지 광맥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ㆍ흑요석으로 고대의 반도체라 불리는 세석기 만들어
    철이나 마그네슘이 섞인 흑요석은 검정이나 암록색을 띈다. 백두산 흑요석이 이 색깔이다. 철이 섞여 있어 단단하다. 검푸른 흑요석이 유리질 돌이다 보니 충격을 주면 세로결로 얇게 쪼개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얇게 쪼개지는 특성으로 인해 흑요석은 석기시대의 치명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흑요석은 그냥 쪼게도 날카로운 모서리를 얻을 수 있으며 약간의 연마로 치명적인 살상무기로 바뀔 수 있다. 이렇듯 흑요석은 날카롭게 깰 수 있어 여러 유용한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이 돌로 부싯돌과 작살.낚시 바늘,화살촉 그리고 자르개 같은 걸 만들어 썼다. 이른바 이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 유물에도 화살촉,돌칼,돌도끼,자르게,긁게,밀개 등 다수의 흑요석 석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산지는 대부분 백두산이었다.
    자르개는 고기의 비늘을 벗기거나 살을 저미는 것이고 긁개와 밀개는 동물 가죽을 벗길 때 쓰는 도구이다. 고조선이 흑요석 화살촉 덕분에 화살을 많이 만들어 잘 쏘게 되었으며 흑요석 칼과 도구 덕분에 모피 수출대국이 될 수 있었다. 현대에서도 심장 수술에 흑요석 메스가 이용된다. 강철 메스의 날은 맨눈으로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워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흑요석 날은 전자현미경으로 볼 때도 똑바로 나 있으며 두께가 3나노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예리하다. 동이족은 이 흑요석으로 날카로운 화살촉 등 무기와 연장을 만들어 썼다. ㆍ치명적 살상무기, 흑요석
    ▲ (左)슴베 ▲ (右) 중남미 인디오들의 흑요석 칼
    후기 구석기인 약 3만 년 전부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백두산 흑요석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흑요석을 이용해 낚시 바늘,작살 등 어구류를 만들어 갯벌 생활을 하는 사람 들이 고기잡이에 썼다. 또 흑요석은 주로 화살촉으로 만들어져 쓰였다. 이로써 우리는 중국과 달리 화살을 많이 만들어 사냥 하는데 썼다. 고대로부터 우리 신화에 활 잘 쏘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또 흑요석은 날카로우면서도 손질이 쉬워 창을 만드는데도 제격이었다. 돌로 도구를 만들던 인간이 어느 날 슴베를 생각해 낸다. 슴베란 나무 자루를 붙이기 쉽게 돌날의 두터운 한쪽 끝을 나무에 박기 쉽게 뾰족하게 다듬은 부분이다. 나무 자루에 슴베를 박아 줄로 꽁꽁 묶으면 창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인류는 멀리 있는 짐승도 사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흑요석으로 칼과 도끼가 만들어 졌다.
    고기를 자르는 칼이나 수렵채취에 안성맞춤이었다. 고대 인디언들은 흑요석으로 돌창과 돌도끼, 돌칼, 돌화살촉, 부싯돌 등으로 사용했다. 또 물물교환의 수단으로도 이용하기도 했다. 돈으로 사용될 만큼 그들에게는 중요한 재화였다. 일부지역에서는 16세기 초까지 흑요석으로 만든 무기가 사용되었다. 금속 제련술이 뒤떨어진 아즈텍,마야에서는 흑요석으로 된 칼을 사용해 자르는 도구로 이용했으며 아즈텍 전사들은 곤봉에 흑요석 날을 조각조각 붙인 특이한 무기를 사용했다. 이것은 철제 칼에 버금가는 날카로운 도구였다. 인디언들의 주식인 곡물과 짐승의 살과 가죽을 썰고 베는 귀중한 도구가 되었다. ㆍ최적의 모피 가공도구, 흑요석
    흑요석으로 만든 모피 가공도구
    흑요석은 무기 만드는데도 중요했지만 모피를 가공하는 데 아주 요긴한 연장이었다. 석기시대에 인간을 추위로부터 지켜주는 가죽 옷은 중요한 재화의 하나였다. 가죽 옷의 재료인 모피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연장이 바로 흑요석으로 만든 돌날, 밀개, 긁개, 뚜르개 등이었다. 짐승의 모피는 도살 직후 체온이 내려가기 전에 가죽을 벗겨내고 가죽에 달라붙어 있는 단단한 기름 덩어리를 밀고 긁어서 떼어내야 한다. 이 작업에 흑요석 칼과 연장 만하게 없었다. 그래서 모피제조는 고조선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다. ㆍ구석기시대에도 거래와 무역이 있었다
    흑요석은 고고학자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흑요석은 화산에서 분출한 탓에 일정 정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흑요석 유물이 발견되면 그 원산지가 어디인지 추적이 가능해 고대의 무역루트도 알아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흑요석 출토 유적 수만도 약 110여 개소이다. 이 가운데 구석기 유적은 13개이고 나머지는 신석기 유적이다. 1만 7천 년 전 후기구석기 유적인 단양 수양개에서는 2백여 점의 흑요석이 출토되었고 중석기 유적인 강원도 홍천 하화계리에서는 8백점의 흑요석이 나왔다. 백두산과 800Km 떨어진 한반도 남단 끝의 구석기 유적들에서도 백두산 흑요석이 나왔다. 또 시베리아의 알타이 유적에서도 백두산 흑요석 세석기들이 발굴되었다. 백두산의 흑요석이 알타이까지 수만리에 해당되는 거리로 운반된 것은 고대 한국인들의 생활반경의 광대함을 보여준다. 산 넘고 물 건너 전해진 백두산 흑요석을 통해 귀한 돌을 얻으려 노력했던 구석기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아주 원시시대라 생각하는 구석기시대에도 인류의 이동과 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조개팔찌와 흑요석 화살촉
    국내 유적 중 일본 규슈의 흑요석이 발굴된 곳도 있다. 전남 장흥의 신북마을을 중심으로 반경 12㎞ 내에 약 20여 곳에 이르는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있다. 2002년 도로 공사 중 발견되어,조선대 박물관에서 약 3만 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중심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2만 2천년 쯤 후기 구석기시대로 확인되었다. 이곳의 흑요석이 일본 규슈의 것이었다. 빙하기였던 그 무렵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상당 부분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조개팔찌(패천)와 어구류를 주고 일본 규슈의 흑요석을 사온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 여러 패총에서 집단 출토된 조개팔찌가 그 무렵의 돈이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조개팔찌 1500여 점은 흑요석 수입을 위해 대규모로 생산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곧 동삼동 패총의 팔찌가 흑요석을 사오기 위해 쓰시마섬과 규수에 공급되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1980년대 쓰시마 사가패총에서도 100여 점의 조개팔찌가 나왔는데 제작방식이 동삼동 것과 같았다. 조개팔찌 곧 패천의 재료인 투막조개, 흰삿갓 조개가 암초가 많은 일본 섬에서는 자라지 않고 한반도 남해안에 많이 서식하는 것이었다.
    흑요석이 해안지방에서도 각광받은 것은 잘 깨져 가공이 쉽고,면도날처럼 각진 면이 날카로워 작살,화살촉,뚜르개 등 어업 용구로 쓰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비늘을 벗기고 살을 저며 내는데 제격이었다. 어업과 수 생활에 의존했던 고대인들에게 흑요석 확보는 생존의 문제였다. 실제 패총에서 발굴된 사냥도구로는 화살촉이 가장 많았으며 물고기 잡이에는 그물추와 낚싯바늘,작살 등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에도 조개팔찌와 흑요석을 매개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밖에도 흑요석은 용도가 많았다. 고대에는 이를 반들반들하게 잘 갈아서 거울로 썼다.
    또 그것을 잘 갈고 닦아 보석으로도 쓰였는데 가공한 보석을 흑요암이라 불렸다. 특히 고대의 구슬은 매우 진기한 보물로 취급되었다. 흑요석은 보통 흑색이지만 갈색,회색과 소량의 적색,청색 심지어 녹색 흑요석도 있다. 흑요석은 여러 종류의 장식품으로도 쓰였고 가공하지 않은 덩어리 자체로도 팔려 나갔다. 흑요석은 고조선이 건국과 동시에 부강할 수 있었던 신의 선물이었다.
    Pub Chosun ☜       글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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