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삼국지의 여인들

11 〈마지막 회〉 여인들, 영웅을 말하다

浮萍草 2015. 11. 15. 00:00
    ▲   어느 날 삼국지의 여인들은 하늘나라에서 만나 자기들이 만났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ㆍ하늘나라의 여인들에게 날아온 초대장 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英雄)과 여인들,세월이 흘러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육신은 흙이 되어 썩고 바람이 되어 흩어졌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 기거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영웅의 가슴에 불을 붙이고 역사의 물줄기를 트고 한 나라의 운명까지 바꾼 여인들이 있었으니 어느 날 그녀들 하나하나에게 초대장이 날아왔다. 초대장에는 그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 숨는다는 초선(貂蟬),동탁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왕미인(王美人),기녀(妓女) 출신으로 조조(曹操)의 정처(正妻)가 된 변황후 (卞皇后),미인계(美人計)로 조조를 패퇴시킨,장제(張濟)의 부인 추씨(鄒氏),원소(袁紹)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처에서 조비(曹丕)의 처가 되었으나 조조가 몰래 탐한 견씨(甄氏),강동의 소패왕(小覇王) 손책(孫策)의 처 대교(大喬)와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의 처 소교(小喬),그리고 유비(劉備)의 두 처 미부인(糜夫人)과 감부인(甘夫人),손권(孫權)의 누이동생으로 유비의 처가 된 손인(孫仁),로마에서 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처가 된 황월영(黃月英),남만(南蠻)의 왕 맹획(孟穫)의 처 축융부인(祝融婦人) 등이 망라되어 있어 그 이름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늘나라의 우편제도는 한 점의 구름이 떠가다 흩어지며 꽃비가 내리고,그중의 꽃잎 하나가 하늘거리며 여인의 앞치마나 머리맡에 내려앉는 식이었다. 초대장은 그렇게 하늘나라 각지로 배달되었고 마침 숲 속에서 금(琴)을 켜고 있던 초선이 가장 먼저 받아보게 되었다. 붉은 나뭇잎의 잎맥에 새겨진 초대인물들을 본 초선은 그녀들이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여인들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여기 와서야 알았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도 조조는 수많은 여인들을 취했고 그 여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듣는 것만 해도 피곤했다. 추씨 부인에 대해선 도대체 그 성적 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견씨에 대해선 여러 남자를 녹이는 마력(魔力)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조조로 하여금 전쟁마저 불사하게 만든 강동이교에 대해선 활활 타는 질투심이 일어났다. 비록 조조의 청을 뿌리치고 여포(呂布)를 따라 죽음을 택한 그녀였지만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그토록 여자들에게 집착하는 것을 확인하는 게 괴로웠다. 천상에 와서도 여인의 질투란 사그라지는 법이 없었다. 초대장소는 은하정(銀河亭)이라는,밤이면 별들이 고향인 양 모여든다는 곳이었다. 백 년에 한 번 주요한 연회나 모임에만 공개하는 곳이었다. 초선은 금을 뜯던 손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나라에도 하늘은 있었으니,거기 조조와 여포의 얼굴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포를 사랑했으나 그는 조조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왜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간 조조가 미워지지 않는 것일까. 역사의 승자로 남은 그 이름에 뒤늦게 매혹된 것일까. 그러나 여포의 뒤를 따라 세상을 뜬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조조의 사랑을 받은 여인들은 많지만 여포의 사랑을 받은 여인은 그녀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여포의 진가(眞價)를 아는 여인도 그녀 하나였다. ㆍ감회에 젖은 채 은하정으로
    취미생활로 식기(食器)에 옻칠을 하던 중 초대장을 받아든 변황후는,조조와 관련된 여인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다니,그녀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한숨이 나왔다. 영웅에게 여인이 없을 순 없는 법. 그래도 조조는 지나치게 많은 여자를,처녀든 과부든 가릴 것 없이 취함으로써 때로 화를 자초하지 않았던가. 추씨 부인에게 빠져 장남 조앙(曹昂)을 죽이는 우까지 범했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첩의 신분으로 황후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와서도 조앙의 친모나 다름없는 정부인(丁夫人)에게 간간이 안부를 띄우곤 했던 것이다. 채소밭을 가꾸고 있다 허리를 편 미부인은 나는 새가 떨어뜨리고 간 초대장을 받고 눈물을 쏟았다. 우물 속에 몸을 던진 자신이 그 죽음의 순간에 보았던 건 무엇이었던가. 유비의 적자(嫡子) 유선(劉禪)을 지키려 했던 마음을 후세 사람들이 알아주고 시(詩)로 전파한다는 것에 감동했었고 지금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 순간 그렇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라는 위(魏)나라에 멸망했지만 그전에 촉(蜀)나라가 섰고 지아비는 황제로, 유선도 2대 황제로 등극했으니 미련은 없었다. 하늘나라의 호위무사들과 검술시합을 하고 있던 손인은 어디선가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챈 후 화살촉에 꽂힌 종이를 펼쳐보았다. 초대장에 유비의 두 부인 미부인과 감부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머니 오국태(吳國太)가 위중하다는 말에 속아 오나라로 건너간 이후 아두(阿斗·유선의 아이 적 이름)를 보지 못해 애타 했던 그였다. 그리고 유비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왜 나를 구하러 첩자라도 보내오지 않았을까. 천상에서도 손인은 유비와의 길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았던 날들에 대해 추억에 잠기는 날이 잦았다. 천상에선 이승에서의 격렬함과 애절한 그리움과 뼈가 녹는 것 같은 쾌감의 세계는 없었다. 거대한 작업실에서 목우(牧牛)를 비롯한 각종 발명품을 만들고 있던 공명(孔明)의 처 황월영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 쉬고 있는데 트로이 전쟁을 일어나게 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이 다가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초대장이 잘못 전달되었네요. 당신에게 온 것이에요.” 헬렌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발명품인 트로이의 목마와 관련한 인연으로 황월영과 함께 이 작업실에서 각종 발명품을 연구하고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편배달부가 로마 출신 황월영과 그리스 여인 헬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얘기였다. 초대장을 받아 쥔 황월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나라뿐 아니라 이승에서도 제갈공명이 유비를 넘어 최고의 추앙(推仰)을 받는 것을 보고 가슴 뿌듯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린 행복한 부부였지. 그러나 그는 출사표(出師表)를 던지고 마침내 오장원(五丈原)의 별이 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지. 세상에 나보다 더 공명을 아는 자가 누가 있을까.’ 황부인은 헬렌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녀가 파리스 왕자를 아직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여인들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초대장을 받아들고 깊은 감회에 젖은 채, 모임 장소인 은하정으로 가는 채비를 서둘렀다. ㆍ조조가 사랑한 세 여인
    하늘나라에도 빛나는 해가 떠 있고 미풍이 불었다. 멀리 숲이 있고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에 자리한 오각 정자(亭子)에는 의자와 차를 마실 수 있는 탁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탁자엔 선녀들이 마시는 차와 함께 사마의(司馬懿)의 여동생 사마아가 따곤 했던 천도 복숭아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복숭아의 빛깔이 젊은 여인의 뺨처럼 불그레했다. 많은 의자가 비어 있었고 아직은 두 여인만이 자리에 앉아 풀빛이 어른거리는 연못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때 어디에서 금 타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돌아보았다. “누구신가 했더니 그 유명한 강동이교의 소교이군요.” 단정한 용모의,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부인이 고개를 돌린 여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매우 세련된 용모의 여인이 “어떻게 아셨나요?” 하고 물었다. “음(音)이 틀리면 주유가 돌아본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 부인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것도….” 그러자 소교는 미소를 머금고 “저야 조금 구별하는 정도지요. 귀부인께서는 그럼…”. “감부인이라 하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부인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소리를 여기서도 들었어요.” “아! 유비 나리의 감부인이시군요. 몰라 뵈었습니다. 촉의 제2대 황제 유선의 모친 되시는 분을 여기서 뵙다뇨.” “제 아들이 못나 그만 나라를 잃고 말았어요. 조상님들께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라야 저희도 못 지킨 걸요. 다 훗날의 이야기이고 우리야 그때 할 만큼 했지요.” “할 만큼 한 사람은 저 외에 따로 있답니다. 제가 초대장을 받고 서둘러 온 것은 누구보다 그 사람을 보러 온 것인데 아직 도착 안 했네요.” “제가 알아맞혀 볼까요?” “…” “미부인을 기다리시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조조군이 쳐들어오자 아두를 구하기 위해 우물에 몸을 던졌죠.” “그 이야기라면 우리 모두가 감복하고 있어요.” 중년 부인의 소리가 들려 두 여인이 돌아보니,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비록 적장의 아내지만 그런 이야기는 적과 아군을 떠나 모성의 영원함과 여성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거지요. 그 미부인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니 가슴이 뛰는군요.” “미부인을 적장의 아내라고 부르는 당신은?” 감부인이 묻자 “변황후라고 합니다” 하고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화장도 하지 않고 워낙 검박(儉朴)한 차림을 하고 있어 조조의 정처(正妻)로서 가히 삼국지의 여성 중에 최고의 권력을 누린 변황후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소교가 놀라움을 보였다. 시녀가 와서 변황후를 자리로 안내하고 차반의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주었다. 세 여인이 마시는 차의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는 가운데 이제 저 멀리 숲 속에서 들려오는 금 소리는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조조의 정처 변황후란 말인가요.” 소교가 탄성처럼 말했다. “저 같은 여인이 변황후여서 실망시켜 드린 것 같군요.” “아닙니다. 사실 삼국시대를 통틀어 당신보다 높은 권력과 지배력을 가진 여인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당신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어 모두가 존경하고 있지요.” “검약하시고 인의(仁義)를 아시고 사리판단이 뛰어나셨죠.” 감부인이 이어 말했다. “과찬입니다. 사실 조조의 정처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천하의 조조 아닙니까. 여자 문제로도 속 썩으셨겠어요.” 소교가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니 영웅 곁에 어찌 미인(美人)이 없겠습니까. 다만 그 때문에 패가망신할 뻔도 있었죠.” “장제의 처 추씨 부인을 취했을 때 이야기인가요?” 소교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것은 적벽대전 당시 남편인 주유 대도독에게 충고하던 그녀의 생전 성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변황후가 대답했다. “사실 그 사건은 자칫 장남 조앙의 목숨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 그리고 위나라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한 위험한 도락(道樂)이었어요.”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은 그 때문에 황후가 되지 않았나요?” 그때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말했다. 색향(色香)이 진동하였고 그녀의 온몸에선 일반 부인에게선 볼 수 없는 요염함과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변황후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은 저를 추씨 부인이라고 부르지요” 하고 그녀가 답하였다. “아….” 소교는, 과연 조조를 위험에 빠뜨리고도 남을 만한 여인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조앙이 죽은 충격으로 정부인이 조조 곁을 떠난 후 당신이 정처가 되었지요. 아!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일이 그렇게 흘러갔다는 이야기지요. 혹시 절 원망하시나요?” 추씨 부인의 말에“우리는 모두 아녀자들입니다. 적의 부인이라도 그 심정은 알지요. 저는 그런 대단한 성적 기예가 없어 그런 미인계를 쓸 수는 없었지만 당신은 당신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해야 했겠지요. 그건 제가 뭐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모두 지난 이야기입니다.” 변황후가 말했다. “호호. 변황후께선 겸양이 지나치셔요. 기녀 출신인 것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 기예가 없으시다뇨?” 추씨 부인의 당돌한 발언에 감부인이 더 당황해 하고 있었다. 변황후는 찻잔에 입을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녀 출신의 여자를 정처로 받아들인 조조의 대범함과 인품을 네가 어찌 알랴 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조조는 내가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멋진 남자였어요. 강했지만 그 내면은 부드러운 데가 있었죠. 밤에는 가끔 시를 읊기도 했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침실에서 육체적 향연만 나눴다고 알고 있는데 그는 가끔 수심에 잠겼고 밤하늘을 보며 고통스러운 심정이 묻어나는 시를 읊곤 했죠. 물론 그런 감정에 오래 빠지진 않았지만요. 강한 남자가 시를 말할 때 여자라면 넘어가지 않기 힘든 법이죠. 그래서 그가 장수(張繡)의 습격으로 곧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랑을 나누면서도 슬프기 그지없었답니다.” 추씨 부인이 아스라한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었으나 변황후는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조를 패퇴시킨 당신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지요. 그런데 들리는 얘기론 장수의 군사(軍師)였던 가후(賈詡)와 결혼해 살았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감부인이 물었다. “장담하건대 가후 나리보다 좋은 남자는 없죠. 그는 훗날 조조에게 투항했고, 조조는 적이라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면 인색하지 않았어요. 조조는 내가 가후의 부인이 되어 있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끝내 모른 척해 주었죠. 그것이 진정한 사내의 기질이죠.” “흥. 사내가 한갓 여자를 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기질인가요. 감기가 들어 여기 못 왔지만 대교 언니가 왔다면 조조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거예요.” 소교가 쏘아붙였다. “무슨 말인가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강동이교를 차지하기 위해 적벽대전을 일으킨 건 천하가 다 알고 있어요. 강동이교를 옆에 두고 지내겠다는 내용의 동작대부(銅雀臺賦)라는 시까지 지어 주유 나리를 격분시켰지요.” “호오! 소교 당신은 아직도 조조가 당신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나요. 물론 여자 입장에선 그것도 멋진 일이네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확인받을 수 있으니까. 하나 우리가 알기에 당신은 제갈공명에게 그 시에 대한 언질을 줬고 그가 주유를 격분시켜 전쟁에 나서게 했어요. 당신은 미모뿐 아니라 지략도 교활했지요.” 변황후가 말했다. “조조가 과부를 좋아한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 그가 전쟁을 일으킨 목적에는 여자도 있었다는 정도로 정리해 두죠. 동풍이 불지 않았으면 이교는 동작대에 갇혔으리라는 두목(杜牧)의 시도 있잖아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보다 소교가 조조 마음에 더 들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조의 첩이 될 수 있는 여자도 세상엔 정해져 있죠. 아무나 되는 건 아니랍니다.” 변황후의 거만한 말에“뭐라고요?” 소교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변황후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겉으론 온화하기만 한 변황후의 내면엔 이런 담대함과 권위의식이 숨어 있었다. ㆍ여포를 그리워하는 초선과 동탁을 증오하는 왕미인
    “그자를 본 적이 있네.” 이때 눈부신 미녀가 등장했다. 뇌쇄적인 몸매, 뛰어난 미모와는 달리 표정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황후가 되었다가 동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왕미인(王美人)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낙양(洛陽)의 황궁에 온 적이 있었지. 동탁의 신임을 꽤 받았던 걸로 알고 있네. 난 그자가 어딘가 모르게 무슨 큰일을 저지를 거로 보았어. 그때 동탁 그 짐승 놈을 해치웠어야 했는데 칠성검(七星劒)을 갖고도 죽이지 못했으니.” “왕황후?” 변황후가 외쳤다. “변황후구려.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당신은 아시겠구려. 차마 내 입으로 얘기할 수 없구려.” 음부에 장형이라는 기구를 찬 채로 영제(靈帝)에게 시달리다가 그가 죽은 후 또다시 동탁에게 농락당하고 살해된 그 이야기를 어찌 필설로 다 하리오. “그리고 동탁도 죽었지요.” 그때 꾀꼬리같이 청아한 그러나 한이 담겨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왕미인과는 전혀 다른 자태의 천하미녀가 서 있었다. 달이 부끄러워 숨는다는 그 폐월(閉月)의 미모였다. “동탁의 만행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요. 당신이 추행당하고 살해된 후 얼마 못 가 동탁의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졌죠. 조조가 못한 걸 여포가 끝장낸 거죠.” “초선….” 소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알아보시네요.” “당신 같은 미모는 초선 아니고서는 없지 않겠어요. 그 비운의 얘기는 당시 오나라에도 널리 퍼졌죠.” 소교가 말했다. “당신은 유일하게 조조와 여포 두 영웅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기도 하죠. 여포와 함께한 마지막 죽음의 장면은 여자로선 보기 드물게 장렬했다고나 할까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동탁의 애첩으로 지내며 아무리 기다렸지만 조조는 오지 않았어요. 그때 여포를 보았죠. 내 이상은 조조를, 심정과 육체는 여포를 원했어요. 여자의 본능이랄까 그걸 거부할 수가 없었죠. 내 죽음도 여포와 함께이기를 원했죠.” “천하의 영웅 여포에 대해선 우리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겠구려.” 감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유비가 여포와 적이 되었다 동지가 되었다를 되풀이하며 수없이 전투를 벌인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무예와 용맹함에 대해선 당대에 겨룰 자가 없었지만 사랑에 대해선 순정 그 자체였어요. 오직 저만을 사랑했죠. 조조는 결코 그렇지 않았지만요.” 초선의 말에 “물론 당신에게는 그러했겠죠. 그러나 인의를 중시하는 우리 유비 나리도 여포에게만은 자비를 베풀 수 없었어요. 물론 여포의 무예라면 조조와 힘을 합쳐 천하를 제패할 수도 있었겠죠” 감부인이 말했다. “그는 남아였어요. 신의를 저버린 건 교활해서라기보다 단순해서이겠죠.” 초선이 변명했다. “단순하면서도 순박했고, 당신에게는 그렇게 잘했다죠.” 소교가 말했다. ㆍ유비는 왜 자기 부인들을 일찍 죽게 했나
    이때 “늦었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세련된 용모의 여인이 등장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심한 고초를 겪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미부인.” 감부인이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부인.” 감부인이 미부인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당신이 그러고 우물에 몸을 던진 후 우리는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요.” “부인이라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유선은 제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촉나라의 후계자 아닙니까. 유비 나리의 적자이고요.” “그런 유비는 이런 부인들은 그렇게 죽게 놔두고 어찌 그리 오래 살았답디까?” 소교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때 불쑥 추씨 부인이 나서 “조자룡(趙子龍)이 아두를 구해오자 애꿎은 아이를 팽개쳤다면서요. 그렇게 신하를 위하는 흉내를 내는 건 좋지만 우유부단한 데다 겁이 많아 전쟁에서 지고 도망치는 데 선수 아니었나요. 여포를 처리 못 해 성을 수시로 뺏기질 않나 두 부인을 조조에게 볼모로 잡히게 해 겨우 관운장(關雲長)이 구해오지 않나. 두 부인은 관운장 아니었으면 평생을 조조의 밑에서 살아야 했을 거예요. 하긴 그편이 나았는지도 모르죠. 그랬다면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니까” 하고 길게 말했다. 감부인과 미부인 빼고는 모두 그 말에 동의를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인재들이 모인 걸 보면 유비의 덕이 상당하다는 건 인정해야겠죠.” 변황후가 제법 선심을 쓰는 듯 말했다. 그녀는 추씨 부인에게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는 듯했다. 이때 한 마리 말이 달려오더니 하늘나라의 사자(使者)가 내렸다. “오늘 감부인과 미부인께서 만나신다는 걸 알고 조자룡 장군이 선물을 보냈습니다. 두 분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조 장군밖에 없구려.” 미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감부인에게 비단으로 싸인 것을 열어보라고 했다. 감부인이 비단을 풀자 편지가 두 장 나왔다. 그것은 낳아주신 어머니와 목숨을 구해주신 두 어머니에게 제사를 올리며 유선이 읊은 편지였다. 두 부인은 그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조 장군의 이름을 여기서 듣다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더니 무장 복장을 한 여인이 등장했다. “두 분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손인이라 합니다.” “아 당신이….” 감부인이 놀라워했다. 미부인도 놀란 눈으로 그러나 찬찬히 손인을 훑어보았다. “유선을 친자식처럼 잘 키웠다는 얘기 들었어요.” 감부인이 말했다. “유비 나리와 저의 혼인은 오나라의 정략이었지만 혼인한 이상 제 서방이며 그분의 자식 또한 제 자식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때 오태후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거짓정보를 믿고 오나라로 돌아간 다음 유선도 보지 못했고 유비 나리의 죽음 소식만 들었죠.” “유비가 죽었다고 당신까지 장강(長江)에 몸을 던질 필요는 없었어요.” 소교가 말했다. “소교… 여기서 뵙는군요.” “당신이 유비와 혼인하기 전만 해도 우린 참 친하게 지내지 않았나요?” “그랬죠. 사실은 당신이 주유와 결혼하기 전이죠.” 손인과 소교는 마주 보고 웃었다. “유비 나리가 당신에게 푹 빠졌다고 들었어요. 조 장군이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독촉을 하지 않았다면 유비 나리는 하마터면 오나라 귀신이 됐겠죠.” 미부인이 손인에게 말했다. “두 분 부인께서 주지 못한 걸 제가 준 건 사실이에요,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유비는 제게 육체적으로 집착했어요, 나이 오십에.” 미부인의 눈에 약간의 질투의 빛이 일어났다 꺼졌다. 감부인이 “워낙 관우, 장비, 조자룡 같은 충직한 신하들 하고만 어울리다 보니 여자에 대해서는 풋내기였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당신 같은 어린 여자를 보니 그만 푹 빠진 거죠. 부하들을 지나치게 편애했어요. 때문에 조조를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는 소리를 여기서 들었어요” 하고 말했다. “관운장을 유비가 그렇게 대하지 않았으면 그는 군율을 어겨 가면서까지 적벽대전에서 패해 도망치는 조조를 살려줄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관우는 그때 의리를 생각했던 거죠. 감부인과 저를 유비 나리에게 돌려보낸 조조의 관대함에 보답한 거죠.” 미부인이 말했다. 찌푸리고 있던 변황후의 얼굴이 다소 펴졌다. ㆍ여인들, 다투어 공명의 매력을 말하다
    “관운장은 그때 조조를 죽였어야 했어요.” 이 놀라운 발언을 하며 등장한 이는 얼굴이 서양인처럼 생긴 여자였다. 그녀의 뒤에는 나무로 만든 말이 서 있었다. “제 남편이, 조조를 살려준 죄를 물어 군율에 따라 관우를 처리하려 했지만 유비가 그를 살려줬죠. 그놈의 의리 때문에.” “제갈공명의 처 황월영이시군요.” 변황후가 그녀를 알아보고 말했다. “공명 같은 훤칠한 미남이 고른 부인이 당신인 것에 우린 모두 놀랐죠. 숨은 매력이 있었나 봐요.” 소교가 말했다. “글쎄요. 아마도 당신이 가진 매력과는 다른 것 아니겠어요?” 황부인이 재치 있게 대답했다.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만들어 위나라를 곤경에 빠뜨린 건 당신의 기여죠. 공명에게 당신이 없었다면 그는 좀 더 일찍 패배했을 거란 말이 있어요. 그래 공명의 실모습은 어떤가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조조와 가후에 이어 공명에게도 남자로서 관심을 갖는 듯했다. 황월영은 그녀의 색정(色情)이 돋는 모습을 아니꼬운 듯 훑어보고는“공명 나리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전략을 세우느라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죠. 아마도 오늘날 태어났다면 여자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적어 여자들은 불만일 수도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멀어 집에 무슨 큰돈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죠” 하고 남편 칭찬을 늘어놓았다. “관우와 장비를 지휘하려면 병권(兵權)부터 쥐라고 충고한 게 당신이었죠?” 소교가 말했다. 그녀는 적벽대전 당시의 공명을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제가 재촉을 한 거죠. 천하의 공명이 어찌 아낙네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겠어요.” 황부인이 말했다. “공명으로 말하자면 한니발이 다시 태어나 전쟁을 치렀다는 말이 있던데… 그러고 보니 당신이 로마 여인이라는 설도 말이 되는군요.” 초선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 와서 공명의 이야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은 터라 바짝 호기심이 들었다. “나도 황월영 당신 남편을 안다면 알죠. 동작부의 시를 공명에게 알려줘 주유를 전쟁에 나서게 한 것도 나, 동남풍에 대해 알려면 도사를 찾아가라고 가르쳐준 것도 나였죠. 물론 아무나에게 할 말은 아니었죠. 공명 정도 되는 인물이면 그 정보를 잘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죠. 내가 만나본 공명은 가히 최고의 전략가이자 가슴엔 이상을 품은 남자였어요.” 소교가 은근히 자기 자랑과 함께 공명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세상엔 이상하게도 당신과 공명의 소문이 나돌더군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민화나 전설에서 하는 말이죠. 심지어 나의 존재조차 숱한 모습으로 재연되지 않나요. 내가 공명과 맺어졌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추측으로도 재미있나 보죠.” 소교가 말했다. “하지만 주유를 두고 그럴 리는 없었겠죠.” 변황후가 말했다. 황부인은 자기 남편을 두고 입방아 찧는 여인들을 불편한 심기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유 나리는 공명을 개인적으로 질투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그렇게 속 좁은 인물이 아니에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공명을 일찍 제거하려고 했는데…. 난 그의 충정은 이해하면서도 그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를 자제시켰죠. 다행히 공명은 거기까지 내다보고 미리 몸을 피했더군요.” “그가 피하는 바람에 소위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완성된 거겠지요.” 변황후가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새삼 그 무게가 느껴졌다. “사실 오나라는 천하이분지계를 원했죠. 그러나 공명의 뜻대로 삼분지계가 대세로 굳어졌죠. 난 유비와 살면서 공명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눈여겨봤죠. 해서 공명이 있는 한 오나라가 촉나라와 척을 지고는 위나라와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손인이 입을 열었다. ㆍ왕미인과 초선의 대화
    이제 시간이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녀들이 차를 내가고 술을 내왔다. 입에 대는 여인도 있고 독주로 살해당한 하태후(何太后)를 떠올리는 왕미인처럼 아예 외면하는 여인도 있었다. 왕미인은 자신이 죽고 난 다음 천하가 각축(角逐)하는 얘기를 흥미있게 들었으나 모든 여인이 자신보단 나은 삶을 산 것 같아 화가 났다. 일국의 황후로 이 무슨 비참한 최후인가. 동탁에 대해선 좋게 말하는 여인들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살해당한 게 새삼 분했다. 왕미인이 초선에게 눈짓을 했다. “잠깐 바람 좀 쐬러 갈까요.” 초선과 왕미인은 연못을 둘러 숲 속의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다. “동탁 시대의 두 여인끼리 할 말이 있나 보오.” 변황후가 말했다. “그래도 초선은 좋아하는 남자 여포와 마지막 불꽃을 피웠지만 왕미인은 궁중암투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해요.” 감부인이 말했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아까 그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했어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무슨 말요?” 미부인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탁이 왕미인의 시신을 먹으며 도착적인 쾌감에 잠겼다는 소문 말이에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세상에!” 여인들이 탄식을 했다. “동탁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변황후가 말했다. “그래도 한때는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면서요.” 소교가 말했다. “사람들과 어울릴 줄은 알았죠. 그러니 그나마 부하라고 있었겠지. 하지만 상국(相國)이 되고부터 권력에 대한 집착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그러니 결국 여포에게 살해된 것 아니겠어요.” 변황후가 말했다. “그나마 동탁을 꾸짖은 건 원소라면서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명문가의 자손이니 대들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는 조조와의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패배했고 그 세 아들 또한 자기들끼리 갈라져서 싸웠으니 조조에게 대적이 안 되었지. 그렇게 한 명문가와 원소의 백만 대군은 멸망해 갔고… 여기 원소의 가문이 없는 게 다행이군요.” 변황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원소의 가문은 몰라도 조조의 가문이 된 여자는 있죠.” 말소리와 함께 한 절세미인이 서 있었다.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절세미인이 변황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 부인 왔구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살아온 두 사람이었다. “조비의 처 견씨 부인 아니세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그렇답니다.” “듣던 대로 미인이세요.” 손인이 말했다. “여기 모인 분들의 미모를 보니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제 질투심이 솟아나려 하는군요.” 추씨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도 성적 매력(性的 魅力) 면에서만은 왕미인과 경쟁할 만했다. 여기저기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조가 아들 조비의 처, 즉 견 부인을 건드렸다는 설에 대해 차마 변황후 앞에서는 못하고 쑥덕이는 중이었다. 추씨 부인은 자신이 개인적인 안위와 영달을 위해 몸을 사용한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원희,조비,조조 세 남자를 거친 견씨를 꽤 안타까운 일 이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ㆍ축융부인과 손인의 결투?
    이때 멀리서부터 검은 말이 달려오더니 정자 앞에서 멈추었다. 여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에서 내리는 무장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까지 초대장이 왔을까 싶었어요. 하긴 공명의 부인도 외국인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녀까지 초대를 받았으니 남만의 왕비인 내가 참석 못 할 이유는 없겠죠.” 그녀는 바로 남만족의 왕 맹획의 처인 축융부인이었다. 듣던 대로 거친 기질에 남자 장수들도 주눅이 들 만한 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공명이 일곱 번이나 풀어준 맹획은 어디 두고 혼자 왔나요. 사람들은 그걸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 한다죠.” 황부인이 입꼬리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오! 황월영, 반가워요. 한데 그때 내가 항복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공명은 전략상 나를 풀어줬죠. 우리가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 한 또다시 위나라와 힘을 합쳐 공격해 올까 봐 두려웠으니까.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공명이건 누구건 그건 적의 침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공명이니까 당신을 풀어줬지. 누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황부인이 말했다. “하긴 손권이라면 그런 은덕을 베풀지 않았겠지. 그는 동맹국인 촉의 유비까지 죽이려 들었으니. 게다가 공명은 꽤나 매력적이더군. 가끔 생각났으니까. 공명도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요. 당신은 눈치 못 챘나요?” 축융부인이 황부인을 향해 오만하게 말했다. “감히 이민족의 여자가 입이 험하구나.” 이때 지켜보고 있던 손인이 나섰다. 오라버니인 손권을 비하하고 유비의 오른팔인 공명을 모욕하는 발언을 참기 힘들었다. 손권이 누구인가. 누가 있어 오나라를 그렇게 오랫동안 수성(守城)할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했더니 유비의 처 손인이시군. 무술을 좋아해 힘으로 유비를 밤에 제압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 방면에도 무술을 쓰신 건지?” “뭐라고?” 축융부인과 손인, 이 둘이 한판 붙을 기세였다. 축융부인이 먼저 말을 타고 달리자 손인도 말을 타고 뒤를 쫓았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도망가던 축융부인이 돌아서서 단도를 던졌고 손인이 이를 피했다. 여인들은 하늘나라에서도 이런 전투가 벌어진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시녀가 나서서 설명을 했다. “이승에서 온 분들이 너무 이승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아 가끔 저런 장면을 연출하게 둔답니다. 실은 저것들은 모두 환영이랍니다.”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둘의 전투 장면은 이승의 그 어떤 전투보다 박력이 넘쳤다. 초선과 왕미인이 숲에서 돌아오다 이 둘의 전투 장면을 보게 되었다. “사내들도 못 당하겠군.” 왕미인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사랑에는 약한 여인들이지요.” 초선이 말했다. 여포가 봤으면 질풍같이 내달려 양 겨드랑이에 여자 하나씩을 꿰차고 그만 귀여움 떨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초선은 미소를 지었다. ㆍ또 하나의 별똥별이 지니
    어느덧 석양이 지고 정자 속 여인들의 모습도 황혼빛에 물들어갔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나볼 수 없었던 여인들의 얘기는 끝이 없었고, 특히 영웅들에 대해 얘기할 땐 서로 눈에 불꽃이 튀기도 했다. 한 사내를 두고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가운데 여인들은 자신의 선택과 결단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었음을 뿌듯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움은 그리움뿐. 지나간 한 시대와 낭군에 대한 그리움은 여기 와서도 옅어지지 않았고, 앞으로 또 언제 이런 모임이 있을지 모르지만 천 년 후에 다시 이 자리를 갖는다 해도 그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을 성 싶었다. 어둠이 내리자 촛불이 켜졌고 어디서 호가(胡笳)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호 채옹(蔡邕)의 여식 채염(蔡琰)입니다. 밤이면 그녀의 호가 소리가 은하계를 건너 저렇게 울려온답니다.” 시녀가 말했다. 허도(許都)의 백성들과 조조의 심금을 울렸던 그 호가 소리가 여인들의 심사를 대변하는 듯 애절하게 울려 퍼졌다. 거기에 천상의 과일로 빚은 약주가 여인들의 심정을 고조시켰다. 어둠 속에서 치마 끄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사마의의 부인이었다. “장춘화(張春華), 당신이 올 줄은 몰랐소.” 변황후가 말했다. “조씨 나라를 폐하고 사마씨의 진(晉)나라를 건설하게 한 점 사과드리려 온 건 아닙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고 수정할 수 없는 거지요.” 그녀는 밤에 나타난 이유를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인내를 갖고 은밀히 기회를 보다 위나라를 차지한 사마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렇소. 역사는 강자들의 기록이오. 그리고 여인들은 그 강자들을 품은 또 하나의 세계예요.” 변황후가 말했다. 승패를 가리지 못한 손인과 축융부인까지 돌아와 여인들은 모두 둘러앉아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하늘에도 밤하늘이 있었고 영웅들은 지지 않는 별들이 되어 여인들의 머리 위로 광활하게 떠 있었다. 여인들은 수많은 별 중 자신의 낭군을 찾으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별똥별 하나가 빠르게 떨어졌다. “또 어떤 영웅이 숨을 거뒀나.” 누군가 탄식했다. “저것은 어쩜 사내가 아니라 어느 여인의 별인지도 모르죠.” 초선이 말했다. 후세의 영웅은 사내가 아니라 여인들에게서 나올 수도 있었다. 여인들은, 오늘밤 별똥별이 되어 떨어진 그녀를 다음 모임에 만나보기로 하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나라에선 이 이야기들을 기록하여 ‘삼국지의 여인들’이란 책자를 만들어 내놓기로 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 온 영웅들도 그 책을 통해 여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각자의 거처로 돌아갈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여인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때로 웃고 때로 탄식하고 때로 눈물을 글썽이며 이 밤을 함께하였다. 마치 영원과도 같은 하늘나라의 밤이었다.(끝)
    Monthly Chosun ☜        글 : 민희식 前 서울대 교수 / 그림 : 유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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