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삼국지의 여인들

10 異邦의 女傑들

浮萍草 2015. 11. 8. 00:00
    ▲   공명은 잡혀온 맹획의 아내 축융부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촉의 장수를 사로잡은 축융부인 ㆍ孔明의 南征 (蜀)나라의 국력을 키우며 북벌 준비를 하고 있던 공명에게 익주(益州)에서 사자가 급히 달려왔다. 보고의 내용은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국경 부근까지 쳐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공명은 바로 남국 원정을 단행하였다. 병력은 50만. 대장에 조운(趙雲) 위연(魏延)을 임명하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남만에서는 고정(高定)이 나섰다. 고정이 수하의 악환(鄂煥)에게 선봉을 맡겼으나 그는 촉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공명은 악환에게 술과 음식을 주고 “고정은 의리 있는 인물이다. 이번 일은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니다. 빨리 돌아가 이를 전하라”고 이른뒤 풀어 주었다. 공명의 관대함에 감동받은 악환이 그 말을 전하자 고정은 감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은 ‘공명의 이간정책’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공명은 고정과 다른 장수들의 군세가 쳐들어오자 적을 반쯤 소탕하고 나머지는 생포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고정의 군사는 목숨을 살려준다’는 소문을 흘렸다. 고정의 군사와 고정의 군사라고 거짓말한 군사는 목숨을 건졌다. 촉군의 승리에 당황한 맹획은 3동(洞)의 원수를 소집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조운이 공명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출격하니 이 불의의 공격에 남만군은 크게 놀라 전장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속출하며 패주하였다. 패배를 안 맹획은 격노하여 다수의 군세를 몰고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공명의 책략에 걸려 든 맹획은 협곡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위연에게 생포되었다. 공명은 맹획군의 군사를 잘 대접하고 맹획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공명은 강제로 항복시키기보다 마음으로 항복시키는 평정 방법을 쓰고자 했다. 위(魏)나라와 대척하고 있는 상황에서 맹획을 죽여 봐야 그들은 복수심만 불태우며 위와 계속 손을 잡을 것이었다. 맹획이 진정으로 항복하지 않는 한 몇 번이고 싸울 작정이었다. 공명은 이번엔 위수를 향해 진격하였다. 맹획은 위수 남쪽에 포진하여 촉군의 도하를 막았으나 공명은 우회하여 남만군의 양식로를 차단했다. 이어 마대(馬垈)는 정병 2000을 거느리고 남만군의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나 맹획 더운 계절이 오면 촉군이 견디지 못하리라 믿고 술만 마시고 지내면서 때를 기다려 공명을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마대의 공격을 알고 동도나(董茶那)를 보내나 그는 전투에 패하고 말았다. 참패 사실을 보고받고 화가 난 맹획은 곤장 100대의 형을 가했다. 그날 밤 분을 못 이긴 동도나가 이끄는 군세가 맹획의 본진을 습격했다. 그들은 지난번 전투에서 공명이 풀어 준 자들로, 술에 취한 맹획을 사로잡아 공명에게 바쳤다. ㆍ맹획을 잡았다 풀어 준 공명
    공명은 다시 한 번 맹획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래서 촉군의 진중으로 그를 데려가 강한 군세를 보여주자 맹획은 이번에 풀어 주면 백성들을 설득하여 귀순하겠다고 했다. 또다시 풀려난 맹획은 이번에도 항복할 마음이 없었다. 마침 맹획의 동생 맹우(孟優)가 공명을 이길 계책이 있다고 일렀다. 많은 선물을 들고 공명에게 가 맹획의 항복을 전하면 공명이 크게 만족하여 방자한 기분에 연회를 열 터이니 그 틈을 노려 공격하라고 했다. 맹획은 이 계책이 마음에 들어 그리하라고 했다. 맹우가 선물을 들고 공명을 찾아가 항복의 의사를 표하자 공명은 그와 병사들을 음식과 술로 잘 대접하였다. 맹우의 거짓 항복이 받아들여진 것을 안 맹획은 3만의 군세를 셋으로 나누어 공명의 본진을 습격했다. 그런데 본진에 있는 군사가 술에 취해 움직이지 않아 이상했다. 대신 사방에서 위연, 조운의 군사가 쏟아져 나와 놀란 맹획은 도망쳤으나 곧 붙잡혔다. 모든 것은 공명의 책략이었다. 맹획의 작전을 꿰뚫어 본 공명은 우선 공명 진영에 있는 남만군들에게 독한 약이 섞인 술을 먹이고 대신 남만병으로 위장한 복병을 사방에 배치해 맹획을 노린 것이다. 이로써 맹획은 세 번이나 공명에게 끌려간 건데 그래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 공명은 ‘다음 번에는 전쟁다운 전쟁을 하라’고 이르고 다시 돌려보냈다. 유비(劉備)가 죽은 직후 위의 조비(曹丕)는 사마의(司馬懿)의 건의에 따라 촉을 침공코자 하였다. 그래서 남만왕 맹획은 위에서 벼슬자리를 받고 촉을 치게 된 것이다. 무용 일변도로 전략을 모르는 맹획은 공명의 적이 아니었다. 얄팍한 전술로 번번이 공명에게 사로잡혔다. 공명은 위가 쳐들어오기 전에 맹획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그를 잡아도 계속 달래서 돌려보냈다. 남만군의 공격에 대해서 공명은 정식으로 맞서지 않고 지구전을 펼쳤다. 적의 사기를 꺾고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남만군이 피로의 기미를 보이자 공명은 공세를 취했다. 어느 날 맹획이 대군을 이끌고 촉의 진지에 난입하였으나 병사가 없고 사방에 흩어져 있어 촉 진영에 큰 사건이 생긴 것으로 알고 진격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강의 북쪽에 이르러 도강을 할 때 사방에서 촉의 군사가 나타나 그만 포위되어 버렸다. 맹획은 도저히 이길 도리가 없음을 알고 도주하여 독룡동(禿龍洞)의 타사대왕(朶思大王)에게로 갔다. 동생 맹우의 도움으로 타사대왕을 만난 맹획은 촉군을 무찌르는 데 도움을 달라고 청하였다. 타사대왕은, 대군이 통행할 수 있는 동북로를 폐쇄하고 촉군이 서북으로 진군하게끔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서북로는 산길이 험하고 해가 질 무렵에는 심한 진풍(陣風)이 일어나 사람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진풍은 낮시간 한때는 가라앉지만 대군의 행군을 크게 지체시킬 수 있다 하였다. 샘이 네 곳 있지만 독기가 있어 마시면 열흘 이내에 죽으며 샛길이 있지만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린다고 했다. 공명은 왕평(王平)에게 투항한 남만군을 앞장세워 서북간도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다소 피해를 입었으나 산신(山神)인 노인의 도움으로 진기에서 몸을 지키는 비법을 얻어 무사히 통과하였다. 감사하며 공명이 성함을 묻자 그는 다름 아닌 맹획의 형 맹절(孟節)이었다. 맹절은 공명에게 자기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고약해 못된 짓을 저지르니 그 피해를 입지 않도록 남을 돕는다고 했다. 그는 공명에게 동생의 죄에 대해 사과하였다. 작전이 파탄된 것을 안 맹획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측근들과 이별의 잔치를 벌였다. 그때 은야동(銀冶洞)의 동주인 양봉(楊鋒)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맹획이 기뻐하자 양봉은 수많은 미녀들을 데리고 와 잔치는 더 화려해졌다. 그때 갑자기 공명의 군세가 나타났다. 맹획이 도주하려 하자 그를 둘러싸고 춤추던 미녀들이 벽을 만들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맹획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양봉은 공명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양봉은 한때 싸움터에서 공명의 포로가 되었으나 너무나 잘 대우를 해 주고 미녀와 선물까지 주어 돌려보낸 적이 있어 그 은혜를 갚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맹획은 또 다시 풀려났다. 타사대왕은 삼강성(三江城)에서 촉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ㆍ남만왕 맹획의 거듭된 패전
    번번이 공명에게 진 맹획은 본거지인 은갱동(銀坑洞)에서 젊은 무희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공명이란 녀석은….” 맹획이 갑자기 거칠게 술잔을 집어던지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유비의 사후 남만군은 익주 남부의 호족과 함께 촉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제갈공명이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정에 나섰던 것이다. 남만의 영토는 중국 대륙과 달라서 풍토와 기후가 좋지 않고 수송 행군이 곤란한 땅이 많다. 그래서 맹획은 지세(地勢)만 이용하면 촉을 쉽게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맹획은 싸울 때마다 공명의 계략에 걸려 패전하고 사로잡히니 그때마다 공명이 풀어 준 게 여러 차례였다. 그의 아우 맹우는 성격이 형보다 온화하여 무모한 형에게 싸움을 중단하라고 타일렀다. “싸움에 진 것은 분하겠지만 패전에 대해서는 잊고 여생이나마 즐겁게 사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하긴 술과 여자만 있으면 인생이란 즐거운 법이지….” 그 말이 옳다고 여긴 그는 아우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한 여인이 나타나 맹획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의 이름은 축융부인(祝融婦人), 즉 맹획의 부인이다. 거친 기질에다 무예도 뛰어났다. “전쟁에 지고 나서 이게 무슨 소동이지? 사내답지 못하군.” 축융부인이 어떤 여자인가. 어느 날 사자가 나타나 사람들이 놀라 모두 도망쳤으나 그녀가 버티고 서서 노려보자 사자가 갑자기 온순해졌다고 한다. 사자는 그녀에게 길들여져 고양이처럼 따랐다. 그녀는 무술을 즐겨 자기보다 무술이 뛰어난 자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10년 전 아버지의 청으로 맹획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 맹획과 결투하다 말이 미끄러지며 떨어졌고 맹획이 그녀를 눌러 항복시켰다. 분하지만 싸움에 진 이상 약속대로 그의 부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항복은 그때 한 번뿐이었다. 잠자리에서만은 언제나 축융부인이 승자였다. 그런 부인과 함께 맹획은 남만국을 다스렸다. ㆍ축융부인의 출전
    “공명은 정면에서 싸우지 않고 이상한 책략을 쓴다고…. 아주 비겁하지…. 그 때문에 내가 당한 거야” 하고 맹획은 부인에게 변명하였다. “여보, 그게 남만국의 왕이 할 소린가요. 정말 당신이란 자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울 수밖에 없군요.” 부인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럼 한 번 해 보구려.” 이튿날 축융은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대체 저 여자 누구야?” 촉의 장군 장의(張儀)는 앞장서 날뛰는 그녀를 발견하고 추격했으나 그녀가 던진 단검이 넓적다리에 꽂혀 말에서 떨어졌다. 장의가 축융에게 체포되자 촉나라 군사는 뿔뿔이 도망쳤다. 축융이 은갱동에 돌아오자 맹획은 부인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이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금 죽일 수는 없지. 이놈을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공명을 잡아오면 함께 죽여 버리자고.” ㆍ공명에게 잡힌 축융
    촉군 진영에서는 장의를 구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마충(馬忠)이 “제가 장의 장군을 구출하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크게 활약한 촉의 명장 마충은 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네가 공명이냐?” 하고 축융 부인이 깔보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마충이다. 여자 따위가 왜 전쟁에 나왔느냐?” “뭐라고? 왜 공명이 직접 나오지 않고 남자 중에서도 너 같은 조무래기가 나타났느냐?” “그 입을 다물게 만들 테니 기다려라.” 둘의 격투가 벌어졌다. 그녀가 던진 칼에 말이 쓰러지며 마충은 낙마했고 그 바람에 체포되었다. 장군을 둘이나 잃게 되자 공명은 조운과 위연에게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는 계책을 전했다. 며칠 후 그녀는 전투 중 조운과 대결하게 되었다. 힘껏 겨루었으나 당할 수 없다고 여긴 그녀는 단검을 던지며 싸우다 도망쳤다. 너무나 빨리 도망쳐 조운은 그녀를 잡지 못했다. “안되겠다. 내일은 승상한테 배운 술책을 써야겠구먼.” 조운이 위연에게 말했다. 다음 날은 위연이 그녀와 다투었다. 위연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병사를 내보내 그녀에게 도전하였다. “저게 그 유명한 타조인인가? 타조와 똑같이 생겼군.” “나에게는 산돼지처럼 보이는데…. 산돼지야 이리 와라.” 거칠고 프라이드가 강한 그녀는 화를 내며 잡병들을 쫓아버렸다. “너희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 축융은 냉정을 잃고 힘이 넘쳐 촉군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그러다 산 아래 계곡으로 들어갔고 촉군이 장치한 올가미에 걸려 생포되었다. 그녀는 공명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공명이 타일렀다. “이제 남편에게 항복하라고 권하는 것이 어떨지.” “당신네들이 멋대로 쳐들어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 남편은 다섯 번이나 잡혔고 내가 그때마다 풀어 주었소. 더 이상 수모를 겪을 필요가 있겠소?” “제 아무리 여러 번 체포당해도 자존심은 남아 있소. 나는 그를 도와 싸울 것이니 차라리 지금 나를 죽이는 것이 좋을 거요.” 결국 축융을 장의, 마충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낙착되었다. 그녀는 언제고 반드시 공명을 체포하겠다고 외치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ㆍ맹수를 다루는 목록대왕
    그녀가 돌아오자, 남편은 “이웃나라 목록대왕(木鹿大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도와주겠다 하였으니 이제 촉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기쁨에 들떠서 말했다. 본래 목록대왕과 맹획은 대립관계에 있었으나 맹획이 많은 선물을 주기로 약속하고 원군을 청한 것이다. 목록대왕은 거대한 흰코끼리를 타고 찾아왔다. 코끼리뿐 아니라 우리에 넣은 사자, 호랑이, 표범도 가지고 왔다. “촉의 군세가 강하다고 하나 그들이 뭐요. 기껏 사람이고 기껏 말 아니오, 이 맹수들을 보면 공포에 떨며 도망칠 것이니 염려 놓으시오.” 그날 밤 맹획, 축융부인, 목록대왕은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부인이 매우 아름답소.” 목록대왕은 축융부인의 손을 잡는가 싶더니 술김에 가슴을 만졌다. 이어 그녀와 작전계획을 짜러 별실로 가겠다고 하자 맹획은 화가 났지만 비위를 건드릴 수가 없어 꾹 참았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튿날 목록대왕은 과연 맹수를 몰고 출전하였다. 맹수가 숲속에서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니 놀란 촉병은 패주하고 남만군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패한 공명은 맹수보다 훨씬 큰 목각맹수를 만들었다. 다음 전투에 그 목각맹수가 입으로 불을 뿜자 겁을 먹은 목록대왕의 맹수들이 다 달아나고 말았다. 목록대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군사도 혼비백산해 맹수와 더불어 남만군은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맹획과 축융은 공명과 대면하게 되었다. “병사도 다 잃고 나라도 혼란할 텐데 그래도 싸우고 싶은가? 정녕 그렇다면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이렇게 말하고 공명은 그들을 석방하였다. ㆍ최후의 보루 등갑군의 위협
    의기소침해진 맹획과 축융은 구원의 손길을 보내줄 나라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 모습에 축융의 동생 대래동주(帶來洞主)가 조언을 했다. “동남의 오과국(烏瓜國)에 가 보시오. 그 나라에는 등갑군(藤甲軍)이라 불리는 3만 강병이 있어 촉군을 무찌를 수 있을 겁니다.” 등갑이란 등나무 줄기를 말려 기름에 적신 뒤 햇볕에 말리기를 수십 번 되풀이하여 짠 갑옷이다. 화살도 칼도 뚫지 못하고 강을 떠서 건너갈 수도 있어 전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맹획 일행은 동남으로 향하였다. 맹획이 사정 이야기를 하자 그 나라를 다스리는 오과족의 왕 올돌골(兀突骨)은 “승리하면 빼앗긴 땅을 반씩 나눈다는 조건으로 전투에 임하겠소”라고 제안했다. 올돌골이 이끄는 등갑군에 맞서 촉군은 정공법으로 나왔으나 등갑에는 화살과 칼이 소용없어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해 보고 패하였다. 그 후에도 올돌골이 이끄는 등갑군은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올돌골은 승리에 도취하여 깊은 산 계곡까지 전진하였다. 공명이 그 골짜기에 화약과 지뢰를 설치해 놓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등갑에 불이 불자 무섭게 타올라 전원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그들이 전부 불에 타 죽은 처참한 모습을 보고 공명은 눈물을 흘렸다. 맹획은 더 이상 의지할 군사가 사라지자 자포자기 상태에서 촉군을 향해 마지막 공격을 하였다. 결국 맹획은 사로잡히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던 그의 부인도 공명에게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였다. 공명은 축융부인의 용기와 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그녀의 뛰어난 전술을 찬양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앞으로는 촉나라와 화친한 후 편안하게 살자고 말하고는 남편을 껴안고 돌아갔다. 이후 남만의 땅에는 평화가 되돌아왔다. 그리고 축융부인과 공명은 가끔 서로를 떠올렸다.
    공명의 부인이 된 로마의 여인
    공명(孔明)은 젊어서 형주(荊州)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동료에는 석광원(石廣元), 서서(徐庶), 맹공위(孟公威) 등이 있다. 위의 세 사람은 주로 학문의 정밀성에 치중하였으나 공명은 학문의 요점을 잡아 그 본질을 추구하였다. 학우 서서가 유비(劉備)의 군사(軍師)로 있으면서 조조(曹操)의 군세를 무찔렀으나 모친이 조조에게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유비 곁을 떠나야 했다. 떠나기 전 그는 공명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유비가 공명을 세 번 찾아가니 그 의지와 정성에 감동한 공명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그때부터 그는 유비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 까지 보좌했다). 공명의 도움으로 유비는 오(吳)의 왕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고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가 오와 동맹을 맺은 데는 조조와 싸워야 한다는 오의 신진 정치가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배경도 있었다. 그 후 공명은 유비를 모시고 형주와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왕업의 설계에 열중하였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건안(建安) 24년(서기 219년)이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후 관우(關羽)의 패전, 유비의 오 원정 실패로 인하여 촉(蜀)은 하나의 지방정권으로 전락하였다. 공명의 전투는 바로 이때 시작한다. 우선 국력을 회복하고 내정을 충실히 하였다. 적이었던 오나라와도 우호관계를 맺고 국가를 안정시켰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조조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만국의 침범을 막고 원주민을 달래 평화를 확립하였다. 출사표(出師表)는 공명이 그 이후의 사업완성을 향한 꿈을 나타낸 것이다. 삼국은 당시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공명은 머지않아 위험이 닥쳐올 것을 알고 있었다. 국력의 크기는 위, 오, 촉이 6대 3대 1이었다. 촉은 중국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공명은 군비를 강화하고 한 제국의 침탈자인 위에게 계속 도전하는 것이 촉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거의 하나의 신념, 신앙이 되어 버렸다. 공명의 부인 황월영(黃月英)은 공명이 위와 대결해 싸우는 동안 계속 전략을 선보이고 새로운 무기의 개발에 힘썼다. 황부인은 무척 영리하였다. 공명에게 위나라를 치지 말고 우선 국가를 강하게 하여 평화를 유지하며 때를 기다리라고 수없이 충고를 하였다. 공명의 강한 신념은 존중하지만 신념만으로는 위나라에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공명의 전생이 한니발이었던지 한니발이 알프스산을 넘어 바로 로마를 치지 않은 것이 한이 되어 다시 태어난 그로서는 위나라를 쳐부숴야만 했던 것이다. 황부인은 온힘을 다해 남편을 도우면서도 위 정벌(征伐)을 중단시키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고 체념한 상태에서 촉이 머지않아 멸망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 공명의 부인 황여인은 어떠한 여자인가? 그녀의 아버지는 로마인으로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이다.
      ㆍ아름다운 얼굴을 감춘 異國의 소녀
    로마인이 이끄는 상인 일행이 2년간 실크로드를 거쳐 장안(長安)에 이르렀을 때 마리아는 그 도시의 활기에 놀랐다. “아버님, 여기가 동쪽 나라 제일의 도시인가요?” 과학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상인을 따라 한나라에 왔는데 그 이유는 서양의 치수(治水)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실크로드는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과 장안을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세계 제일의 교역로이다. 장안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상인들이 시장을 열었고 금은보배 비단제품,도자기,그리고 인간까지도 매매가 성행하였다. 특히 아랍산의 큰 말은 한나라 관리들이 몹시 탐을 내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1년여 머무는 동안에 이곳의 풍습과 언어를 거의 익혔다. 그녀가 13세가 된 어느 날 얼굴을 먹으로 검게 칠한 것을 본 아버지는 그 이유를 물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모두 뚫어지게 쳐다봐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같은 나이 또래의 한나라 여성보다 몸이 크고 얼굴도 특수하게 생겼다. 당시 마을에는 서양인 창녀들이 많았는데 중국인들이 유별나게 좋아했다. 마리아는 그런 그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2년 후 아버지는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그녀는 아버지와 친했던 황승언(黃承彦)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형주 양양(襄陽)의 부자로 마리아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워했다. 마리아는 그의 보호하에 학문에 열중하였다. 아버지가 남겨 놓은 설계도를 보고 자동인형 등 갖가지 기계를 발명하여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황승언은 그녀가 그 방면에 큰 인재가 되리라고 보고 먼저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두 천재가 있었다. 하나는 와룡 언덕에 사는 제갈량(諸葛亮)으로 자는 공명이었다. 또 하나는 방통(龐統)으로 자는 사원(士元)이었다. 이 둘은 아직 이름을 떨치지 않았으나, 공명은 잠든 용, 사원은 어린 봉으로 이 둘 가운데 하나라도 얻는 자는 원한다면 천하를 지배할 수 있다고 수경선생 사마휘 (司馬徽)가 예언한 바 있었다. 공명은 그 뛰어난 풍모와 재능 때문에 연담이 많이 있었으나, 상대가 제 아무리 미인이고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이어도 정중히 거절해 왔다. 공명에게는 두 가지 원이 있었는데 하나는 자기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덕 있는 주군을 만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의 마음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여인과 같이 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서서는 공명과 마음이 통할 만한 여자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ㆍ공명의 부인 고르기
    건안(建安) 11년(서기 206년) 6월 황승언은 마리아를 데리고 공명이 사는 초가집을 방문하였다. 공명은 마리아의 금빛 머리털, 회색 눈동자, 거대한 체구, 얼굴을 검게 칠해 미를 감춘 모습, 지식의 풍부함, 탐구심이 강한 면을 보고 매우 놀랐다. 공명은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도 그가 마음에 들어 바로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황승언의 딸로 간주되어 황부인이라고 불렸다. 황부인은 공명에게만 그의 흰 살을 보였는데 외출할 때는 얼굴을 검게 칠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였다. 황부인은 여러 가지 발명품이나 발명기술로 공명을 놀래는 것이 즐거웠고 공명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능을 개발하였다.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하게 지냈다. 이듬해 공명의 평판을 들은 유비가 세 차례나 공명을 방문하여 군사로 맞아들였다. 공명은 후에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시하였다. 북은 조조에게 양보하되 유비는 형주를 기반으로 하여 익주로 뻗어 오의 손권과 천하를 삼분하는 계획이었다. 그 후 오와 동맹하여 조조를 견제한 후 천하 통일로 한나라 왕실을 부흥시키는 것이 그의 원대한 야망이었다. 공명이 황부인과 의논해 이처럼 심원하고 멋진 안을 내놓자, 유비는 뚜렷한 목표와 함께 나아갈 길이 열린 것에 기뻐하였다. 공명보다 스무 살이나 위인 유비지만 유비는 공명을 믿고 공명도 유비를 이상적인 주군으로 받들었다. 거기에 황부인은 멋진 참모역을 하였다. 유비는 “공명과 나는 물고기와 물처럼 서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고 하였다. 공명과 황부인은 초가집을 동생 제갈균(諸葛均)에게 맡기고, 유비가 다스리는 형주 근처의 신야성(新野城)으로 옮겨갔다. 공명이 거기서 군사를 양육할 때 조조군 10만이 쳐들어왔다. 황부인은 “유비 나리께 검과 인을 받고 병권(兵權)을 잡으라”고 충고하였다. “여보, 당신은 아직 젊고 실적이 없습니다. 관우, 장비, 조운 같은 이름 있는 장군이 말을 잘 안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좋은 계획도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유비 나리로부터 병권을 얻어내야만 당신의 명령이 권위를 가질 것입니다.” 공명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의 말을 따랐다. 유비는 공명에게 병권을 맡기고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조군은, 황부인의 조언을 들은 공명의 계략에 걸려 괴멸한 채 도주하였다. 모두 공명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ㆍ조조군에 잡힌 황부인
    크게 참패한 것에 분해한 조조는 스스로 50만 병력을 이끌고 다시 신야성으로 쳐들어갔다. 성의 수비병은 겨우 1만명에 불과하였다. 공명과 유비는 영민들을 데리고 남하하였으나 조조에게 추격당해 군대와 영민들과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황부인도 혼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가 조조군의 병사에게 발견되었다. 얼굴을 먹으로 검게 칠한 금발의 여인을 향해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이 여인이 공명의 부인이다.” “참 못생겼네…. 이것도 여자인가.” “옷을 벗겨 여잔지 확인해 보자.” 병사들은 웃으며 그녀에게 접근하였다. 한 병사가 황부인의 몸에 손대려 하자 그녀는 재빠르게 페르시아의 단도를 꺼내 방심한 세 병사의 목을 찌르고 말을 빼앗아 남편이 머무르고 있는 강하(江夏)로 달려갔다. 공명은 옷이 피로 붉게 물든 황부인을 보고는 껴안고 울었다. “내가 정신이 없어 당신을 죽일 뻔했소.” 그녀는 남편에게 안겨 깊은 잠이 들었다. 황부인과 공명, 그리고 유비군은 강하로 내려가 한때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으나 조조군은 형주를 평정하고 80만의 군세로 장강의 위수에 기지를 만들어 강하의 유비군과 그 후방에서 세력을 뻗치는 오의 손권군을 평정하고 천하지배의 최종태세에 들어가고자 했다. 이 상태로 유비군은 독 안에 든 쥐로 조조군에게 전멸되는 것이 시간 문제였다. 황부인은 순찰 중인 남편에게 독촉했다. “왜 헤매십니까. 궁지에 몰린 이 순간이야말로 천하삼분의 계를 이룩해야 할 기회입니다.” “적은 대군이오. 뭘 어찌 하란 말이오.” 공명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황부인이 대답했다. “오의 손권과 급히 동맹을 맺은 후 조조를 막을 방법을 구하세요. 그렇게만 한다면 틀림없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 말에 공명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공명은 단신으로 배를 타고 장강을 내려가 오나라로 갔다. 며칠 후 유비군과 오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나라 병사는 수는 적지만 수전에 능하고 조조의 군은 수는 많지만 북쪽 사람들이라 수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오군과 조조군이 장강에서 격돌하여 오군이 승리하였다. 7000척이나 되는 대선단은 공명의 계략으로 인하여 다 타 버리고 조조는 빈사의 상태에서 도주하였다. 공명은 조조가 사라진 형주를 빼앗아 기반을 굳혔다. 3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황부인은 애를 갖지 못하여 공명의 형 제갈근(諸葛瑾)이 차남 제갈교(諸葛喬)를 그들에게 양자로 주었다. ㆍ공명을 아이디어로 구해
    건안 24년(서기 219년) 유비군은 형주에서 출사하여 익주, 한중을 취하고 건안 26년에 유비는 촉한 황제가 되었다. 형주, 익주, 한중이라는 중국의 중앙에서 서방을 전부 평정하고 촉한 왕국을 만든 것이다. 공명은 승상(丞相)이 되었다. 공명은 위를 치기 위해 험한 산을 넘어야만 했다. 10만이 넘는 병사들의 식량을 소나 말이 날라야 했다. 또한 우마(牛馬)의 식량만 해도 막대한 양이었다. 황부인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남겨준 인형의 설계도로 나무 우마를 만들었다. 나무 우마라 먹이도 필요 없고 하루 종일 일해도 피곤해하지 않을 터였다. 2년의 세월을 두고 목우(木牛)를 완성하였다. 많은 고생을 한 공명도 4차 북벌 때부터는 우마의 활약으로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전투도 매우 유리해졌으나 적장 사마의(司馬懿)의 지구전에 말려 결국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황부인은 남편이 5차 북벌을 떠나기 전에 물었다. “목우유마(木牛流馬)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싸우려고 합니까.” “그것은 내가 이미 7년 전 출사표(出師表)에 밝힌 그대로요. 반드시 북방을 수복하라는 선제의 유언을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찌 잊을 수 있겠소.” 5차 북벌을 위해 떠난 공명은 오장원(五丈原)에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건흥(建興) 5년(서기227년)에 공명이 위를 징벌하러 떠나며 후제(侯第)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는 이후 1800년을 살아남아 그것을 읽는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린다. ㆍ촉상(蜀相) 두보(杜甫)
    丞相祠堂何處尋 승상의 사당 어디 가면 찾으리. 錦官城外柏森森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우거진 곳이어라. 映階碧草自春色 섬돌에 비친 푸른 풀에 봄빛 어리는데 隔葉黃鸝空好音 나뭇잎 사이 노란 꾀꼬리 마냥 우네.
    三顧頻煩天下計 세 번이나 유비가 찾아와 천하 계교를 얻었으니 兩朝開濟老臣心 양대에 걸쳐 조정을 돌봄은 늙은 신하 마음이네. 出師未捷身先死 출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뜨니 長使英雄淚滿襟 영웅들의 눈물만 길이 옷깃 적시네.

    Monthly Chosun ☜        글 : 민희식 前 서울대 교수 / 그림 : 유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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