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삼국지의 여인들

9 손인과 사마지

浮萍草 2015. 11. 1. 00:00
    ▲   “아두는 이 나라의 하나뿐인 후계자입니다. 어찌 그 애를 오나라로 데려가려 합니까. 마님께서 가는 것은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두는 안 됩니다.”
    ㆍ孫仁, 劉備를 사랑했기에
    권(孫權)은 시상군(是相郡)에서 요양 중인 주유(周瑜)에게 사람을 보내 유비와 손인이 결혼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전했다. 주유는 한 가지 계책이 떠올라 사자에게 글을 써 손권에게 보냈다. <제 생각엔 유비를 동오(東吳)에 계속 붙잡아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화려한 궁실에서 술과 미녀로 정신을 흐리게 하면 장비(張飛)나 관운장(關雲長)과도 정이 멀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조치를 한 후 군사를 일으키면 승리가 눈앞에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주유의 편지를 스승처럼 생각하는 장소(張昭)에게 보여주었다. 조조와의 전쟁을 앞두고 화친(和親)을 주장한 장소였지만, 전쟁이 오·촉(吳·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도 그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손권의 형 손책(孫策)이 그를 아꼈고 그 또한 권좌에 대한 권력욕을 품지 않고 손권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었다. “주유 장군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유비는 가난하게 태어난 데다 그간 천하를 돌며 고생하느라 부귀영화를 누려 보지 못한 자입니다. 이제 궁궐과 계집과 갖가지 보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신하들과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하들이 유현덕을 크게 원망할 것이니 그때 사기가 떨어진 형주(荊州)를 치면 됩니다.” 장소는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위인이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렇듯 융통성을 발휘할 줄도 알았다. 손권은 두 사람의 말이 그럴듯하여 궁궐을 수리하고 정원을 꾸미고 미녀들을 시중들게 하여 유비와 누이동생이 거처하도록 하였다. 유비는 아름다운 무희들의 노래와 주색에 빠져 형주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려 하자 조운(趙雲)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손인에게 시달리다가는 천하고 뭐고 먼저 사람이 죽겠다.〉 문득 공명(孔明)이 연말에 열어 보라고 한 비단주머니 생각이 났다. 가장 위급한 시기에 세 번째 주머니를 펴 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위급하다기보다 답답한 상황이었다. 조자룡은 두 번째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유비가 묵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조자룡이 얼굴 가득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 보이며 서 있자, “무슨 일인가 조운.” 하고 유비가 물었다. “주공께서는 꿈같은 세계에 빠져 형주의 일은 잊고 계신 듯합니다.” “형주에 무슨 놀랄 일이라도 있는가.” “조조가 적벽대전(赤壁大戰)의 패배를 되갚겠다며 50만 군사를 일으켜 물밀 듯 형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다급하니 주공께서 빨리 오셨으면 한다는 공명 선생의 전달이 왔습니다.” 이는 유비를 동오에서 빼내 오기 위한 공명의 사전 계책이었다. 유비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매우 놀란 척하였다. 하나 그동안의 꿈 같은 생활에 미련이 남아 손 부인의 방으로 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손 부인이 어인 눈물인지 물었다. “내가 타향으로 떠돌아다니다 보니 양친도 모시지 못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못 지냈소.” 손 부인은 못마땅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송구하오나 제가 엿들었나이다. 조금 전에 조자룡이 나타나 형주가 위험하다고 빨리 돌아가자고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인이 다 알고 있으니 내가 어찌 속이겠소. 부인과 헤어지긴 싫지만 형주를 잃을 수는 없구려. 군사들과 백성들이 나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소?” < ㆍ밤마다 탈출 계획 가다듬은 유비와 손인
    “알겠습니다. 하나 저는 나리께 매인 몸, 나리가 가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이든 저도 갈 겁니다.” “고맙소, 부인. 정녕 부인의 뜻이 그러하니 정초에 국태(國太)께 세배를 드릴 때 강변에 있는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고 핑계를 댑시다. 그길로 형주로 가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둘이서 굳게 밀약을 하고 현덕은 조자룡을 불렀다. “정월 초하룻날 그대는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에 나가 기다리시오. 나는 제사를 지낸 후 내자와 함께 부두로 나가겠소.” 조자룡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유비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그날 밤 유비는 손인을 힘껏 껴안았다. 무예로 단련된 손인의 강건한 몸은, 그동안 밤마다 계속되는 잠자리들로 인해 여성 본래의 섬세함과 부드러움까지 가미되어 유비는 쾌감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 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손인과 함께할 때마다 뛰어난 적장 하나를 정복하는 느낌이었고 때로는 굴복당하는 쾌감도 맛보았다. 전투와는 달리 여성의 육체는 정복해도 굴복당해도 한없이 즐거운 것이었고 패배의 순간조차 깊은 의미에서 승리에 가까웠고 그 승리는 오롯이 두 사람의 것이었다. 이제 형주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어쩜 계책이 탄로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손인과의 잠자리가 더욱 애틋하고 뜨거워지는 것을 유비는 느꼈다. 손인 또한 같은 마음인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사내를 공략했다. 이러한 뜨거운 밤이 해가 다 가기까지 계속되자 시녀들은 두 사람이 색에 미쳤다고 수군대기까지 했다. 그러한 소식은 손권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가만 두어도 유비가 기가 다 빠져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크게 안심하였다. 그러나 유비와 손인 두 사람은 사랑만 나눈 게 아니었다. 그들은 관계 후면, 성공적으로 오나라를 빠져나갈 계책을 면밀히 가다듬었다. ㆍ공명의 세 번째 비단주머니
    정초가 되자 유비와 손 부인은 태부인을 찾아가 세배를 올렸다. 손 부인이 아뢰었다. “오늘 강변으로 나가 조상의 묘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제사를 지낼까 합니다.” “효도를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느냐.” 손 부인은 유비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손권은 이때까지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손 부인은 몸에 지닐 만큼의 값진 보물을 챙겨 말에 올랐다. 유비도 말에 올라 몇 명의 기병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조자룡을 만났다. 그들은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형주로 향하였다. 밤늦게야 그들이 도망친 사실을 알고 부하들이 손권에게 알렸으나 손권은 술에 취해 있었다. 장소가 이 소식을 다시 한 번 손권에게 알리자 정신을 차린 손권은 진무(陳武)와 반장(潘璋)에게 정병 500명을 데리고 추격하여 둘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주공의 누이동생이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여 장수들조차 두려워하므로 그녀 앞에서는 유비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손권은 크게 노하여 장흠(蔣欽)과 주태(周泰) 를 불러 “너희가 내 누이동생과 유비의 목을 베어 오너라.” 하고 소리쳤다. 그들은 1000여 군마를 거느리고 달려갔다. 유비 일행은 길가에서 노숙하면서 형주로 가고 있었다. 시상군 근처에 이르자 추격자들이 나타났다. 앞쪽 산모퉁이에서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주유가 정봉(丁奉)과 서성(徐盛)에게 3000 군사를 주어 길목을 지키게 한 것이다. 놀란 유비가 말머리를 돌려 조자룡에게 물었다. “앞에는 적병이 길을 막고 뒤에는 추격자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천하의 조자룡도 낭패한 얼굴이었다. 그때 비단주머니 생각이 났다. 위급할 때 꺼내 보라고 한 마지막 주머니였다. 조자룡은 비단 주머니를 열어 거기 쓰인 글을 보고는 유비에게 읽어 보시라고 건넸다. ㆍ위기일발의 유비
    “지난날 손권과 주유가 공모하여 부인을 나에게 출가시킨 것은 이 몸을 옥에 가두고 형주를 빼앗기 위함이었소. 그들은 형주를 빼앗은 후엔 반드시 나를 죽였을 것이오. 부인을 미끼로 나를 잡으려는 계획이었던 것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동오로 간 것은 위급 시에는 부인이 이 유비를 구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오. 지금 우리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부인이 나서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내 청을 들어 줄 수 없다면 나는 부인이 탄 수레 밑에 깔려 죽을 도리밖에 없소.” 이 말을 들은 손 부인은 분을 참지 못해 소리쳤다. “오라버니가 저를 남매로 인정하지 않는데 제가 어찌 그를 오라버니로 대하겠소. 오늘의 이 위기는 내가 알아 처리하겠사오니 서방님께서는 지켜만 보고 계십시오.” 그러고는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유현덕은 나의 주인이시다. 나는 국태의 허락을 받고 형주로 가는 길인데 너희들이 이리 길을 막고 있는 걸 보니 재물을 빼았으려는구나.” “아닙니다. 부인께서는 노기를 푸십시오. 저희는 주유 대도독(大都督)의 명으로 온 것입니다.” 서성이 황급히 답하였다. “너희는 주유만 두렵고 나는 두렵지 않으냐.” 이윽고 진무와 반장이 이끄는 추격대가 도착했다. 부인은 그 둘을 꾸짖었다. “이 못난 자들아. 너희는 우리 남매를 이간질하려 드는구나. 나는 이미 출가한 여인으로 시댁으로 가는 중이다. 어머님의 뜻을 받들어 남편을 따라 형주로 가는 길이니 너희는 물러가라.” 그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유비는 재빨리 도망쳤다. 네 장수가 급히 의논하였다. “도망쳐도 모병을 거느리고 있어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오. 두 분이 주유 도독에게 달려가 보고를 하고 수로를 차단하도록 하시오. 우리는 그들을 추격하겠소. 어느 쪽이건 그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는 거요.” 유비 일행은 시상군을 벗어나 유랑포에 이르자 마음이 다소 놓였다. 그들은 강변으로 가 강을 건널 궁리를 하였다. 그런데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아 유비는 시름에 잠겼다. 조자룡은 여전히 꿋꿋한 모습이었으나 어찌 공명이 네 번째 비단주머니는 주지 않았는지 비감해하고 있었다. 적병의 함성이 가까워지자 유비는 이제는 죽었구나 체념하고 있는데 20여 척의 배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쭉 늘어서 있었다. 조자룡이 말했다. “하늘이 도와 배가 왔습니다. 빨리 오르시죠.” 유비가 손 부인과 함께 배에 오르자 조자룡도 수행해 온 500 군사와 함께 배에 올랐다. 그런데 강 상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유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달리는 말처럼 힘차게 몰려오고 있었다. 주유의 수군이 유비를 추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계곡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휘하는 장수는 관운장이었다. 주유는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주유의 군사들은 거의 몰사하였다. 주유만이 간신히 도주했다. 미인계를 썼다가 그마저 실패하니 실리와 명분을 모두 잃은 셈이었다. 유비는 더 이상 그들을 쫓지 말라고 명하고 형주로 향했다. ㆍ유비의 아들을 인질로 잡으려던 손권의 계책
    형주로 돌아간 유비는 손 부인을 얻은 경사를 축하하며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오빠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손인은 오나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형주성에는 유비의 전 부인이 남겨 놓은 아두 (阿斗)가 있었다. 겨우 걷기 시작하는 나이였으나 손인은 자기 자식처럼 귀여워하였다. 유비는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손인만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유비와 공명은 기름진 평야가 있는 익주(益州)를 차지하기 위하여 군을 이끌고 멀리 서방으로 떠나야만 했다. 홀로 남겨진 손인은 오직 아두에게만 정을 붙이고 살았다. 유비가 떠난 지 일 년이 지난 무렵, 오나라 장수 주선(周善)이 찾아왔다. “국태께서 중병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딸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손인은 어머니가 그리워 달려가고 싶었지만 말없이 떠날 수가 없어 유비와 공명에게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하였다. “배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국태께선 병이 악화되어 서두르지 않으시면 영영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주선이 재촉을 하였다. 손인은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아두를 데리고 배를 탔다. 그때 조운이 달려와 뭍에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죠.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주선은 못 들은 척 배를 출발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는 오나라 장수 중에서도 배짱이 든든한 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조운이 물에 뛰어들어 그 배를 타려고 하자 주선은 병사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하였다. 조운은 칼로 창끝을 자르고 배에 올라탔다. 손인이 소리쳤다. “조운 장군. 어머니를 만나 뵙고 바로 돌아올 건데 이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급해도 군사(軍師)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아두까지 데리고 가시다니요.” “아두는 내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두고 가면 누가 이 애를 돌봐주겠소.” “아두는 이 나라의 하나뿐인 후계자입니다. 어찌 그 애를 오나라로 데려가려 하십니까. 마님께서 가는 것은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두는 안 됩니다.” 유비의 자식들은 난리통에 죽거나 행방불명되어 이제 아두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미부인(美夫人)이 우물에 몸을 던져 구한 이 아이를 안고 조자룡은 적진을 뚫고 피에 젖어 유비에게 돌아왔었다. 그런 아두를 오나라에 보내다니 안 될 말이었다. 조운이 아들을 빼앗으려고 하자 아두는 더욱더 손인 몸에 매달렸다. 파도가 심해 배가 몹시 흔들리자 조운은 중심을 잃었다. 그때 몇 척의 배가 접근해 왔고 선수에 선 장비가 외쳤다. “마님, 아이를 돌려주세요!” 장비는 조운이 있는 배에 올라탔다. 주선이 칼을 뽑아드는 걸 보고 장비가 칼을 한 차례 휘두르자 주선의 목이 굴러 떨어졌다. 손인이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사신을 죽이다니!” “할 수 없었습니다. 마님, 애는 내려놓고 다녀오십시오.” 아두는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울어댔다. 그러나 장비는 아두를 빼앗고 조운과 함께 배를 옮겨 탔다. ㆍ절망한 손인, 죽음을 택하다
    오나라로 돌아온 손인은 중병에 걸렸다던 어머니가 멀쩡한 걸 보았다. 손권이 유비의 아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계책이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제 모녀 사이까지 이용하려는 오라버니를 원망하며,그렇게 쉽게 믿은 자신의 불찰을 후회하였다. 그녀는 유비와 아두를 생각하며 울며 지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20년 마침내 조조(曹操)가 죽었다. 유비는 익주를 빼앗고 221년 촉의 황제가 되었다. 229년에는 손권이 오의 황제가 되었다. 형주 문제로 오나라는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219년 손권이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내자 유비는 크게 화가 나 황제 즉위 후 싸움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유비가 손권에게 항복할 상황이 되자 손인은 유비가 자기를 데리러 오나라로 오리라는 한가닥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희망은 허사가 되었다. 오나라 장수 육손(陸遜)의 계략으로 유비가 이끄는 17만 군대는 괴멸되었고 유비의 행방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절망한 손인은, 유비와 더불어 행복하게 지낸 한때를 추억하며 장강에 몸을 던졌다. 손인이 2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친 그날 유비도 백제성(白帝城)에서 세상을 떠났다. ㆍ사마지, 삼국 통일에의 정성
    도사(道士) 천기승은 여행 중 이상한 남자와 계집애를 보게 되었다. 남자의 나이는 50 정도로 심한 고생을 하며 살아온 초라한 모습이었고 큰 걱정거리가 얼굴에 씌어 있었다. 그러나 계집애는 16세 정도로 예쁘게 생겼는데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계집애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는 슬픈 얼굴인데 계집애는 웃는 얼굴이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천기승은 바보처럼 웃는 아이를 묘한 느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옹기를 하나 받쳐 들더니 한 번 돌려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아내의 뼈가 담긴 항아리입니다. 매장을 할 형편이 못 되어 우선 화장을 하여 뼈를 모아 장사를 지낼까 합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을 즐겁게 해 드릴 터이니 그 대가로 고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알고 보니 죽은 아내의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재주를 파는 거로군. 그런데 재주를 팔 기분이나 나겠소?” 슬픈 남자는 항아리를 옆으로 치우고 대나무 사다리를 가지고 와 세웠다. “여러분. 소인은 하늘에 있는 천왕모(天王母)의 도원에서 복숭아를 훔쳐 오는 재주밖에 없소이다. 여러분들이 그 맛을 보시면 100세까지 장수를 할 것입니다.” 구경꾼 중의 한 사람이 말을 거들고 나섰다. “정말 그 복숭아를 훔쳐 올 수만 있다면 은괴와 은돈 10만을 내리다. 그런데 하늘의 복숭아인지 어떻게 알겠소?”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건 천도가 아닙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어디 그러면 그 재주를 보기로 합시다.” 그 남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보 같이 웃는 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아버지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지아(芝兒)였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얘야. 너는 나 대신 저 봉우리 끝 구름 사이로 우뚝 솟은 하늘의 도원에서 복숭아를 따 오너라.” “알겠어요. 아버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ㆍ도원의 복숭아를 딴 지아
    그녀는 봉우리에 올라 나무에 사다리를 기대 놓고 위로 올라갔다. 사다리 끝에 오르자 하늘로 뻗친 나뭇가지를 잡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녀의 민첩한 동작과 정신력은 초인적이었다. 그녀는 원숭이의 습성을 타고난 듯했는데,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지만 그녀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복숭아나무 끝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입만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두 눈을 뜨고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슬픈 얼굴의 그녀 아버지가 말했다. “놀랄 만한 일이죠. 그 애는 도원으로 뻗친 나뭇가지에서 복숭아를 땄어요.” 마침내 그녀가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광주리에 복숭아를 담아 내려왔다. “여러 어르신네들을 놀라게 하여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그녀 앞에 수십 냥의 은전이 쌓였다. 그것은 저녁노을에 반사되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였다. “여러분 적선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으나 소인은 아직 장례를 지낼 비용이 부족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는 서한(西漢)의 태사(太師)인 사마담(司馬談)의 후예입니다. 저의 조상인 사마천(司馬遷)이 조정에서 죄를 지어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은거를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마담의 후예는 기예(氣藝)로 살아온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이름이 사마아(司馬兒)로 불행히도 세 살 때 거리에서 잃어 버렸습니다. 15년 전의 일이죠. 그 후 딸인 지아가 태어났습니다. 그 어미는 반 년 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그만 세상을 떠나 버렸죠. 그런데 제 딸 지아가 몹쓸 병에 걸려 정신이 이상해지니 제 마음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딸을 두고 제가 어찌 죽을 수 있겠습니까?” 천기승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마지의 심성이 제대로 자라면 그녀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마복(司馬福)의 운수는 극도로 불행하다. 하나 화(禍)는 복(福) 속에 숨어 있고 복은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ㆍ맨손으로 땅을 파 어머니를 龍穴에 모시다
    도사 천기승은 생각 끝에 부녀(父女)를 음식점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다. 두 사람은 배가 고픈지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 이윽고 사마복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어떻게든 돈을 모으고자 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죽어도 그 애가 잘살 수 있도록 하려고요. 그러나 딸의 증세가 나아지지 않으니 제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습니다. 도사께서 딸의 병을 고쳐 주시기만 한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습니다. 부디 저의 뜻을 저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가 언제부터 저리 된 것입니까?” “저의 여식은 태어날 때부터 저 모양이었죠. 항상 바보처럼 웃는 모습이 아비의 속을 쓰리게 하였지요. 기예를 열심히 가르쳤지만 여식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중년에 상처하고 아들마저 잃어버린 이제 와서 사마 일족은 대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천기승은 사마복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내 말대로 하시기 바라오. 우선 부인의 뼈를 내가 지정하는 곳으로 옮기시오.” 이리하여 그들은 독녀봉 정상으로 올라갔다. 사마복은 천기승이 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천기승은 부녀를 용맥(龍脈)이 묻혀 있는 장소로 데려갔다. “이곳을 찾았으니 앞으로 당신네 사마족 일족에게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천기승은 봉혈의 위치에 서서 사마복이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자, 이제 부녀가 함께 이 용혈(龍穴)을 파시오. 용혈의 기운이 잘 뻗어 나가게 해야 하오. 빨리 땅을 파야 매장하기 좋은 시각을 맞출 수 있소이다. 때를 넘기면 다시 3년을 기다려야 하오.” 사마복, 사마지 부녀는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토질이 너무 단단해 무척 힘이 들었다. 무릎이 찰 정도까지 구덩이를 파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마지는 아버지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는 손으로 흙을 파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열 손가락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떨어져 손가락이 다 닳아 버릴 것만 같았다. 천기승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는 용맥을 더욱 살찌우는 거라는 걸 도사는 알고 있었다. 극심한 노력 끝에 사마복 부녀는 5자 깊이의 구덩이를 완성하였다. 천기승은 비로소 크게 소리쳤다. “잘했소. 용혈이 완성되었으니 사마씨의 운세가 트이는 것은 시간 문제요. 이제 시간이 없으니 빨리 준비를 하시오. 부인의 뼈에 옷가지랑 의관을 갖춰 매장을 해야 하오.” ㆍ용혈에 묻을 대나무잎 옷
    사마복이 놀라서 답했다. “대사님. 그날 아내를 화장할 때 옷가지와 유물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남아 있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뼈를 감쌀 옷가지가 없으면 용기를 보존할 수가 없는데…. 후손이 용기를 받는 데도 지장이 생기죠. 미처 파악을 못하고 시작을 했으니 우리가 실수를 했나 보오.” 그러자 사마지가 말을 이었다. “어머님은 평소에 대나무잎을 무척 좋아하셔서 저에게 그것으로 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제가 이제 어머님께 대나무잎 옷 한 벌을 지어 드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어머님이 입으시던 옷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어요?” 천기승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여자는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이오. 생시에 대나무 옷을 입은 적이 있다면 그것은 효험을 발휘할 수 있소이다. 그러면 아이야, 어서 대나무잎으로 어머니 옷을 지어 드려라.” 얼마 후 사마지는 대나무잎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좌우로 꼬며 옷을 만들었다. 마침내 사마지는 죽엽으로 된 옷으로 어머니의 뼈를 쌌다. “고인의 외관이 준비되었으니 빨리 용혈로 모시도록 하시오.” 천기승이 말했다. 사마복과 사마지는 급히 삽을 들고 구덩이에 흙을 채웠다. 그녀는 앞으로 나가 어머니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세 번 절을 올렸다. 그 사이에, 사마지가 흘린 피는 용맥과 서로 통하고 있었다. ㆍ晉나라 시조 司馬懿의 등장
    사마 가에서 잃어버린 아들 사마의(司馬懿)는 한 지방관이 데려다 기르고 있었다. 그는 누이동생의 공덕으로 학문에 대성을 거두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조조의 휘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말년에는 제갈공명과의 전투에서 지구전으로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고생하다 사마지가 드린 공덕에 의해 20살 때 운이 트여 그 후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집안의 용맥의 최대의 수혜자는 사마의이다. 후에 오빠를 만난 사마지는 너무나 행복하였다. 그가, 삼국이 멸하고 진나라의 시조가 된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 고조(晉 高祖) 선황제(宣皇帝) 사마의의 혈통과 관련된 정설과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하나의 왕조를 세우게 되는 영웅의 배경엔 그러한 신화가 수반되기 마련인 것으로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사마의의 자는 중달(仲達)로 조조,조비(文帝),조예(明帝) 3대에 걸쳐 봉사하며 제갈공명과 싸워 결국 촉군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우고 이윽고 정권을 쥐었다. 그는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진조(晉祖)를 세우는 데 기초를 만든 삼국시대 주역의 한 사람이다. 일찍이 그는 장로(張魯)를 무찌른 조조에게 유비가 기초를 굳건히 하기 전에 익주(益州)로 쳐들어가기를 진언하였으나 조조는 주저하였다. 그 전에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고 유비를 치자는 사마의의 진언을 받아들인 조조는 손권에게 사자를 보냈다. 전부터 커져 가는 관우(關羽)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손권은 조조의 요청을 받아들여 관우를 공격하였다. 관운장은 손권의 부하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렸고 그 목이 조조에게 보내졌다. 조조는 관운장을 불쌍히 여기고 향목(香木)으로 관우의 신체를 만들어 거기에 그 목을 달아 제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현재 하남성 낙양시 관림(關林)에 관우의 묘가 있다. 이리하여 형주는 손권의 세력권에 들고 유비는 익주만을 유지했다. 건안 25년(220) 정초 조조는 낙양에 갔으나 거기서 병이 들어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낙양에 궁전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곳에 있던 신목(神木)을 베자 피가 흐르고 배나무를 이식시키자 그 뿌리에서도 피가 흘러 조조는 그것을 보고 병상에 누워 죽었다고 한다. 조조는 허난성(河南省)에 매장되었고 후세에 발굴되는 것이 두려워 가짜 무덤을 72곳에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이해 10월 헌제(獻帝)는 조조를 계승한 조비(曹丕)에게 왕위를 넘겼다. 위(魏)의 문제(文帝)이다. 이에 400년에 걸친 한왕조의 명맥은 사라졌다. 연호를 황초(黃初)로 했고 조조에게는 무제(武帝)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 이듬해 유비도 스스로 제(帝)라 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연호를 장무(章武)로 정하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손권은 유비의 공격에 대비하여 위에 사자를 보내니 문제에 의해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위의 황초 2년 221년의 일이다. 그러나 손권은 위의 지배를 벗어나 위의 2대 황제 명제(明帝)의 태화(太和) 3년에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이 병립하여 싸우는 새 시대에 접어들었다. ㆍ사마의 부인의 지혜
    그후 유비는 오를 쳐 크게 이겼으나 결국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오의 젊은 장수 육손(陸遜)에게 패하여 백제성(白帝城)으로 물러가 번민하다 63세에 생애를 마쳤다. 제갈공명은 촉의 건흥(建興) 12년(234) 2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위수의 남쪽에 자리 잡은 사마의와 대립하였다. 결국 공명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가을 오장원(五丈原)의 진영에서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초(景初) 3년(239) 조방(曹芳)이 위의 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8세에 지나지 않아 명제의 유언에 따라 사마의와 대장군 조상(曹爽)이 돌보기로 했다. 전쟁으로 몸을 닦아 온 노장군 사마의와 혈통만이 뛰어난 청년장군 조상은 라이벌이 되었다. 결국 조상이 상위에 앉고 사마의는 물러났다. 가평(嘉平) 원년(元年, 249) 정월,황제 조방은 선제의 무덤에 참배하기 위해 낙양을 떠났다.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상도 함께였다. 병을 가장해 왔던 사마의는 그 틈을 타 궁전에 돌입하여 명제의 황후를 설득하여 조 형제들의 관위를 박탈하였다. 그리고 큰아들 사마사(司馬師)에 명해 궁전과 도시의 요소를 점령하였다. 중달 사마의의 부인은 위나라의 사자들이 자주 찾아와 그의 모습을 살피고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정말로 사마중달이 병들어 죽기 직전에 이른 것처럼 보여 주어 그들이 안심하고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그녀의 지혜와 사랑이 남편을 구해 결국 쿠데타에 성공하게 만든 것이다. 일찍이 조조가 사마의를 불러 살피니, 그가 뒤를 돌아볼 때 고개가 완전히 돌아가 반역의 상이라는 혐의를 둔 바가 있었다. 죽기 전 조조는 세 마리의 말이 하나의 구유에서 먹는 꿈을 꾸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바 있었다. 세 마리의 말은 이른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뜻하니 왕조 찬탈의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평 3년(251) 사마의는 세상을 떠나고 사마사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254년에 조방을 제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듬해 사마사가 죽자 동생 사마소(司馬昭)가 실권을 잡았다. 일단 조모(曹髦)를 제위에 앉혀 놓고 황제가 그를 제거하려 하자 부하를 시켜 죽이니 그가 위조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265년 왕인 사마소가 죽자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즉위하여 연호를 고쳐 태시(泰始) 원년으로 한 진왕조가 탄생하지만 이보다 2년 전 위군의 침략을 받은 촉(蜀)의 황제 유선(劉禪)은 위에 항복하여 촉의 명맥은 사라졌다. 적벽(赤壁)의 싸움 때처럼 손권이 촉과 손잡고 위와 싸웠더라면 오도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실 부흥을 꿈꾸다 죽은 유비,제왕이 되고도 천명(天命)을 저버린 오왕,삼국지의 하늘에 무수히 박힌 찬란한 별들,그들은 지금도 하늘 어디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까. 삼국지의 어느 여성보다도 강한 사마의 누이동생의 염원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 것일까.⊙
    Monthly Chosun ☜        글 : 민희식 前 서울대 교수 / 그림 : 유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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