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13 '특수층 전유물' 같던 초기 삐삐… '신분 사칭범'들마다 허리에 차

浮萍草 2015. 9. 10. 18:00
    ▲  1984년 8월 허리춤에 삐삐를 찬 회사원
    모습.담뱃갑만큼 컸지만 당시엔'휴대에
    아주 간편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1983년 5월 12일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장관이 부처의 국장급 이상 모든 간부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무선호출기(삐삐)를 허리에 차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어린이날'이었던 5일,중공(中共·중국) 여객기가 납치당해 우리 공군 기지에 불시착하는 대형 사건이 터졌으나 간부들 에게 비상 연락이 안 됐다고 감사원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의 이동통신 기기 삐삐가 1982년 말 개통된 후 반년이 되도록 고관들은 잘 쓰지 않고 있었다. 어떤 관리는 "이런 걸 차고 다녀야 하다니,자녀들 보기에 쑥스럽게 됐다"고 말했다. 초기의 삐삐란 공직자, 정보기관원,경찰관,언론인,의사 등 특수 직종 종사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신분 과시용으로 써먹으려다 쇠고랑을 찬 자들도 있었다. 가짜 기자는 신분증도 없이 무선호출기만 보여주며 여성을 농락했고, 청와대 직원 사칭범도 삐삐로 사람들을 속였다. 전화해 달라고 소리 내는 게 기능의 전부인데도 초기엔 한 대 값이 요즘 물가로 약 100만원쯤 됐다. 1983년 초 가입 대수는 단 244대. 1984년 8월까지도 전국 1만3861대밖에 안 됐다(조선일보 1984년 8월 24일자). 올림픽이 열린 1988년 말에야 10만대를 넘어섰고 1997년 1500만대에 이르며 삐삐 시대는 전성기를 맞았다. 번호 표시 기능이 도입되자,숫자를 조합해 의사를 전하는 기발한 '삐삐 약어(略語)'가 속출했다. 외근 사원들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만든 직장 상사의'8282(빨리빨리)'나 연인들끼리 주고받은'1004(당신은 나의 천사)', '101035(열렬히 사모합니다)'정도는 기본. 약속 장소로'출발한다'는 뜻의'2626(이륙이륙)''도착했다'는7676(착륙착륙)'디지털 문자로 쓴'38317'을 거꾸로 놓고 읽으면'사랑한다'는 뜻의 독일어'LIEBE'가 된다는 것 같은 고난도 약어까지 만들어졌다(조선일보 1996년 2월 3일자). 삐삐는 휴대폰처럼 부담 없이 호출하지는 않았다. 상대방을 전화기로 달려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96년 모 대기업 사원들에게 '하루 몇 건 삐삐 호출을 받느냐'고 물었더니'1~3건'이 62% 로 가장 많았다. '안 올 때가 더 많다'도 14%였다(경향신문 1996년 10월 22일자). 90년대 말부터 삐삐 사용자는 격감했지만 무선 호출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31일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에 따르면 무선 호출 서비스에는 아직도 3만1633명이 가입돼 있다. ' 노병(老兵)'처럼, 삐삐는 죽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 가고 있다.
    Premium Chosun ☜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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