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15 양산보 3대의 소쇄원의 비밀

浮萍草 2015. 7. 4. 10:57
    조광조가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추락한 뒤 유배간 곳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영정이다
    1506년 연산군(燕山君)이 종말을 맞습니다. 반정(反正)의 주인공은 중종(中宗) 그는 폐주(廢主)와 차별을 갖기 위해 전국의 인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째인 1515년 알성문과시험이 열렸습니다. 알성(謁聖)문과시험은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관리 등용문인 과거시험은 문관-무관-기술관(잡관) 세 종류로 나뉘었습니다. 무관은 말 그대로 장수가 될 재목을 뽑는 것이고 기술관은 역관(통역)-율관(법률)-의과-음양과(풍수지리 등)로 분류됐습니다. 문과는 가장 어렵고 중시되던 분야였습니다. 문과로 등과(登科)하기 위해서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를 합쳐 생진과라고도 하고 소과라고도 했습니다. 생원과 진사는 수도 한양의 최고학부로 지금의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에 진학해 대과(大科)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대과는 3종류인데 갑-을-병과로 나뉩니다. 갑과가 가장 높은 등급의 관리가 되고 병과가 가장 낮은 등급의 관리가 되는 것이니 오늘날 공무원시험보다 훨씬 어려웠음을 알 수 있지요.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시험 중 정규시험은 식년시(式年試)라 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태종 때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생긴 증광시(增廣試)나 세조 때 별시(別試) 세종 때 국왕이 성균관 으로 행차해 시험을 보는 알성문과가 있었지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 1515년 알성문과 때 문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등용된다면 3년 이내에 정치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떤 방식으로 행하였으며 괄목할만한 결과가 이었겠는가? 내(중종)가 즉위한 지 10년이 지났건만 나라의 기강과 법도가 바로 서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라 보는가?” 이때 중종을 비롯한 시험관들의 눈길을 확 끄는 답안지가 있었습니다. 그 답안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과 사람은 근본이 하나이며 하늘의 이치가 사람들에게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은 천지의 큰 것으로써 만백성을….” 이 수험생은 왕에게 정치의 이념을 유교(儒敎)로 확실히 삼고 그 이념대로 실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가로 지금도 추앙받는 조광조(趙光祖ㆍ1482~1519)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명문가였다 고합니다.
    고조부가 종1품 좌찬성을 지낸 조온 부친(조원강)은 성종 때 종6품 사헌부 감찰을 지냈습니다. 그는 열일곱 되던 해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ㆍ1454~1504)을 찾아가 제자가 됐으며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숙독했다고 합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이 사약마신 곳을 기린 비석이
    서있다.
    이 부분에서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제가 아는 유교 지식은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전국을 돌다 보니 유교에 대한 기초가 부실하니 마치 코끼리 뒷다리 더듬듯 실수를 연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사의 개론을 읽기 시작했지요. 조선시대 유학사는 유교가 전해내려온 고려 말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친 후 이 부분을 언급하려 하는데 여하간 조선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과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金宗直ㆍ431~1492)선생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종직의 학맥(學脈)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사망한 포은 정몽주 (鄭夢周ㆍ1337~1392)와 야은 길재(吉再ㆍ1353~1419)선생이 등장합니다. 야은은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즉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후진들을 양성했으니 그 수제자격인 김종직은 조선 초 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광조는 그 3대째 적통을 이어받았는데 151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중종의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 지지요. 그 해 11월15일 진사 신분이던 조광조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행해진 강경(講經ㆍ경전을 강의하다)에 참가 했는데 이것은 성균관 유생들을 테스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날 조광조가 강(講)한 것은 ‘중용’이었는데 중종의 평가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강경이 있던 날 그는 ‘사림의 영수’로 기록됩니다. 중용에 대한 그의 해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림이란 무슨 뜻일까요? ‘선비들의 무리’라는 뜻 같은데 율곡이 정의한 사림이라는 단어에는 극찬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옛날의 도(道)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儒者)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公論)을 가지는 자!” 이런 사림의 영수로 지목된 조광조는 1515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눈이 아찔할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게 됩니다.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大司憲)이 된 후 그는 추락하고 맙니다. 그는 조금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소인배’로 칭했는데 하필 훈구파의 쌍두마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소인배로 몰리자 그들은“조광조를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기묘사화’입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앞장서 추천제로 관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고 중종반정 때의 공신 가운데 76명의 공적을 없었던 것 즉 삭훈(削勳)하면서 벌어졌다는 게 정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현량과로 28명을 선발했는데 이 가운데 23명이 친(親)조광조파였으니 훈구대신들은 “저 친구들이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 세력을 늘린다”고 의심했을 게 뻔합니다. 거기다 훈구파의 공적은 삭제됐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지요.
    문제는 그 직전까지 조광조 같은 젊은 선비들 편에 섰던 중종이 오히려 밀지(密旨)를 내려 홍경주-남곤-심정 같은 훈구대신들을 부른 뒤 조광조 일파를 칠 계획을 세웠다는 거지요. 쿠데타로 집권한 이가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게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입니다. ‘주+초’를 합치면 ‘조’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뜻인데 이건 대역죄(大逆罪)입니다. 주초위왕은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나뭇잎에 꿀을 바른 뒤 벌레들이 갉아먹게 해 만들었다고 하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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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의 유배지에서 양산보 3대가 터를 잡다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잘 보존돼있다.
    루아침에 몰락한 조광조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당시 관노(官奴)였던 문후종의 집으로 유배를 갑니다. 설명을 들으니 능주에서 그 집은 북쪽으로,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북쪽에 살았다고 하지요. 집은 초가로 세 칸짜리였습니다. 유배온 지 한 달 여만인 1519년 12월20일 조광조는 중종이 내린 사약(賜藥)을 마시고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조광조는 죽기 전 시 한 수를 남깁니다. 훗날 세상은 그것을 절명시(絶命詩)라고 합니다. 숨지기 전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최후 변론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정암 조광조 선생이 귀양살이하다 사약을 받은 능주의 유허다. 조광조는 이 초가집에서 머물렀다.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네 天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네’
    이렇게 조광조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한 것은 한국 정원의 대표격인 소쇄원(瀟灑園)에 얽힌 사연을 쓰기 위함입니다. 소쇄원을 알려면 양(梁)씨 가문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조광조가 유배왔을 때 모두가 그를 피했지만 단 한명은 예외였습니다. 바로 양팽손(梁彭孫ㆍ1488~1545)이었습니다. 조광조보다 한해 늦은 1516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정언-수찬-교리 등의 관직을 지낸 양팽손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낙향의 길을 택했습니다. 고향에 오자마자 그는 조광조의 거처를 찾았지요.
    조광조선생의 유허에 있는 애우당 현판.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자신의 거처에 양팽손이 나타나자 조광조는“어떻게 해서 여길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위로한 뒤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교유하며 조광조를 위한 상소문도 썼습니다. 양팽손의 정성은 이후까지도 계속됐습니다. 조광조의 시신을 염한 후 큰아들 양응기를 시켜 중조산(中條山)에 묻도록 하고 그 이래 작은 띠 집을 지어 문인과 제자들이 제를 올리도록 했지요. 그런데 양팽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광조선생이 근심을 사랑한다는 뜻에서 이 건물에는 애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쇄(瀟灑)라는 호를 쓰는 양산보(梁山甫ㆍ1503~1557)는 열다섯 때 한양으로 올라가 조광조의 제자가 됐습니다. 1년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속세에서 성공하겠다는 뜻을 접고 고향 담양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1678년의 기록이 있습니다.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잘 보존돼있다

    “그때 양산보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에 불과한 때인데 이러한 일(기묘사화)를 당하고 보니 그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서 살아야겠구나! 결심하고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두문불출하여 한가로이 살 것을 결심하였다. 스스로 호도 소쇄옹이라 하였다….” 양산보와 교유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전남 유생들의 간판급이었습니다. 예컨대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규암(圭庵) 송인수(宋麟守),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같은 이들이었지요. 퇴계 이황선생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무엇인가를 놓고 수준 높은 논쟁을 벌였던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ㆍ1527~1572)은 양산보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소쇄옹은 겉으로는 여간 부드러운 것 같으나 내심은 강직한 사람이며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였다.” 훗날 의병장으로 이름 떨친 태헌 고경명(高敬命ㆍ1533~1592)은“어릴 때 소쇄옹을 알았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얼마나 못생겼는가 알게 됐다”고 했고 송강 정철(鄭澈ㆍ1536~ 1593)은“그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사뭇 상쾌했다”고 했습니다.
    소쇄원의 전경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정원의 백미다

    소쇄원을 만드는 일은 양산보 대에서 시작돼 아들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ㆍ1523~1593)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겨우 피했지만 정유재란 때 왜적 침입으로 소실되자 손자인 영주(瀛州) 양천운(梁千運ㆍ1568~1637)이 중건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 양산보는 무슨 돈이 있었기에 소쇄원 건립에 나선 것일까?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관리에 등용되지도 않았으며 낙향했을 때 나이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았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집니다. 비밀은 처가와 외가 쪽에서 풀립니다. 양산보의 장인 김윤제는 15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한 인물로 막강한 재력을 자랑했지요. 얼마나 재산이 많았으면 다리를 황금으로 만들어놓고 버선발로 다녔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릴 정도였습니다. 외가 쪽에는 면앙정 송순(宋純)이 있었습니다. 즉 송순의 할아버지 송복천이 소쇄공 양산보의 아버지 양사원의 장인이었으니 송순과 양산보는 ‘열살 많은 외종형’관계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소쇄원을 지을 때 송순은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기에 지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소쇄원을 입구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두 번째 의문, 소쇄원이 3대에 걸쳐 지어졌다는데 대체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양산보의 친구 김인후가 1528년 소쇄정에 올라 그곳 풍광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으니 이미 1528년 무렵에는 소쇄원이 이미 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1년 전인 1527년에는 양산보의 부인 광산 김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소쇄원은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지요. 이제 1519년 양산보가 낙향해 결혼한 이후부터 1521년 장남 자홍이 태어난 시점부터 1526년으로 범위는 좁혀집니다. 그렇다면 대체 소쇄원은 어떤 곳이기에 3대(代)에 걸쳐 70년간 건설된 것일까요?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전남 담양의 소쇄원은 원래 크기의 9분의 1 정도로 축소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엔 놀라운 사연이 숨어 있지요.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뒤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가끔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산천(山川)에 커다란 쇠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인걸(人傑)이 나올만한 혈맥(穴脈)을 절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사실 양산보 가문은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철천지원수 관계입니다. 먼저 소쇄원은 정유재란 때 파괴됐으며 아들 양자징의 장남 가족 첫째 딸 부부, 둘째 딸의 사위가 왜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또 그의 장남 양천경의 3남1녀 가운데 차남 몽린,3남 몽기, 장녀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때 양천경의 가족을 끌고 간 일본 장수가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입니다. 이 장수가 기억나십니까? 작년에 1700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명량’에서 조진웅이 배역을 맡은, 비겁하고 눈치 보는 일본 장수로 그려진 사람이 바로 와키자카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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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빈치 코드만큼 의미와 상징으로 가득한 소쇄원
    소쇄원 앞 주차장은 원래 소쇄원 공간이었고 황금정이란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국 최고의 민간 정원,즉 원림(園林)인 소쇄원은 일제의 마수(魔手)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지금의 소쇄원 주차장 앞 도로를 ‘신작로’라는 명분으로 뚫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차장은? 바로 황금정(黃金亭)이 있던 소쇄원 터였지요. 황금정 자리는 논으로 변해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황금정의 터가 보입니다. 주차장도 일제가 만든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주차장은 담양군청이 만든 것입니다. 일제가 소쇄원의 맥을 끊었다면 회복시켜야 마땅하건만 아예 소쇄원을 축소한 거지요.
    소쇄원의 입구는 대나무 숲이다. 대나무는 꼿꼿한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소쇄원이 축소된 것을 어떻게 입증할까요. 조선 영조 31년, 즉 1755년에 제작된 소쇄원 목판 도라는 게 있습니다. 소쇄원에 보관된 것을 누군가 훔쳐간 뒤 아직도 종적을 찾지 못하고 있지요. 불행 중 다행으로 목판본 탁본(拓本) 한 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탁본상 소쇄원은 전체 규모가 3만㎡로 지금보다 9배 이상 컸습니다. 정자도 지금 세 채가 남아있는데 원래 10개가 넘었지요. 그렇게 줄어든 소쇄원이 1992년 세계정원박람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는데 개최지가 하필 훼손에 앞장선 일본 오사카였습니다.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숲은 한낮에도 햇빛을 가릴만큼 울창하다.

    여러분을 소쇄원으로 안내해볼까요. 주차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매표소가 나오고 곧바로 양편에 울창한 대숲이 이어집니다. 원래 이 대숲 길은 호젓했는데 관광객을 위한답시고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아 오히려 풍광을 해치고 말았으니 이런 무지가 없습니다.
    소쇄원에 놓인 다리는 원래 홍교였다.그런데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로 변했다.

    대숲이 끝나는 곳에 소쇄원이 펼쳐집니다. 맨 먼저 좌측에 소쇄원으로 가는 다리가 나옵니다. 이것도 원래 홍교,즉 무지개다리였던 것을 누군가 시멘트로 발라놓고 말았습니다. 다리 위에 서서 바라보면 좌측 언덕으로 광풍각(光風閣)이 보입니다. 잠깐 홍교에 대해 더 알아보고 갑니다. 우리가 보는 홍교는 주로 사찰에 많이 있지만 불교적인 유산은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생긴 홍교는 속세(俗世)와 선계(仙界)를 가르는 경계를 뜻합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다리가 시멘트 덩어리가 됐으니 안타깝지요.
    대봉대는 손님, 즉 봉황처럼 귀한 객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뒤에 있는 나무는 오동나무다. 봉황이 오동나무에만 앉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던 길을 재촉하면 대봉대(待鳳臺)가 나옵니다. 뜻을 풀면 봉황을 기다리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봉황은 귀한 손님을 말하지요. 전설 속의 동물인 봉황은 벽오동이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다고 하는데 대봉대 뒤에 벽오동 한 그루가 심어져 있습니다. 대봉대에서 몇 걸음을 옮기면 오방색 담장에 애양단(愛陽壇)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애양이란 말은 ‘효경’에 나오며 효(孝)를 의미합니다. 효를 상징하는 나무는 동백인데 과연 애양단이란 글자 근처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꼿꼿이 서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소쇄원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오곡문. 밑이 터져있어 계곡물이 들어올 수 있다.

    애양단이란 글자를 끼고 왼쪽으로 돌면 오방색 담장이 계속 이어지는데 오곡문(五曲門)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지요. 오곡은 담장 밑으로 물이 다섯 번 굽이친다는 뜻인데 묘하게도 오곡문의 담장은 산에서 흐르는 개울을 막지 않고 아래쪽이 뚫려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식 정원의 백미지요. 오곡문 담장 바로 뒤에는 작은 우물 같은 게 있는데 이것은 이슬을 받아 마시는 곳입니다. 살펴보면 주변에 대나무가 있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면 왼쪽 계곡에 광풍각이 보인다. 우리나라 정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오곡문과 개울 사이로 외나무다리가 있는데 바로 옆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살구나무는 무병장수를 의미하니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警告)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왼쪽, 즉 아래쪽으로 광풍각(光風閣), 오른쪽 즉 약간 비탈진 위쪽으로 제월당(霽月堂)이 나옵니다.
    광풍각은 정확히 한평쯤된다. 이 정도 규모가 공부할 때 가장 집중력이 생긴다고 한다.

    광풍각은 한 평 공간으로 소쇄원의 백미입니다. 광풍각 앞으로 물결이 굽이쳐 내려옵니다. 그 물결은 봉황(鳳凰) 같은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저녁이 돼 주변이 조용해지면 광풍각에 머문 이는 마치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를 주유하는듯한 착각에 빠지지요.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을 겁니다.
    제월당은 거주 공간이다. 맞배지붕이 하늘로 날아갈듯 날렵하다.

    광풍각이 책을 읽는 연구 공간이라면 제월당은 이곳의 주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입니다. 광풍과 제월은 그냥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누군가 성리학자 주돈이를 가리켜 지은 시에서 나온 것인데 원문은 이렇습니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소쇄처사 양공지려라고 씌여져있다. 아마 이렇게 멋진 문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인품이 심히 고명하여 마음결의 깨끗함이 맑은 날의 바람(광풍)과 비 갠 날의 달(제월)과 같다.” 광풍각- 제월당쪽으로 가면 글씨가 보입니다.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양씨가 사는 집이라는 문패인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문패지요. 광풍각 주변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어놓았습니다. 공부하는 곳에 잡기(雜氣)가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입니다.
    광풍각 뒤로 작은 문이 나있다.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어진 것은
    선비의 예절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뒤편으로 석류나무꽃이 피어
    있다.

    그런가 하면 광풍각에서 제월당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문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이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도록 일부러 만든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부하는 선비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예(禮)를 지키라는 묵언의 경고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뜯어볼수록 소쇄원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고와 의미와 상징들이 들어 있으니 소설가 댄 브라운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곡문 옆에는 동백이 심어져있다. 소쇄원의 모든 배치는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감탄하는 소쇄원은 조광조라는 500년 전의 개혁정치가의 좌절이 낳은 부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광조가 전라도 땅에 남긴 것은 화려한 원림(園林)과 정자뿐일까요? 소쇄원 전문가 이동호씨는 그런 단정을 부인합니다.
    소쇄원의 계류를 따라 꽃잎이 흘러가고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많은 학자 선비들이 낙향(落鄕)하여 광주-장성-창평-화순-나주 등 요소요소에 정자류를 건립하고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 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요 경세가인 정암 조광조의 유배 및 사약에 의한 죽음은 국가적-개인적으론 큰 불행이었으나 정암 조광조의 법통을 호남-창평이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씨는“정암 선생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순수함은 백설(白雪) 그 자체였고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은 치열함의 극치였다”고 했습니다. 제가 “경상도는 서원이 많고 전라도는 정자가 많은 게 예향(藝鄕)이기 때문이냐”고 묻자 표정이 호랑이처럼 바뀌지요. “누가 그런 무식한 소리를…. 그렇다면 경상도는 공부하고 전라도는 노는 곳이란 뜻인데,앞으로 그런 말 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예향은 예향(藝鄕)이 아니라 예향(禮鄕)이라는 뜻입니다. 무식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의 일갈과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문득 조광조 선생이 삶을 마친 능주의 유허(遺墟)가 떠올랐습니다. 별로 찾는 이도 없는 유허에는 칠십대로 보이는 노신사가 안내를 해줬는데 알고 보니 광주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정년퇴직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조광조 선생에게 관심을 보이자 “잠깐 기다리라”더니 공책 같은 것을 들고 왔습니다. 본인이 조광조를 비롯한 화순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을 정리해놓은 책자로, 요긴한 정보가 됐습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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