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20] 수출에 눈뜬 1960년대

浮萍草 2015. 7. 24. 10:01
    '수출만이 살길'이었던 時代… 가발 공장사장이 소득세 1위
    -年평균 39%씩 수출 증가 저렴한 노동력을 무기로 합판·직물 등 경공업 집중 가발, 美서 날개 돋친듯 팔려… 의류 수출액도 3년새 2배로
    ㆍ중화학 공업화 서두른 정부… 1970년대 대형 유조선 팔아
    ▲  주익종 대한민국역사
    박물관 학예연구사
    1965년 초여름 박충훈 상공 장관이 상공인들과 면담을 가졌다. 당시 박 장관은 1주일에 하루는 상공인들과 면담하는 날로 정하고 상공회의소로 나가고 있었다. 이날 첫 번째 면회자는 서울통상의 최준규 사장이었다. 최 사장은 염색한 머리카락 한 다발부터 내보였다. ' 검은 머리카락을 탈색해서 순백색으로 만든 뒤 각종 색상으로 염색을 해서 수출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이전까지 한국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다. 저렴한 인건비를 이용해서 가발을 만들면 수출을 늘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해 중국산 인모(人毛)로 만든 홍콩·일본의 가발에 대해 미국이 일시 수입금지 조치를 취했다. 그 바람에 한국 가발은 미국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64년 13만달러에 불과했던 가발 수출액은 1965년 162만달러, 1966년 1068만달러를 거쳐 1970년에는 9357만달러로 뛰어올랐다. 당시 최대 가발 생산업자였던 최 사장은 1971년 종합소득세 1위에 올랐다. 1964년 661만달러에 머물렀던 의류 수출액도 1967년 1억1223만달러에서 1970년 2억1357만달러로 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크고 작은 수출 기업들이 나타나 세계 시장에 한국 제품을 쏟아냈다. 박정희 집권기인 1961~1979년의 19년간 수출은 명목액 기준으로 367배로 늘었다. 연평균 39%씩 증가한 것이다. 1979~2000년에도 연평균 12% 늘었다. 의류수출이 늘자 원단을 공급하는 섬유공업이 더불어 성장했고 다시 화학섬유 원료를 공급하는 석유화학공업이 발전했다. 수출 증가에 따라 관련 공업도 함께 성장한 것이다. 이처럼 수출이 공업화를 이끄는 현상을 '수출 주도 공업화'라고 한다.
    ▲  1960년대 후반 가발 공장의 작업 모습. 당시 손재주가 뛰어난 한국 여성들이 생산한 가발은 수출시장에서 큰 몫을 담당했다. /조선일보 DB

    애당초 박정희 군사정부가 1962년 1월 내놓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는'수출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한다'는 구상은 없었다. 국내 자본과 외자(外資)를 동원해 제철·비료·기계 같은 투자 사업을 추진하는 정도였다. 당시 유행했던 후진국 경제개발론의 처방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국내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실시한 그해 6월의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났다. 대외 신인도도 형편없었고 마땅한 외화(外貨) 수입원도 없었기에 외자 도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목표 성장률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1963~1964년의 경제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1962년부터 합판·직물·철판을 중심으로 공산품 수출이 조금씩 증가세를 보였다. 경제계는 여기에 희망을 걸었다. 1961년 발족한 기업가 단체인 한국경제인협회(현재 전경련)는 1963년 3월 선진국에서 쇠퇴하고 있는 사양(斜陽) 산업을 유치하자는 취지로 수출산업촉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일본에는 보세가공조사단을 파견해서 유망한 수출 공업을 물색했다. 정부도 수출에 주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월 연두교서에서 공산품을 중심으로 한 수출의 증대가 '혁명정부하의 특기할 만한 발전'이라고 언급했다. 그해 5월 정부는 환율을 2배로 인상했다. 이는 미국의 시장 자유화 요구에 따른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수출에 크게 도움이 됐다. 그해 11월 30일 수출이 처음으로 1억달러를 돌파하자 정부는 이날을'수출의 날'로 지정했다. 박 대통령은 1965년 1월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증산(增産)·수출·건설을 국정의 3대 목표로 밝혔다. ' 수출만이 살길이다'는 캐치프레이즈도 이즈음 탄생했다.
    이처럼 한국의 수출 주도 공업화는 민간이 제창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극적으로 성사된 모델이었다. 출발부터 '민관(民官) 협력'이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막다른 길'에 내몰리고 있었던 한국이 새롭게 찾아낸 개발 전략이기도 했다. 당시 세계 경제 흐름에 딱 들어맞았기에 결과적으로 한국은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 세계 GDP는 연평균 3.9%씩 성장했다. 1820년부터 1950년까지 130년간 세계 연평균 성장률이 1.6%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유례없는 성장이었다. 특히 1950~ 1973년은 '전후(戰後)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연평균 성장률은 4.9%나 되었다. 국제 무역은 세계 GDP보다 세 배 빨리 증가했다. 국가 간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세계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소득과 임금이 높아지자 의류·신발·완구 등 단순한 노동 집약형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운 여건이 됐다. 저렴한 노동력을 보유한 후진국이 노동 집약형 제품을 만들어 선진국 시장에 수출할 기회가 생겼다. 한국과 대만 등이 이 기회를 잡았다. 현재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은 당시 문화대혁명의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 있었다. 멕시코·브라질 같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외국에서 수입하던 상품을 국내에서 만들어 생산하는'수입 대체 공업화'모델에 치중했다.
    수출에 눈을 뜬 한국과 대만은 한 학급에서 다른 학생들은 다 놀고 있는데도 혼자서 공부하는 학생과 같았다. 1960년대 섬유 의류·합판·가발 같은 수출 품목은 미숙련 노동력이 넘쳤던 당시의 사회 여건과도 맞았다. 섬유 봉제와 가발 같은 업종은 저임금의 어린 여공을 대거 노동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근로조건은 열악하기만 했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봉제업체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22세의 청년 전태일이 분신(焚身) 항의했다. 하지만 공업화와 함께 실질 임금은 빠르게 올랐다. 제조업 실질 임금은 1967년부터 연평균 10% 넘게 상승했다. 열악한 근로조건의 청계천 피복공장은 재단사와 봉제공장의 '시다'(보조원)가 '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사다리의 첫 계단이자,한국이 갓 오르기 시작한 경제발전 사다리의 첫 계단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 공업화를 서둘렀다. 중화학 공업화와 더불어 한국은 이 사다리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1960년대 말까지 고작 2000~ 3000t급 선박 건조에 머물렀던 조선업은 1974년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 '포니'를 개발 출시한 현대자동차는 1980년대 초반 포니·엑셀의 양산 투자를 감행했고 그 뒤 미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한국의 수출 주도 공업화는 정부의 선도(先導)와 기업인들의 모험 정신,근로자와 중간 관리자들의 뛰어난 학습능력이 한데 모여 빚어낸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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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기적' 뒤엔 매일 16시간 흘린 우리의 땀·눈물이…"
    焚身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의원 인터뷰 "각성제 먹으며 졸음 참아… 석달 밀린 임금 달라고 사흘 파업하자 끌려가"
    ▲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의원.
    박상훈 기자
    1970년 11월 12일 야간중학교에 다니던 16세 소녀 전순옥은 오빠 전태일(1948~1970)에게 밀린 월사금 투정을 했다. 오빠는 "며칠만 기다려라"고 했다. 그게 오누이의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 날 전태일은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22일 만난 전순옥(61)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말했다. "오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돈 이야기였다고 생각하니 씻을 수 없는 미안함으로 남았죠. 분명 '빚진 마음'이 있어요." 그 뒤 그녀도 부평 의류공장에 들어갔다. 졸음을 막기 위해 '타이밍(각성제)'을 먹으면서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1주일까지는 괜찮은데 2주째가 되면 버틸 수가 없어요.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걸어가면 발이 붕 뜨는 느낌이었어요." 석 달간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사흘간 파업 농성을 벌였다가 경찰서 신세를 졌던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 의원은"가난한 사람에게 세상의 벽은 높고 두껍기만 했다. 우리는 컴컴한 그 벽 뒤에서 빛도 없이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여공(女工) 전순옥은 1989년 뒤늦게 영국 유학을 떠났다. 12년 공부 끝에 워릭대에서 받은 박사학위의 주제는'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와 민주노조 운동을 위한 그들의 투쟁'두 차례의 현장조사와,79차례의 개인 인터뷰,네 번의 집단 토론을 바탕으로 쓴 이 논문에 그는'그들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오빠 전태일의 마지막 외침에 대한 학문적 답변이었던 셈이다.
    전 의원은 "세계가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과 '한강의 기적'에 주목하고 성공 사례로 삼고 있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서는 하루 16시간씩 일했던 노동자의 땀과 눈물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  1970년 11월 13일 분신 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아들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2001년 귀국 이후에도 그는 여성노동자를 위한 어린이방과 봉제기술 교육센터 운영 등 한동안 현장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비정규직과 외국인 이주 노동자 보호책,소상공인 지원 대책 등이 현재 그가 고민 중인 현안이다. 전 의원은"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고 상시적 불안감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비정규직 근로자는 1970년대 봉제공장의 '시다'(보조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일지도 모른다"면서"사회적 약자(弱者)의 아픔을 내 것처럼 여기는 사회를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Premium Chosun ☜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 의원.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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