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19] 통일벼와 자급자족

浮萍草 2015. 7. 10. 09:21
    "쌀밥 원없이 먹는게 소원"… 굶주린 대한민국 구한 '奇跡의 통일벼'
    育種전문가 허문회 서울대교수, 1964년부터 필리핀서 품종 실험 그중 667번째 계통 볍씨가 당시 농가의 2배 가까운 수확량 정부에선 상금 내걸고 재배 장려 반신반의 농민들, 생산량 에 놀라… 6년만에 쌀 자급 100% 달성
    이완주 전 농촌진흥청 연구원·2008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수상
    6·25전쟁 직후 한국을 덮친 건 굶주림이었다. 평생 소원을 말하라면 다들"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고 죽어봤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쌀을 아끼느라 보리쌀과 밀쌀을 섞어 먹었다. 그래도 허기를 면할 길이 없으면 물을 들이켜고 허리끈을 있는 대로 졸라맸다. 밀로는 국수와 수제비를 떠서 끼니를 보탰다. 1957년에는 비가 평년의 절반밖에 오지 않았다. 제때 모내기를 한 논은 70%에 불과했다. 1959년에도 비는 평년의 3분의 2에 그쳤다. 쌀 생산량은 평년작의 78%,보리는 70%에 그쳤다. 그해 9월 태풍 사라가 영남 지역을 휩쓸었다. 1963년에는 보리가 이삭이 팬 후 여무는 4~5월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수확량이 평년작의 70%에 그쳤다. 그해 한국의 연간 총 수출액은 8600만달러였는데 곡식을 사는 데만 1억700만달러를 썼다. 보릿고개를 넘겨주던 보리마저 흉년을 맞자 1964년의 봄은 농촌과 도시 할 것 없이 모두 견디기 어려워졌다. 나물을 뜯어서 멀건 보리죽을 쑤거나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였다. 숟가락 수를 줄이려고 딸아이를 도시에 식모살이로 내보냈다. 자식들과 소식마저 끊기면 영영 고아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기아(飢餓)'가 또 다른 '기아(棄兒)'로 이어지는 형국이었다.
    벼 품종 개량은 기아선상에서 국민들을 구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벼는 한·일(韓日) 등 동북아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Japonica)형과 태국·베트남 등 열대지방에서 재배하는 인디카(Indica)형으로 나뉜다. 자포니카형은 쌀 모양이 둥글고 찰기가 있지만 안남미(安南米)라고 불리는 인디카형은 가늘고 길며 찰기가 부족하고 푸석푸석했다. 밥맛으로만 보면 굳이 품종을 개량할 이유가 없었다.
    통일벼 보급을 위해 겨울철 필리핀에서 증식한 볍씨를 항공 수송하는 장면(사진 왼쪽). 오른쪽 사진은 1966년 박정희(가운데) 대통령이 식량 자급을 독려하기
    위해 모내기를 하는 모습. /농촌진흥청 제공

    하지만 당시 재배되던 자포니카 품종들은 키가 대부분 80㎝가 넘고 큰 것은 1m도 넘었다. 키가 크니 이삭이 조금만 무거워도 가을 비바람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 벼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도열병에도 약했다. 이 때문에 인디카형에서 도열병에 견디는 성질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 하지만 서로 수정이 이뤄지지 않는 데다,어쩌다 씨가 생겨도 밥맛이 떨어지는 단점이 따라왔기 때문에 품종으로 출시된 사례는 없었다. 벼 육종(育種) 전문가인 허문회 서울대 교수는 1964년부터 2년간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벼 품종 실험을 거듭했다. 냉해와 병에 강한 유카라 품종을 대만 재래 1호벼와 교배한 뒤,그 품종을 다시 열대지방의 '기적의 벼' 품종으로 알려진 IR 8호벼와 교배하는 삼원교잡(三元交雜)을 시도했다. 키가 작아서 쓰러지지 않고 이삭은 커서 수량이 많고, 도열병에도 강한'수퍼 벼'를 만든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이 경우에 호랑이와 사자를 교배시킨'라이거',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나온 노새처럼 2세가 생기지 않는 치명적 단점이 문제로 꼽혔다. 벼 품종을 교잡할 때도 불임성(不妊性)이 문제가 됐지만, 삼원교잡을 통해 새로운 형질을 지닌 종자가 탄생했다. 1967년 새로운 1350종(種)을 필리핀에서 수원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으로 공수(空輸)했다. 이 가운데 'IRRI에서 교배한 667번째 계통의 볍씨'를 의미하는 IR667은 장화를 신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푹푹 빠져 들어가는 수렁논에서 재배됐다. 여름 내내 수렁논을 들락거리며 IR667에서 15종을 선발했다. 이 중 하나가 1969년 다시 농장 귀퉁이 원두막 옆의 자투리 논에서 재배됐다.
    오뉴월 내내 잎은 노랗다 못해 갈색을 띠었고 줄기마저 제대로 서지 않고 바닥에 모두 깔려 있었다. 하지만 7월 여름 날씨가 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리비리하던 벼 포기들은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고 이파리들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8월 하순 예비 수량 조사를 하니 10a당 생산량은 624㎏이나 되었다. 당시 농가 평균 수량이 350㎏에 불과하던 때였다. 그해 가을 수확한 예비 품종의 볍씨 12㎏을 연간 벼 삼모작이 가능한 필리핀으로 보냈다. 935㎏까지 늘어난 새 품종의 볍씨들이 부산항으로 돌아온 건 1970년 3월이었다. 이듬해 IR667은 '기적의 볍씨'라는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전국 시·군에서 시범재배를 위해 보급됐다. 하지만 잎이 붉게 마르는 '적고(赤枯) 현상'이 왔고 화가 난 농민들은 현지 조사를 위해 방문한 지도 공무원들에게 시퍼런 낫을 든 채 달려와 불만과 분노를 터뜨렸다. 살벌한 분위기 탓에 공무원들은 조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1972년에는 새 품종의 경작 목표를 30만㏊로 잡았지만 18만㏊에 모를 내는 데 그쳤다. 정부는 쌀 증산을 유도하기 위해 10a 당 600㎏ 이상을 생산하는 농가에는 '다수확 상금'으로 10만원씩을 주기로 했다. 농림부 담당 과장의 월급이 6만1200원이던 시절이었다. 정부가 사전(事前) 확보한 예산은 2800만원이 전부였다. 280명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계 결과 목표치인 600㎏을 달성한 농가가 3768호에 이르렀다. 1973년 최고 기록은 충남 서천의 조권구씨가 세운 780㎏이었다. 시상 제도는 1976년까지 계속됐지만 다수확 농가가 속출하자 총 상금 7억여원을 끝으로 폐지하고 전국 최고 다수확 상만 남았다. 1972년 가을 쌀 생산량은 처음으로 3000만석을 돌파했다. 광복 전에는 남북한을 합해도 2500만석을 넘지 못했던 벼 생산량이다. ' 기적의 볍씨' IR667은 '통일벼'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통일벼 재배 면적이 늘어나자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은 주곡 자급 달성 기념 휘호를 썼다. 1980년대 냉해와 병에 더욱 강한 '일품벼' 같은 고급 자포니카 품종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통일벼는 10여년간 한국판 '녹색혁명'을 이끌었다.
    Chosun ☜       이완주 전 농촌진흥청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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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락에 잡곡 안 섞으면 야단맞던 시절… 혼분식 장려, 한국인 입맛까지 바꿔"
    정혜경 호서대 교수 - 경제 성장기에 식단 서구화 영양실조 시달리던 한국인들, 이젠 심장병·당뇨·비만 걱정
    장련성 객원기자
    1962년 흉년으로 쌀 650만석이 모자라게 되자,박정희 정부는 대대적인'미곡(米穀) 소비 절약' 운동에 들어갔다. 쌀소주와 쌀과자,쌀떡 제조가 금지됐고,설렁탕 등 국밥에는 3할 이상 국수를 섞어야 했다. 1969년부터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일명'무미일(無米日)'로 정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팔 수 없었다. 이처럼 관(官) 주도의 혼분식(混粉飾) 장려 운동은 반(半)강제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1970년대 중·고교를 다녔던 식품영양학자 정혜경(58·사진) 호서대 교수도 당시 혼분식 장려 운동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도시락에 싸오는 밥의 30% 이상은 무조건 잡곡이어야 했다. 이 때문에 도시락을 쌀 때마다 밑바닥에 쌀밥을 깔고 맨 위에만 보리밥을 살짝 까는'편법'이 속출했다. 그마저 선생님이 숟가락으로 도시락을 뒤집어 검사하면 소용이 없었다. "보리밥을 섞어야 한다는 규제가 꽤나 엄격했죠. 먹을 게 부족하니 결국 정부가 밥상머리까지 참견하고 나선 거예요." 1960~1970년대의 혼분식 장려 운동은 한국인의 입맛을 바꿔놓았다. 빵과 면류(麵類)의 소비가 급증하면서 식생활이 급속도로 서구화한 것이다.
    정 교수는"'서양식 식단은 세련되고 우수한 반면,전통 식단은 촌스럽고 뒤떨어졌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도 이즈음"이라며"이러한 식습관의 변화는 지난 시대의 압축 적인 경제성장과도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영양실조와 저체중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어느새 심혈관계 질환과 당뇨,비만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정 교수는"서양식 식단이 우월하다는 건 영양학적으로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라고 했다. 한국인의 식단은 서구화했지만,반대로 서구에서 한식(韓食)은 '대안 음식'으로 조명받고 있다. 올해 밀라노 엑스포(EXPO)에 자문위원으로 참가했던 정 교수는"나물과 김치,된장·고추장 위주의 전통 한식은 저칼로리 음식인 데다 대장암 등 소화기 관련 질환을 막아주는 유산균과 섬유소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건강 친화적인 식단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Chosun ☜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danp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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