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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후진국형 질병'과 싸운 1950~1960년대

浮萍草 2015. 6. 19. 08:00
    광복후 한국은 '결핵 공화국'… 9세 少女 몸엔 1063마리 기생충도
    1954년 결핵 중환자 50만명, 매일 평균 300명씩 숨져 1965년 81%가 기생충 감염… 채소밭 인분 비료가 주원인 쥐가 옮기는 전염병도 극성… 학교선 '쥐꼬리' 잡는 숙제도<
    김상태 서울대병원 의학
    역사문화원 교수
    1950~60년대에 '대한민국 국민병'은 결핵이었다. 결핵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영양 상태와 주거 환경이 나쁜 빈민,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는 청소년이 주로 걸렸다. 또 생활이 불규칙한 작가와 대중 음악가 등 창작에 종사하는 젊은이나 젊은 여성이 잘 걸려 '천재와 미인의 병'으로도 불렸다. 광복 후 교통수단 발달, 도시화로 인한 인구 밀집, 공기 오염 등으로 결핵균은 더 빨리 퍼졌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전국에서 결핵 중환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결핵으로 하루 평균 300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965년 대한결핵협회는 서울시민의 6.2%,서울시내 초등학교 아동의 45.2%가 결핵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보건소를 중심으로 결핵 퇴치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전국에 결핵 전문병원이나 요양소는 몇 곳밖에 없었다. 1962년경 전국에 입원해야 할 결핵환자가 50만 명으로 추산됐는데, 병상은 3000개에 불과했다. 그래서 당시 한 신문은 대한민국을"폐결핵에 무관심한 왕국"이라면서"한 해에 읍 하나가 망해도 먼 산의 불 보듯" 한다고 정부 당국의 무관심과 무대책을 비판했다.
    ㆍ아홉 살 몸에서 나온 기생충 1063마리
    1963년 10월 24일, 전북 완주군의 한 농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홉 살 난 딸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보채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찾으며 우는 딸을 안고 부모는 전주예수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소녀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장이 배배 꼬여 있었다. 수술 결과 장에서 나온 회충만 1063마리였다. 무게로 5㎏나 됐다. 이 소녀는 끝내 숨졌다.
    1950~70년대의 한국은 '기생충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국민 대다수가 기생충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5년 대한기생충박멸학회와 외국 민간원조기관(KAVA)이 공동으로 전국에서 2만여 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했는데, 국민 81.5%가 회충·십이지장충 등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기생충 때문에 해마다 평균 2000명이 숨졌다. 내과 질환의 40%는 기생충으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기생충이 많았던 이유는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서였다. 특히 성장 과정에 있는 어린아이의 감염이 심각했다. 보건 위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채소밭에 주는 인분 비료가'기생충 왕국'을 만들었다. 맨발로 밭에 들어가 일하는 농부와 밭둑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십이지장충의 표적이었다. 폐디스토마와 간디스토마에 감염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62년 가재와 게를 날로 먹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폐디스토마에 감염된 국민은 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민물고기를 날로 먹은 사람들은 간디스토마에 감염됐다. 정부는 보건소를 중심으로 기생충 예방을 위한 무료 상담과 검사를 벌였다. 일선 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씩 채변 봉투를 나눠주고, 기생충 검사를 했다.
    ㆍ연탄가스 때문에 죽어간 신생아와 신혼부부
    1959년 열세 살 소녀가 시골에서 상경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생전 보지 못했던 19공탄에 불을 피웠는데,그 불꽃이 신기해서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가스에 중독돼 숨졌다. 1961년엔 서울 제기동에서 일가족 6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5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듬해엔 서울 영등포의 한 산부인과 병원 산실(産室)에서도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갓 태어난 신생아가 세 살 난 누나와 함께 숨졌다. 1950~60년대에 연탄가스는 문틈으로, 방바닥 틈으로 스며들어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나라에 연탄이 널리 보급된 것은 6·25 전쟁, 특히 9·28 서울 수복 직후부터였다. 정부의 강력한 산림녹화 정책으로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탄은 화력이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연탄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반 가정의 주된 에너지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연탄이 불붙을 때 내뿜는 일산화탄소가 문제였다. 일산화탄소가 공기 중에 0.5%만 포함되어 있어도 그 공기를 마신 사람은 5~10분 만에 사망할 수 있었다. 냄새, 맛, 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려워서 더욱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사람만 한 해 1000명이 넘었다.
    1950년대 후반 보건소 차량이 농촌을 순회하면서 결핵 검진을 하는 모습. 당시 결핵 환자는 50만명에 육박했지만 병상은 3000여개에 불과했다. /조선일보 DB

    기생충 예방(사진 왼쪽)과 쥐 잡기 운동 포스터

    의료계에서는 응급처치법과 치료 대책을 마련하고자 애썼다. 공군에서는 연탄가스 경보장치를 개발했고,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은 국내 최초로 고압산소기를 제작했다. 동치미 국물이 응급 효과가 있다는 소식에 동치미가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ㆍ쥐꼬리 잘라오는 숙제 내주기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대부분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쥐들이 천장과 마당, 하수구, 변소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1960년대 보건사회부는 남한에 있는 쥐의 숫자가 5000만 마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쥐가 옮기는 전염병이 더욱 큰 문제였다. 쥐는 발진열·흑사병·살모증·선모충병 등을 옮겼다. 1950~70년대에는 정부 주관으로 쥐 잡기 운동이 벌어졌다. ' 쥐 잡는 날'을 정해 집집이 쥐약을 나눠줬다. 한날한시에 일제히 쥐약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예정된 시간에 사이렌이 울렸다. 학교에선 쥐의 꼬리를 잘라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결핵,기생충,연탄가스 중독,쥐 잡기 운동까지 1950~60년대는'후진국형 질병의 전성시대'였다. 21세기 들어서 이 후진국형 질병들은 암과 심혈관 질환에 자리를 내줬다. 한국의 발전상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질병과 보건 위생의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Premium Chosun ☜       김상태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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