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13 유이주와 구례 운조루

浮萍草 2015. 6. 23. 17:20
    운조루 앞에서 보면 섬진강 쪽으로 오봉산이 보인다. 우리 1만원권 지폐에 나오는 산이 오봉산을 그린 것이라고 하나 근거는 없다.
    남 구례 지리산 자락에 천하 명당(明堂)이 있습니다. 지리산 형제봉이 주산(主山)으로 버티고 서 있으며 그 앞의 병풍산이 북풍(北風)을 막아줍니다. 옆으로는 촛대봉이 촛불처럼 집을 밝히고 정남향 맞은편 오봉산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안산(案山)인 오봉산(五峯山)은 1만원권에 등장하는 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운조루 앞길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했던 길이다. 조정에서 핍박받던 장군을 구례 사람들은 후히 대접했다고한다.

    오봉산이 있는 마을 이름이 용정(龍井)마을입니다. 샘이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요. 생김새는 닮은듯한데 마을이장은 “그럴리가…”하며 껄껄대더군요. 그런가 하면 오봉산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라 하겠습니다. 특이하게도 섬진강은 이 부분에서만 역류하지요. 서울에서는 동부이촌동이 한강이 역류하는 지점인데 이것은 돈이 밀려온다는 지세라고 합니다. 지금 이곳의 행정명이 오미동(五美洞)입니다.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는 뜻이지요. 오죽했으면 일본강점기 풍수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쓴 ‘한국의 풍수’라는 책에도 등장할 정도니 구례(求禮)는 과연 ‘예를 찾는 고향’이라고 하겠습니다. 풍수지리가들은 이곳에 명당 셋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선녀가 놀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金龜沒泥), 다섯 보석이 모인 형상인 오보교취(五寶交聚)를 찾아 사람들이 몰리며 마을을 이뤘습니다. 그중 한 명당에 우리나라의 3대 개인 가옥이라는 운조루(雲鳥樓)가 있습니다. 구름 운, 새 조자를 쓰는 이곳을 금환낙지 터라고 하는데 운조루 주인은 금구몰니 터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집 지을 때 돌거북이 출토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 초상화가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 유의주대감이다.

    1776년, 즉 조선 영조 52년 누군가 이 터에 집을 지었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내던 유이주(柳爾胄)였습니다. 총 78칸의 저택이 완성되자 유이주는 ‘운조루(雲鳥樓)’라는 현판을 겁니다. ‘구름 속에 숨은 새’처럼 낙향해 살겠다는 선비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이주는 어떤 분이었을까.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스물여덟살에 무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가 1771년 낙안군수가 됐지만 조세를 운반하던 배를 파손시킨 혐의로 귀양을 갔습니다. 삼수갑산에 나오는 그 삼수로 험하기 짝없는 함경도 땅이었지요. 그런데 영조가 죽고 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사면이 돼 유이주는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팔자가 바뀐 그때부터 이곳이 명당이란 찬사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싶습니다. 그는 1797년 세상을 떠났는데 이력을 보면 성곽의 건축을 많이 한 것이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1767년에는 영조의 명을 받아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종사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는 함흥성을 쌓았는데 그때의 경험이 99칸이나 되는 운조루를 설계한 바탕이 됐을 겁니다. 운조루 공사는 조카인 유덕호가 삼촌의 설계를 받아 직접 했다고 합니다. 운조라는 글자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원문은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 즉‘구름은 무심하게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는 날다 지쳐 둥지로 돌아온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집이 유명해진 것은 한옥의 멋있는 자태나 도연명의 시구에서 따온 당호(堂號) 때문이 아니라 조선 선비 집의 전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 사례로 꼽히기 때문입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네자에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

    한국전쟁때 인민군이 집을 불태우려하자 마을 주민들이 앞장서서 지킨 이유
    밥을 굶는 이웃들을 위해 쌀을 채워놓고 아래에는 '타인능해', 즉 아무나 이것을 열어 쌀을 가져갈 수 있다고 써놓았다(사진 왼쪽). 오른쪽은 뒤주다.
    ‘타인능해’라는 글자는 원통형 뒤주 아랫부분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타인능해라고 쓰여진 사각형 나무토막을 빼내면 자그마한 구멍이 보입니다. 바로 뒤주에 저장된 쌀이 빠져나오는 구명입니다. 뒤주의 용량은 쌀 세 가마니 분량이라고 합니다. 원통형 뒤주 뒤에는 더 큰 사각형 뒤주가 있습니다. 여기 평상시 쌀을 재워놨다가 뒤주가 빌 때면 채워넣는, 일종의 저수지 역할이지요. 중요한 것은 유이주가 뒤주를 놓아둔 위치입니다. 뒤주는 정문에서 볼 때 잘 안 보이는 오른편 헛간 안에 있습니다. 헛간은 운조루, 즉 정문에서 볼 때 왼편에 있는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먹을 게 없어 쌀을 구걸하려 왔지만 얼마나 주인 눈치가 보이겠습니까? 주인과 마주치기 제일 곤란해하는 불편한 마음을 헤아리는 주인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운조루의 부엌은 아직도 옛날과 똑같다. 아궁이에 무쇠솥을 앉혀놓았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평시 이백여석의 쌀을 생산했는데 그 가운데 연간 30여 가마니가 양식이 없어 고생하는 이웃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뒤주를 처음 봤을 때 “이웃들이 왜 다 가져가지 않고 30가마니만 가져갔을까”하고 궁금해했습니다. 이웃들은 궁해도 운조루의 타인능해,즉 아무나 이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나무토막을 가능하면 이용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먹을 만큼만 가져가고 양보하고 일해 어려움을 헤쳐간다는 다짐을 타인능해를 보면서 했다는 겁니다. 운조루의 굴뚝은 야트막합니다. 높이가 채 1m가 되지 않는데 그렇게 만든 것도 밥 짓는 냄새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입니다. 배고픈 이웃들이 많은데 밥 냄새가 나면 그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굴뚝 하나에도 세심함이 담겨 있지요. 그뿐 아니라 운조루에서 거저 내준 전답에서 나온 수입은 지금도 동네 노인들의 여행경비 등으로 쓴다고 합니다. 별 수입이 없는 것처럼 보여 수입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운조루 사람들은“우리는 마음이 좁아 조상같이 못한다”며 오히려 부끄러워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웃을 보살피니 운조루는 동학난, 여순(麗順)반란사건, 6ㆍ25 때도 무사했다고 합니다. 지리산이 빨치산의 터전이었으니 해코지 당했을 법 하지만 이웃이 운조루에 사는 이들을 보호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일례로 6ㆍ25때 있었던 사례입니다.
    운조루의 대문을 안에서 본 모습이다. 홍살문이 있고 그 위엔 호랑이 뼈를 걸어놓았다


    운조루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꽃이 마치 종이를 오려놓은 것처럼 곱게 피었다

    인민군이 진주해 이 집을 불태우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앞장서 “이 집만은 불태워선 안 된다”고 집을 지켰다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빨치산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마을로 내려올 때면 주민들이 미리 운조루 사람들에게 알려 피신하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주 최부잣집과 맞먹는 전라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사례라 하겠습니다. 운조루 내부로 들어가 볼까요. 운조루에 들어가기 전 대문은 홍살문입니다. 예로부터 나라에서 충절 있는 집안에 하사한다는 것이지요. 홍살문엔 호랑이뼈가 걸려 있습니다. 그 옆으론 행랑채입니다. 지금은 17채가 남아있는데 원래 좌우로 열두칸씩 24채였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랑채가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이곳뿐입니다.
    운조루의 안채다. 마당에 놓인 항아리와 고졸한 한옥이 조화를 이룬다.

    운조루에서 내려다본 마당이다. 정문과 행랑채가 보인다.

    운조루 안으로 올라서면 기둥이 세 개 보이는데 그 역시 예사롭지 않아 보여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한 개는 파도가 넘실대는 모양이며 한 개는 호랑이의 무늬이며 한 개는 나비를 닮았다”는 겁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굵은 소나무의 무늬가 정말 그렇게 보였습니다. 운조루를 지나 타인능해라고 쓰인 뒤주를 거치면 가면 사람 사는 안채입니다. 안채를 지나면 원래 같은 집이었으나 지금은 일가들이 사는 곳으로 나눠준 집들이 나오고 다시 주변은 머슴살이하던 분들께 준 집들이 운조루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운조루 뒤편은 대나무 숲인데 워낙 빽빽해 대낮에도 햇빛을 잘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운조루 지붕 위를 보면 마치 옛날 양반들의 감투같은 모습으로 장식돼있다.

    다시 운조루로 들어가 봅니다. 지붕에 얹은 기와의 모양이 특이한데 평민들과 달리 상류층이 머리에 쓰던 망건과 닮았습니다. 대감집에만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방 문턱이 의외로 높은데 이것은 주인을 해하려는 적(敵)이 쏘는 화살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조 또한 특이해서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나무인 ‘장여’로만 구성돼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민도리집 구조라고 합니다. 지붕은 한옥 특유의 팔작지붕으로 하늘로 날아갈 듯 산뜻합니다. 이렇게 구경을 한참 동안 하고 있는데 마침 올해 83세가 되는 종부(宗婦)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계속 마당을 쓸거나 잡초를 뽑기에 “일하는 할머니 신가…”하고 의아해했는데 종부라고 해서 잠시 놀랐습니다.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

    운조루의 문화재가 방송에 소개되자 도둑들이 들끓었지만 관청은 책임만 회피하기 바빠...
    부의 말씀을 듣고 나면서 저는 이 기사의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수백년간을 마을을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였으니 그게 국가발전의 근간이 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가 갚을 시점인데 딱한 사정을 들은 겁니다. 
    먼저 종부께 “하루에 몇 명 정도가 오느냐”고 여쭙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입장료 1000원을 받는데‘돈 아깝다’고 들어오지 않고 밖에만 있는 사람,들어와서는‘볼 거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며 나가는 사람이 많아 마음이 불편하다”는 겁니다.
    종부께서 운조루로 기자를 안내하고있다. 왼쪽에 보이는 기둥이 앞에서부터 파도 모양, 호랑이 무늬 모양, 나비 모양이라고한다.

    영국에 체류하며 유럽 곳곳을 가봤던 저는 문화재에 대한 선진국과 한국인의 수준이 하늘과 땅처럼 간격이 넓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영국에서 공공박물관은 거의 무료지만 개인박물관이나 성(城)은 생각보다 훨씬 입장료가 비쌉니다. 평균 35파운드 정도 하는데 이것은 한화로 5만원이 넘지요. 3인 가족이 들어가려면 만만치않은 지출이 됩니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이 꽤 많은 입장료를 군말 없이 내는 건 그만큼 유적을 유지하고 관리해온 성의(誠意)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걸 겁니다. 운조루 근처의 하동 최 참판댁은 소설‘토지’의 무대로 유명하지만 TV세트로 지은 것이고 드라마 제작자들이 운조루에서 한 달 가까이 기거하며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최 참판댁이 1000원을 받는 것에 비하면 운조루 입장료를 비싸다 할 순 없겠지요. 1000원을 받아 생계에 보탬이라도 되게 하려는 종부 앞에서 그런 소리를 서슴없이 지껄이는 사람들은 우리 문화재를 감상할 자격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종부는 지금도 운조루 대문 옆에 앉아 솔 입 달인 물과 종가의 간장을 페트병에 놓고 팔고 있습니다.

    둘째 운조루 관리에 대한 겁니다. 운조루는 워낙 오래돼 유지 보수가 필요한데 구례군에서 지원이 거의 나오지 않아 계속 훼손되고 있습니다. 원래 대문에서 운조루까지 비가 와도 맞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회랑(回廊)이 있었으나 없어져 원형이 사라졌습니다. 행랑채 역시 복원이 필요한데 돈이 없어 못하고 있으며 지붕이나 담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운조루의 유물을 전시할 전시관도 다 지어놓고는 개관식을 안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운조루에 사는 분들은 그 얘기를 하면서 언성을 조금씩 높였습니다.

    셋째, 운조루에 닥친 비극입니다. 운조루의 이름은 그간 아는 사람만이 아는 정도였으니 20여 년 전 박성범씨가 KBS 9시 뉴스 앵커로 있을 때 대대적으로 소개됐다고 합니다. 처음에 운조루 분들은 거절했으나 그는 “이런 문화재는 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 운조루와 운조루가 보유하는 문화재가 소개되자 도둑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비 오던 어느 날 일어났습니다.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종부가 방문을 여는 순간 시퍼런 칼날이 목에 와 닿았습니다. “쉿, 소리 내면 죽인다.” 대체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떼강도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밖에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잠에서 깬 종손 유홍수씨가 방문을 나서려는 찰나 강도들이 밀려들어 오며 망치를 휘둘렀습니다. 망치는 유씨의 머리를 강타했지요. 유씨는 “방에 피가 2㎝ 이상 고일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유씨는 정신병 증세를 보여 한참을 치료받았고 겨우 얼마 전에야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사이 떼강도들이 귀한 물건을 모조리 들고간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운조루에 강도가 든 게 확인된 것만 17번입니다. 병풍이며 그림이며 집 지을 때 나온 돌거북까지 몽땅 훔쳐갔습니다. 집 전체를 떼가지 않은 게 다행 일정도로 범죄의 표적이 됐지만 구례군과 문화재청은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뒤늦게 CCTV가 설치됐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형이 다치자 도시에서 살던 동생이 아내와 함께 돌아왔지만 239년을 버텨온 운조루 사람들은 국민의 무지(無知) 관청의 무시(無視) 속에서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종부께서는 한참 이야기 나누다 뒤늦게 기자라는 사실을 밝혔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켜 녹차 한잔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집 뒤편에 있는 야생차밭에서 딴 것이라 맛이 괜찮을 것”이라면서 종부 할머니가 갑자기 62세로 돌아가신 남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집 남자들이 전부 성격이 불 같아 시아버님 생전에는 내가 하도 무서워서 사랑채 근처는 지나가지도 못했어. 지금이야 문앞에서 버티고 있지만 그래도 이 집이 12대를 넘겼어. 아직 내가 낳은 자식들도 잘 지내고 있고. 어떤 이들은 집을 잘못 지으면 3대를 못 버틴다잖아. 그런데 우리는 무탈하게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그게 명당이 아니고 뭐겠어. 출세하는 게 명당이 아니라 집 잘지키고 자손 잘 이으면 그게 명당이지 안그래요?” Photo By 이서현
    Premium Chosun ☜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