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14 박정희와 메타세콰이어

浮萍草 2015. 6. 27. 10:26
    경부고속도로 조경은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
    메타는 세콰이어 나무의 후속이란 뜻이다. 세콰이어는 인디언 추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는 오늘 한 그루의 나무와 100년 앞을 내다본 한 정치지도자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메타세콰이어(Metasequoia)라는 나무는 원래 실물이 아닌 화석(化石)으로만 존재했다고 합니다. 1945년 중국 사천성의 마도계(磨刀溪)란 곳에서 거대한 나무가 발견됐습니다.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 그런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라간 나무의 정체를 알고 싶어 사천성의 왕전이라는 임업(林業)공무원이 표본을 북경(北京)으로 보냈습니다. 조사 결과 나무는 세상에 없던 것으로 알려진 메타세콰이어였습니다. 1946년 마타오치강(江)에 메타세콰이어 4000여 그루가 있다는 사실이 중국 지질학회지에 발표되면서 메타세콰이어 묘목이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미국 아놀드 식물원이 번식법을 연구했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56년 현신규 박사에 의해서입니다. 지식의 폭(幅)을 넓혀봅니다. ‘메타세콰이어’에서‘메타’는 ‘나중’이란 뜻의 접두어고‘세콰이어’는 아메리카 인디언 중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체로키족 추장으로 현인(賢人)이었다는 이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내친김에 더 나가보겠습니다.
    메타세콰이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일본인이며 살아있는 나무군락을 발견한 사람은 중국인이고 묘목을 전 세계에 퍼트린 사람은 미국인이며 이 나무로 한
    지역을 부흥시킨 사람은 한국인이다.

    메타세콰이어라는 이름을 처음 지은 사람은 일본인 식물학자 미키 시게루(三木茂)입니다. 이름에서 식물학자라는 게 드러나지요? 그는 1939년 일본의 식물화석에서 세콰이어 나뭇잎과 같지만 알려지지 않은 종(種)을 찾아내 ‘메타’라는 접두어를 붙인 겁니다. 수삼(水杉), ‘미국 삼나무’로도 불리는 이 나무는 침엽수지만 대부분의 침엽수가 상록수(常綠樹)인 것과 달리 낙엽수인데다 속성수(速成樹)여서 가로수나 풍치수,즉 경관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데 자주 쓰인다고 하지요. 다시 1960년대로 돌아갑니다. 현신규 박사가 메타세콰이어를 한국에 소개한 지 5년 후 우리가 지금 ‘쿠데타’로, 저는 ‘혁명’이라고 믿는 사변(事變)이 일어나 한 군인(軍人)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떠맡게 됐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껴안은 그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한심한 것은 산림(山林)의 상황이었습니다. 일제의 수탈과 뒤이은 6ㆍ25전쟁에 땔감을 산에서 구하는 습관 때문에 당시 1헥타르당 임목(林木)축적률은 5.7㎡였습니다. 광복 전 6500만㎡이던 나무가 1952년 3600만㎡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무뿐인 직선 도로일뿐인데도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숲이 평화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과 나뭇잎이 빚어낸 조화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만큼 청신하다.
    요순(堯舜)시대 이후로 지도자의 기본은 치산치수(治山治水)라고 하지요. 산을 푸르게 하고 물을 잘 다스려 홍수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녹화에 대한 집념을 가진 것은 1964년 12월 서독(西獨)방문 때라는 게 정설(定說)입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에 돈을 구걸 하러 갔습니다. 대통령 전용기조차 없어 서독이 내준 루프트한자 비행기의 구석을 차지하고 세계를 돌아 독일에 도착해 차관을 빌렸던 이 여행을 저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여정(旅程)이라 생각합니다. 일만 나면 외국으로 나가 “마일리지 쌓으려고 하느냐”고 비판받는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다시 읽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여하간 서독행은 지금도 회자하는 대통령 부부와 광부(鑛夫)들의 함보른 탄광 만남 같은 감동을 만들었습니다. 서독 방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수확은 많았습니다. 차관을 얻었고 경부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포항제철의 아이디어를 구했는데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잘 가꾼 푸른 숲을 본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충격을 받고 이런 말을 남겼지요. “우리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는 유럽에 가지 않겠다!” 오기(傲氣) 서린 다짐이었지만 박 대통령도 처음엔 산림녹화에서 별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서독 방문 전인 1963년 2월부터 한시적으로‘녹화 촉진 임시조치법’을 시행했지만 야산만 망가뜨린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동원된 사람들은 산에 대해 무지한 공무원-학생-병역 미필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무심기와 사방(砂防)사업에 그것도 반강제로 동원됐으니 결과가 뻔했겠지요. 얼렁뚱땅 시간 보내는 식으로 일관했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온 박 대통령은 녹화촉진 임시조치법의 실패를 밑거름으로 다각적인 녹화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경과를 살펴보자면 녹화사업은 치산녹화 10개년 계획(1973~1982년)과 화전 정리사업(1974~1978년)을 양대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즉 나무를 심고(치산녹화),나무를 불태우는 행위를 금지(화전 정리)한 거지요. 대대적인 녹화사업의 와중에서 에피소드도 많았는데 소개해보겠습니다. 조림산업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경기도지사에서 산림청장이 된 손수익씨의 일화에 잘 나옵니다. 박 대통령은 손씨에게“새마을운동은 잘되는데 치산녹화가 안 되고 있어 임자가 맡아 치산녹화를 이룩해봐” 라고 지시했습니다. 손씨는“그날로 집무실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5년8개월 동안을 일했다”고 회고 했습니다
    . 손 전 청장은 “1975년 연두 순시 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150분 동안 3분에 한 번꼴로 50건의 지시를 받아적느라 손이 저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저 산엔 이런 식으로 이 산엔 어떤 식으로 하고 지시 내린 것은 지형을 속속들이 알았다는 뜻이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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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우의 식성까지 바꾼 박정희 대통령의 한 마디
    메타세콰이어는 속성수다. 1년에 1미터씩 자란다고
    한다.40년만에 거목이 된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담양의 자랑이다.
    대통령은 빈농 출신으로 산을 잘 알아 추풍령에 산불을 끄거나 병충해 방지작업을 할 때 횡(橫)으로 임도 (林道)를 만들도록 직접 지시했고 식목일(4월5일)에 이어 육목일(育木日)을 11월 첫째 토요일로 정한 것도 자기가 심은 나무를 확인하란 뜻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심지어 우리 한우(韓牛)의 식성(食性)까지 바꿨다고 합니다. “여물을 먹이려면 땔감이 들어가니 생풀을 먹이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는데 실험해보니 풀을 끓여주는 것보다 날로 먹이는 게 훨씬 영양가가 높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치중한 산림녹화는 사방(砂防)사업과 함께 진행됐는데 여기엔 사연이 있습니다. 1959년 추석 하루 전날 한반도가 태풍 ‘사라’에게 강타당했습니다. 평균 초속이 45m인 초대형 태풍 사라는 1904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후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사망자만 924명에 이재민이 10만명이 생겼으며 당시 재산피해가 우리나라 GDP의 1.5%인 2600만달러에 달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피해가 컸던 것은 태풍이 워낙 셌던 탓도 있지만 산에 나무가 거의 없었고 사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도 컸습니다. 산에 나무가 빽빽하고 토양의 유실을 막았다면 막을 수 있는 피해를 고스란히 당했던 겁니다. 부랴부랴 이승만-장면 정권은 사방사업을 시작했는데 동원된 일꾼들에게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가루를 나눠줬다고 해서 ‘밀가루 사방사업’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산림녹화와 병행하지 않는 사방사업의 효과가 제대로 났을 리 없습니다. 박 대통령 시절, 사방사업의 대표로 꼽히는 것이 포항제철 인근 영일만에서 시행된 공사입니다. 이곳이 지목된 것은 외국손님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이곳”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1년 시작돼 1977년 끝난 영일만 사방사업은 연인원이 360만명이나 동원돼 황폐지 4538헥타르를 녹지대로 탈바꿈시킨 기적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당시 경북도청 산림국장의 회고를 봅니다. “1975년 4월17일은 폭풍우가 엄청났어요. 박 대통령은 해병대 지프를 타고 현지로 갔습니다. 헬기로 2~3분이면 될 거리인데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덜컹대는 지프에 경북지사는 머리를 부딪쳐 피멍이 들었고….”
    다시 이야기를 메타세콰이아 쪽으로 돌려봅니다. 이렇게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에 몰두하면서 박 대통령은 가로수 정비사업을 내무부에 지시합니다.
    그게 1972년의 일입니다. 당시 정부 가로수 시범사업 지역으로 꼽힌 곳 중 하나가 전남 담양입니다. 담양읍에서 순창까지를 잇는 국도 24호선 8㎞ 구간에 무엇을 심을 것이냐를 두고 공무원들 사이에 논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공무원이 권장 가로수로 정해진 품종 가운데 메타세콰이어를 택해섭니다. 당시 나무를 납품한 이는 김재호(85) 선생입니다. 김 선생은 담양 천변 근처에서 조경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키운 3~4년생 묘목은 1965년 서울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서 꺾어다 기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심은 메타세콰이어는 속성수답게 1년에 1m씩 쑥쑥 자라났습니다.
    메타세콰이어길 옆에 있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 40년전 나무를 심던 이들은 이런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길을 필두로 담양에는 4400그루의 메타세콰이어가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메타세콰이어를 심자고 건의했던 공무원은 농민들의 반발로 물러났다고 하지요. “너무 큰 나무 때문에 그늘이 생겨 농사에 지장 있다”고 불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2000년 국도 확장공사 때 지역 시민단체들은 메타세콰이어 178그루를 베라고 주장했는데 일부 뜻있는 이들의 반발로 64그루만 베고 나머지는 겨우 살아났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앞을 보는 혜안(慧眼)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지금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은 ‘전국의 아름다운 길’에 빠지지 않고 뽑히고 있으며 매년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옵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한 혜택이 어느 정도일까요? 일단 입장료가 1일당 2000원입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소문나자 메타세콰이어 길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영화 ‘역린’ ‘간신’등의 포스터가 메타세콰이어 길 중간에 있는 촬영 세트장 벽에 붙어 있는데 이것 또한 관광객들을 유인(誘引)하는 좋은 재료가 될 것 같습니다.
    직선과 직선이 만들어내는 메타세콰이어길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다.

    거기에 음료수-식사를 할 것이니 1년에 100만명만 잡아도 담양주민들은 43년 전에 심어놓은 나무 덕으로 먹고산다는 결과가 나오겠지요. 그늘 때문에 농사를 못 짓겠다고 한 농민들은 그렇다 치고 178그루를 베어버리자고 한 시민단체들은 또 뭔가요? 메타세콰이어길은 차량이 다니는 도로 외에 도보용 길이 있는데 약 2.1㎞입니다. 양옆으로 487그루의 메타세콰이어가 심어진 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지고 흙길을 밟는 기분 또한 그만입니다. 초록색은 안구를 시원스럽게 정화해주기도 하지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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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년 전 외국인이 바라본 '민둥산 조선'
    메타세콰이어는 사람이 걷는 길 뿐 아니라 자동차 도로 옆에도 서있다. 담양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은 메타세콰이어 터널을 방불케한다.
    타세콰이어길 옆은 조선시대 때 영산강 주변에 만든 관방제림길입니다. 메타세콰이어길~관방제림길을 거쳐 다리를 건너면 죽녹원이 있습니다. 온종일 걸은 뒤 담양 명물 떡갈비나 대통밥으로 허기를 채운다면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되겠지요. 이렇게 역사를 짚어본다면 담양주민들이 40년 아니 100년 앞을 내다보고 가로수 시범사업을 지시해 지금의 혜택을 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성의로, 작은 표시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메타세콰이어 길 어디에도 ‘박정희’란 이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左)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도로에 술을 뿌리고있다. 박대통령은 추풍령을 지나다 조림사업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지시를 내렸다.
    ▲ (右) 메타세콰이어를 심자고한 공무원은 농민들의 항의 때문에 물러났다고한다. 그런데 그 농부는 40년후 이렇게 관광객이 몰리는 광경을 상상이나 했을까?

    혹시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이 박정희라는 정치지도자의 업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 아니냐고 지적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산이 푸르렀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짐작이 아닌 팩트(Fact)인데 근거를 볼까요? 114년 전 독일의 지그프리트 겐테라는 기자가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지금의 오지 여행가식으로 한국을 보고 돌아가 ‘신선한 나라 조선 1901’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거기 우리나라 산림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하게 묘사한 부분이 자세히 나옵니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한양)을 내려다보면 헐벗은 산림으로 암담하고 황폐한 모습이다. 특히 나무 하나 없는 산봉우리는 비바람에 마모돼 마치 서울이라는 도시를 사납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독일인답게 겐테 기자는 이유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500년 동안(조선 건국 초부터) 끊임없이 벌목을 했으니 지금 이렇게 완전히 헐벗고 황폐화한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와 함경도의 깊은 산골에 울창한 삼림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예전엔 이곳도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 말이 폐부를 찌르지요. “조선인들은 혹독하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많은 땔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둥산으로 땔감의 값이 비쌌다.” 1904년 조선에 온 스웨덴 기자 그렙스트도 비슷한 증언을 ‘100년전 한국을 가다’라는 책에 남겼습니다. “조선에서 땔감은 나무나 나뭇가지는 물론 건초, 마른 나뭇잎, 가축들의 배설물 등등 뭐든 닥치는 대로 이용했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불을 때는데 땔감이 부족해 가격이 높아, 도시의 경우 1인당 수입의 25%를 땔감 구매에 썼다.” 세월을 거슬러 18세기로 가보면 이유가 더 확실해집니다. 그 시기 온돌이 대중화되면서 산이 급격히 헐벗기 시작한 거지요. 이렇게 18세기부터 헐벗기 시작한 우리의 산은 해방 직후 50%가 민둥산이었고 풀 한포기 없는 사막 같은 산지가 8%나 됐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릴 적 땔나무나 솔방울을 찾아 산을 헤맨 기억이 있을 겁니다. 저 역시 1970년대 초 초등학생 시절에 송충이를 잡으러 지금의 홍익대가 들어선 와우산에 간 기억이 있는데 당시 와우산은 소나무 몇 그루뿐인 민둥산이었지요.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녹화에 힘쓴 결과를 세계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계식량기구(FAO)는 한국을 독일-영국-뉴질랜드와 함께 4대 조림성공국가로 꼽고 있습니다. 레스터 브라운이라는 미국 지구정책연구소장은 저서 ‘플랜B 2.0’에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의 산림녹화는 세계적인 성공작이며 우리도 지구를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997년 한 미국의원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며 이런 말도 남겼지요. “녹색으로 뒤덮인 남한을 보니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실제로 1984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나무의 8할이 20년이 채 안 된 나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뒤덮은 나무 열그루가운데 여덟 그루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심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즘 통계를 내봐도 최소 60% 이상은 될 겁니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 인기가 말이 아니지요. 불통(不通)인사니 늑장대응이니 말이 많았는데 ‘메르스사태’가 직격탄이 된 듯합니다. 이럴 때 아버지가 했던 일의 절반이라도 기억해 모방한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메타세콰이어길에서 해봤습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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