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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실존주의에 기댄 문단과 知識人… 전쟁후 끝없는 허무속 '희망찾기'

浮萍草 2015. 5. 8. 09:28
    종군작가단 합류한 문인들, 대구·부산서 고달픈 삶
    경박한 지적유행 된 '실존'… 북한까지 나서 비판할 정도
    그래도 "인간성 되찾자"는 나름의 희망적 순기능 제공
    쟁의 포화를 문인들이라고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살길을 찾아 피란을 떠난 소위 '도강파(渡江派)' 문인들은 종군작가단에 합류해 신문·잡지사가 옮겨간 부산이나 대구에 정착했다.
    육·해·공군에 각각 설치된 종군작가단은 대부분 민간인 작가로 조직됐다. 
    하지만 쉰다섯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어색한 소령 계급장을 달고 종군한 염상섭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제1과 제1장' 같은 농촌 소설을 쓰던 이무영은 해군 정훈감으로 복무하다 대령으로 예편했다. 
    마해송·조지훈·구상·김팔봉·최정희 등 대구의 종군 문인들은 일선 부대 위문 방문이나 원고 집필을 마치면 '말대가리집''석류나무집' '감나무집' 등 대폿집을 찾아 
    술을 마시며 피란살이의 고달픔을 달랬다.
    1950년대 초 군산에서 열린 문학 강연. 아래줄 왼쪽부터 시인 김수영, 시조 시인 이병기, 시인 신석정. 뒷줄 오른쪽은 시인 고은. /민음사 제공

    대구의 종군작가들은 군에서 식량과 보급품이라도 배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으로 피란한 문인들은 전쟁 통에 신문·잡지사 외에는 딱히 기댈 곳도 없었다. 거처를 마련할 길이 막막했던 문인들은 신문·잡지사 사무실에 대여섯 명씩 몰려가 새우잠을 잤다. 염치 불고하고 오영수·김말봉 등 부산 출신 문인들의 집에서 더부살이하기도 했다. 부산 피란 문단의 중심은 광복동 문총(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 사무실 2층에 있는 '밀다원(密茶苑)'이었다.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시대'의 실제 무대가 바로 이곳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던 문인들은 '밀다원''금강''춘추''녹원'같은 다방에 온종일 모여 앉아 전쟁이 남긴 허무와 불안을 달랬다. 1951년 2월에는 남포동 '스타' 다방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스물일곱 살 젊은 시인 전봉래가 수면제를 다량 삼키고 자살했다. 죽음을 기다리며 원고지 2장에 흘려 쓴 그의 유서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淸白)히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봉래의 자살,그리고 그의 유서에 나타난 '살고 싶지만 살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지독한 역설은 당시 문인들 사이에 팽배했던 퇴폐와 염세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지식인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무기력감에 시달렸다. '실존' 개념과 하이데거의 저작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처럼 실존주의가 지식의 대상을 넘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1950년대 전쟁 직후였다. 북한마저 남한의 실존주의 열풍에 '남조선에 류포되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의 반동적 본질'(조선 로동당 출판사)을 통해 정색하고 비판하고 나설 정도였다. 북한은 이 책에서 "실존주의 철학은 제국주의 략탈자들의 침략 정책,식민지 략탈 및 파쇼 테러 독재 등으로 인하여 인민 생활이 극도로 파괴 유린되고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반동적인 지배자들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상적 무기"라며"현대의 모든 부르주아 철학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철학도 멸망해 가는 계급의 불안의 철학"이라고 비난했다. 서구에서 실존주의가 부각된 것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근대 문명과 합리성에 대한 회의와 위기의식이 심화됐기 때문이었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 출발한 실존주의는 카뮈와 사르트르에 이르러 문학·사회 운동으로 확대됐다. 1950년대 전후 한국 사회가 서구의 다양한 사상과 사조 가운데 굳이 실존주의를 요구한 것은 전쟁을 거치면서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근본적인 성찰과 해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철학자와 문예 이론가들은 서구의 실존주의 이론을 피상적으로 소개하는 데 급급했다. 작가들은 사르트르, 카뮈, 앙드레 말로, 카프카 등 서구의 실존주의 작품들을 서툴게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더욱이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실존주의는 경박한 지적 유행으로 변질됐다. 고은은 "다방에서 냉수 한 잔을 청해서 그 냉수를 투시하다가 그것을 쏟아버리고 '실존!'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나가버리는 자가 바로 명동의 실존주의자였다"고 탄식했다. 195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실존주의는 철학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결코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불안과 염세주의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지식인들에게 실존주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이해됐다. 정확한 이해는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순기능은 있었던 것이다. 비록 경박한 유행으로 변질됐지만 실존주의에라도 기댈 수 있었기에 1950년대 지식인들은 분단과 전쟁이 남긴 그 절대적 허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Chosun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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