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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장학량 (3)

浮萍草 2015. 6. 16. 08:30
    유부남 장학량과 불같은 사랑을 했던 조일적...뜨거운 부부애가 장수 비결
    주은래(좌측 상단에서부터 시계 방향), 모택동,
    장학량, 등소평./조선일보DB
    39세에 시작되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연금 생활을 해야만 했던 장학량이 취미활동만으로 그렇게 건강 하게 지탱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 무려 54년이나 되는데 장학량의 길고 긴 연금 생활을 건강하게 지탱해 준 가장 중요한 비결은 바로 부부의 애정이었습니다. 장학량 부부의 금슬이 그렇게 좋았기에 심신의 건강이 촉진되었던 것이죠.
    부부의 금슬이 어느 정도로 좋았기에 가장 중요한 건강 장수비결이 되나?
    ‘주은래’는 술을 즐기고 담배는 멀리 했는데 79세까지 살았고 ‘모택동’은 술을 멀리하고 담배만 즐겼는데 84세까지 살았습니다. ‘등소평’은 술과 담배를 모두 즐겼는데도 94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장학량은 술, 담배에 여색도 가까이 했지만 104세까지 살았다는 겁니다. 말년에 스스로 “평생 동안 아쉬운 일은 없으며 단지 여인을 좋아한 것일 뿐”이라고 토로했다고 하는데, 역사학자인 당덕강(唐德剛) 교수에게 “나의 여인 편력사를 책으로 내면 큰돈을 벌 것이다”고 언급할 정도로 관계가 알려진 여성만 해도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장학량은 두 번째 부인과 열렬한 사랑을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세기의 사랑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ㆍ얼마나 대단했기에 ‘세기의 사랑’인가?
    장학량의 두 번째 부인은 조일적(趙一荻)인데 그녀와 장학량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녀의 깊은 애정은 54년 동안 연금생활을 했던 장학량으로 하여금 고독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건강장수에 매우 유익하게 작용했습니다. 사랑의 힘은 대단한 것이죠.
    ㆍ장학량과 조일적의 러브스토리
    중국의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주간신문'환구시보(環球時報)'가 그녀의 일생을 소개했는데, ‘중국현대사에서 상당히 신비로운 여성인 조일적은 장학량과의 전설적 사랑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됐다’고 적었습니다. 조일적은 절강성(浙江省)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중앙정부의 교통차관을 지냈습니다. 6남 4녀의 막내딸로서 선천적으로 미모와 총명을 겸비한 재원이었는데 열너댓살 때 이미 ‘북양화보(北洋畵報)’란 잡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답니다. 그녀는 천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1926년 채공관이라는 사교장에서 열린 그녀의 생일무도회에서 당시 ‘4대 공자(公子)’의 한사람이자 청년원수로 불리던 장학량과 처음 만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다음 해 여름에 그녀는 가족과 함께 북대하로 피서를 갔는데 마침 그 곳에 휴양차 와 있던 장학량과 재회하고 친해졌던 것이죠. 천진으로 돌아와 자주 만나 춤을 추면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장학량은 이미 부인이 있었죠.
    장학량과 조일적의 결혼 당시 모습./유튜브 캡처

    ㆍ조일적은 어떻게 해서 장학량의 부인이 되었나?
    조일적의 아버지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장학량과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분기탱천해 집안에 가두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조일적은 1929년 여섯째 오빠의 도움으로 가출하여 심양으로 가서 장학량과 동거하게 됩니다. 당연히 집안에 난리가 났는데, 아버지는 신문에 ‘부녀관계를 끊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광고까지 냈답니다. 장학량의 본부인 우봉지(于鳳至)는 조일적에게 비서자리만 주고 정식 부인의 지위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꺼이 비서신분으로 장학량을 모셨습니다. 본부인은 조일적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심으로 장학량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집을 하나 지어주고 살게 했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형님아우하며 화목하게 지냈고, 조일적은 다음 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ㆍ조일적의 사랑이 장학량에 큰 도움을 주었나?
    1933년경 장학량은 전투에 패한 뒤에 보직에서 해임되어 실의에 빠졌고 아편에 중독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 홍콩에 있던 조일적은 장학량을 찾아가 환골탈태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아편을 끊게 만들어 건강을 되찾고 재기할 수 있게 하였죠. 그리고 시안사변 후에 연금을 당해 어려웠던 시절에도 조일적은 장학량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64년에 본부인 우봉지가 장학량과 이혼해 주었기 때문에 64세와 51세의 나이로 대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고도 계속 반연금 상태에 있다가 1990년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하와이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10년 뒤인 2000년에 조일적은 88세의 나이로 장학량과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학량은 휠체어 신세를 지는 100세가 넘은 노인이지만 줄곧 부인의 침상을 지켰고 부인이 숨을 거두고 나서도 근 한 시간 동안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답니다. 무려 71년에 걸친 부부의 사랑이 끝나자 장학량은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비결에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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