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朝線時代 夫婦사랑法

2 유희춘과 송덕봉

浮萍草 2015. 4. 24. 11:56
    남편과 친구처럼 지내려면 이 정도는 해야
    담양 미암유물전시관에 소장된 '미암일기' 원본.

    ㆍ나를 알아주는 친구 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부부상을 가장 이상적으로 여길까? 아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부부가 되었으면 하는가? 말이 잘 통하는 부부, 더 나아가 마음이 잘 맞는 부부? 그렇다! 다들 친구 같은 부부가 되길 원할 것이다. 조선시대 부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지우(知友), 즉 나를 알아주는 친구를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나를 알아주는 친구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서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말하였다. 그 대표적인 부부가 바로 16세기 미암 유희춘과 송덕봉이었다.
    ㆍ유희춘과 송덕봉
    미암 유희춘(1513~1577)은 16세기 대표적인 경학자이자 관인이었다. 전라도 해남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24살 때 담양의 송덕봉에게 장가를 와서 줄곧 처가살이를 했다. 어릴 적부터 명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던 그는 26살에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무관 수찬,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하지만 35살 때 양재역 벽서사건(이기·윤원형 등이 어린 명종을 대신해 정치하던 문정왕후를 속여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이후 20여년 동안 함경도 종성에서 유 배생활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로도 그는 10여년 동안 홍무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내면서 자주 집을 떠나 생활했다. 미암은 조선중기 호남의 거유(巨儒)이기도 했지만『미암일기』(보물 제260호)의 저자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미암일기는 그의 나이 55세 되던 1567년부터 죽기 직전인 1577년까지 10여년간의 기록으로,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송덕봉(1521~1578)도 비록 지방의 사족이지만 만만치 않은 집안의 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천성이 명민하고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여사(女士),즉 여성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평생 동안 시와 문, 편지 등을 써서 『덕봉집』이란 문집을 남기기도 했다. 덕봉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원래 미암은 학문이 매우 정밀하고 행실이 독실했지만,세상 물정에는 어두워 가사를 잘 다스릴 줄 몰랐고 의관과 버선이 해져도 부인이 새 것으로 내주지 않으면 바꿔 입을 줄을 몰랐다고 한다. 또 덕봉은 미암의 서책도 자주 정리해줬는데 한번은 책 테두리에 제목을 써서 보고 싶은 책을 쉽게 꺼내볼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미암이 매우 좋아하며 ‘보고 싶은 책을 쉽게 꺼내볼 수 있으니 아주 좋다!’라고 일기에 기록해두었다. 뿐만 아니라 덕봉은 미암의 저술 작업에도 자주 도와줬다. 예컨대 미암일기를 보면 ‘내가 오늘『유합(類合)』하권을 번역하면서 부인에게 많이 물어서 개정을 했다.’거나『상서(尙書)』를 교정하다가 모르는 것을 덕봉에게 물어 알고는 ‘내가 오늘 새벽에 부인과 동료가 되었다.’라는 기록들이 나오곤 한다.
    Premium Chosun ☜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myjin55@hanmail.net

      草浮
    印萍

    유희춘과 송덕봉 ②
    남편이 서너달 동안 외도를 않자 부인이 호통친 사연
    ㆍ부부가 시를 주고받다
    선시대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부부생활이 대단히 고정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앞의 미암처럼 수학이나 관직,유배,근친 등의 이유로 자주 집을 비우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부부가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조선시대 사람 들이 현대보다 부부싸움을 덜했던 것도 이처럼 부부가 함께 붙어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럼에도 미암과 덕봉은 서로 ‘지우(知友)’라고 하면서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했다.또 훗날 미암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덕봉도 곧 뒤를 따라갔다. 그야말로 ‘별거부부’라 할 정도로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음에도 어떻게 부부관계가 그리 좋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평소 부부가 끊임없이 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조 2년(1569) 2월이었다. 이즈음 미암은 외교 담당 부서인 승문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숙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비가 오다가 눈으로 바뀌는 등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덕봉은 못내 걱정스러워 새로 지은 비단 이불과 평소 입는 외투인 단령을 보자기에 싸서 미암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전혀 뜻밖의 물건을 받은 미암은 부인의 마음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그래서 임금이 하사한 술상과 이러한 시를 지어 보냈다.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그대가 추운 방에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노라. 이 술이 비록 하품(下品)이지만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으리.
    그러자 덕봉도 모처럼 시심(詩心)을 발휘하여 이러한 화답시를 지어 보냈다. 국화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으니 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소.
    이날 밤 미암은 6일만에 비로소 퇴근하고 돌아오는데, 일기를 보면 ‘부인과 엿새를 떨어졌다가 만나니 반가웠다.’라고 기록돼 있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미암과 덕봉은 또한 평소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집안일을 서로 의논하거나 애틋한 마음을 나눴다. 그 편지들을 보면 두 사람은 과연 친구 같은 부부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선조 3년(1570), 미암이 한양에서 홀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3~4개월 동안 독숙(獨宿)하면서 일체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자랑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러자 덕봉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 호되게 나무라는 것이었다. “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또 중심이 이미 정해지면 물욕이 가리기 어려운 것이니 자연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하기를 바라시오. 3~4개월 동안 독숙(獨宿)을 하고서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오. 안정하고 결백하여 밖으로 화채(華采)를 끊고 안으로 사념(私念)이 없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해야만 알 일이겠소. 곁에 지기의 벗이 있고 아래로 권속과 노복들이 있어 십목(十目)이 보는 바이니 자연 공론이 퍼질 것이거늘, 꼭 힘들게 편지를 보낼 것까지 있겠소. 이로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 이러한 편지를 읽은 미암은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라고 일기에 기록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이는 평소 부인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같은 빠르고 다양한 통신수단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해 서로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는 횟수는 오히려 더욱 줄어들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우(知友), 즉 나를 알아주는 친구란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웠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다시 한번 기억했으면 싶다. 지금 남편 혹은 아내에게 따뜻한 마음이 담긴 문자 한통이라도 써서 보내면 어떨까.
    담양 미암유물전시관에 소장된 '미암일기' 원본.

    Premium Chosun ☜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myjin55@hanmail.net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