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16] '30년 해외 영업맨' 김진한

浮萍草 2015. 6. 6. 00:30
    우린 정말 사막에서 난로를 팔았다… 대한민국 키운 '수출 돌격대'
    이집트 400만弗 통신케이블 수주전 "한국이 뭘 하겠나" 무시했지만 배짱과 '工作'으로 사업을 따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40%를 장악했다
    종합상사엔 세계 지도가 있다… 회의 때 팀장이 점을 찍으면 우리는 凍土든 사막이든 달려 갔고, 수단 방법 안가리고 물건을 팔았다
    "한국? 당신네 나라에 전쟁 났을 때 우리나라가 구호품 보내줬던 걸로 아는데… 통신케이블을 만들 수 있기는 한가?" 40년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이집트 체신청장 앞에서 김진한은 기가 막혔다. 김진한은 대한전선 해외영업과장이었고 장소는 카이로에 있는 체신청장 사무실이었다. 1990년 무렵, 이집트는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그때 이집트 정부는 400만달러어치 관급공사를 국제 입찰에 부쳐놓고 있었다. 미국 에섹스,프랑스 알카텔,이탈리아 피레리,핀란드 노키아,독일 지멘스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전선업계 맹주(盟主)들이 이집트 동(銅)통신케이블 시장을 휘어잡고 있었다.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김진한에게 체신청장이 담배 연기를 뿜었다.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 케이블만 써봐서, 글쎄…." 욱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얼굴은 웃었다. 자그마치 400만달러짜리 갑(甲)이 아닌가. 일단 가격으로 밀고 나갔다. 그리고 품질도 좋다고 호기 있게 말했다. 김진한은 최저가격을 써넣고 케이블을 수주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생판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무명기업에서 감히? 몇 달 뒤 이집트 체신청은 제품의 샘플과 납품실적 증명서를 요구했다. 샘플 물량은 1.5m, 증명서는 당연히 영어였다. 대한전선은 이집트 체신청이 요구한 제품을 납품한 실적이 없었다.
    ㆍ때로는 스파이처럼
    수출 현장에서 영업은 공작(工作)이었다. 영업맨은 공작원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건을 팔아야 한다. 고지(高地)가 하나밖에 없다면 기존의 고지 점령군을 끌어내려야 전선을 확장할 수 있다. 수출 전선에는 총과 수류탄과 포탄은 없지만 공작으로 고지를 점령해야 물건을 팔 수 있다. 김진한 또한 공작원과 비슷했다. 신생주자에게 돌아올 반격은 충분히 예상했다. 김진한은 곧바로 1.5m가 아니라 200m를 칭칭 감은 통신케이블 한 드럼을 비행기로 보냈다. 국내 한 공기업에 제출했던 납품 실적증명서에 그 모델 케이블을 슬쩍 리스트에 끼워넣고 영어로 번역했다. 번듯한 실적증명서와 샘플 수준을 넘어선 샘플에 이집트 체신청과 타 업체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고, 케이블은 무사히 현장 검사를 통과했다. 이후 대한전선은 이집트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시장을 조금씩 침투해 들어갔다. 아프리카 대륙을 나눠 가지던 미국과 유럽 업체들은 뒤로 밀려나고 2000년대 초 대한전선은 아프리카 동(銅)통신케이블 시장의 40%를 장악했다. 2등 없는 1등이 된 것이다. 당시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케이블 시장은 연 3억달러에 통신케이블은 3000만달러 정도였다. 그 가운데 1200만달러가 대한전선 몫이었다. 경쟁업체였던 이탈리아 피레리의 간부들은 국제회의에서 대한전선 직원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 미스터 킴이 우리를 죽였다". 4년 뒤 '미스터 킴'은 카이로 람세스 힐튼호텔에서 바이어와 저녁을 먹다가 외국인만 쏴대는 테러리스트들의 총알을 겨우 피했다. 그리고 200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전선이 만든 전선회사의 CEO로 있다가 의문의 권총 테러를 당해 또 죽을 뻔했다. 이쯤 되면 '공작원 같은'이 아니라 '공작원', 아니 '스파이'였다.
    ㆍ종합상사의 탄생
    1차 석유위기를 넘기고도 숨 한번 제대로 못 쉬며 긴장했던 1975년,수출로 먹고살기로 작정한 대한민국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광복이 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무명 국가였다. 아무리 뭘 만들어놓아도 그 초라한 국격(國格)과 브랜드 가치로는 팔 길이 없던 시절이었다. 만든 물건을 해외에 팔아줄 상인이 필요했다. 정부는 많이만 팔아주면 세금도 대출도 혜택을 주는 기업 제도를 만들었다. 혜택을 주는 대신 조건도 엄격했다.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2% 이상을 팔아야 하고 30개국 이상에 100만달러 이상을 팔아야 했다. '종합상사'는 2009년 공식적으로 각종 지원 혜택이 폐지될 때까지 수출 입국(立國)과 수출 보국(報國)을 책임지는 첨병 역할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드라마 '미생'에서 봤듯 러시아면 러시아어, 독일이면 독일어로 척척 응대하며 거래하는 명문대 출신 청년들이 대거 종합상사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일한 곳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사막이었고, 한 일은 장부 정리가 아니라 영업이었다. 상사맨들은 "알래스카에 가서 냉장고를 팔고, 사하라에서 난로를 판다"고 했다.
    ㆍ우리, 군복 전문회사다"
    " 1975년 레바논 베이루트에 부임한 스물아홉 살 먹은 삼성물산 과장 김재우는 석 달 만에 돈이 딱 떨어졌다. 송금 체계가 원활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문득 보니 서울 본사 건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은행의 지점 간판이 보였다. 무작정 들어가 부지점장을 면담했다. "귀 은행의 서울지점이 우리 회사 건물의 세입자다. 확인해보고 대출 좀 부탁한다. 당신이 도와주면 돈은 빨리 갚을 수 있다." 금방 친구가 된 부지점장은 아르메니아 상인을 소개해줬다. "이 사람 아버지는 헌 옷을 무게로 달아 사서 한 벌씩 팔아 떼돈을 벌었고 본인은 돈이 된다면 피도 뽑을 자"라고 소개했다. 얼마 뒤 그 아르메니아 상인이 물었다. "당신네 회사, 군복도 하나?" 1초도 쉬지 않고 김재우가 대답했다. "섬유 전문회사다. 군복 전담과도 있으니 나한테 맡겨라." 옷 쪼가리 팔아봐야 얼마나 벌겠나 싶었지만 무조건 '예스'라고 대답했다. 물론 군복 전담과는 없었고, 군복이 무역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조차 금시초문이었다. 김재우는 훗날 "식은땀이 엉덩이까지 흘렀지만 말을 더듬었다가는 장사판에 끼지도 못할 상황이라서 무조건 배짱을 부렸다"고 했다. 다음 날 김재우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지점으로 달려갔다. 코트라 견본실 한구석에서 본 군복이 떠올랐다. 재질 설명서까지 붙어 있는 군복이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그 군복을 집어드는 순간 삼성물산에는 특수사업부와 군복 전담과가 탄생했다. 며칠 뒤 김재우는 아르메니아 상인이 데려온 사우디아라비아 거물 바이어와 함께 사우디 군부대에 갔다. 세상에, 병사들이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에서 용도 폐기된 갖가지 군복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거물 바이어가 말했다. "저놈들에게 다 유니폼을 입힐 것이야." 며칠 뒤 김재우는 그 바이어를 모시고 서울로 날아갔다. '1년 전부터 운영 중인' 급조된 군복 전담과가 이들을 맞았다. 몇 달 뒤 입찰이 진행됐고 냄새를 맡은 다른 큰 업체들이 달라붙었다. 초조하고 지루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베이루트로 돌아간 김재우는 100달러짜리 양주를 마시며 속을 누르고 있었다. 1976년 1월 6일, 양주를 막 비우는 그에게 사우디아라비아 바이어가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그동안 술값이 9800달러라며? 여기 와서 1만달러 채우자고." 신용장 한 장에 적힌 숫자는 $101,000,000, 1억100만달러였다. 삼성물산의 리비아 지사장은 비슷한 때에 난로를 팔아먹었다. 당시 리비아 국가지도자 카다피가 전 국민에게 난로를 배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보를 입수해 가능했던 일이었다. 물량은 2000만달러어치였다. 컨테이너 273개가 동원됐다. 진짜로 사막에 난로를 팔아낸 것이다.
    ㆍ사막의 양고기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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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 물량을 싣고 있는 화물기. /조인원 기자
    이집트 다음 차례는 서쪽 리비아였다. 돈이 되면 어디든 가야 했고 무엇이든 해야 했고 손해도 봐야 했다. 종합상사를 통하지 않고 직거래를 택한 김진한은 그 자신이 상사맨처럼 움직였다. 1990년대 초 리비아는 국가 개조 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하라사막을 뚫고 대수로 공사가 벌어졌고 곳곳에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큰 시장을 놓칠 수 없었다. 리비아의 통신케이블은 이탈리아 피레리가 30년째 독점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리비아까지 선박으로 12시간 거리였고 부산에서 리비아 트리폴리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납품 시한이 더 문제였다. 어렵사리 계약을 따냈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김진한이 간부회의에 요청했다. "돈보다 신뢰다. 항공으로 운송하자." 대한항공 화물기 2대와 전세 낸 홍콩 화물기가 동원돼 1차 물품 전량을 항공기로 배달했다. UN 제재 중이던 때라 인근 튀니지 제르바 공항에 도착한 뒤 트럭에 나눠 싣고 밤새 달렸다. 전량이 납기에 맞춰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대신 적자였다. 리비아 체신청 구매국장이 김진한에게 말했다. "납기를 연장해줄 수 있었는데 왜 손해를 봤나." 목소리에는 흐뭇함이 묻어 있었다. 이후 체신청장과 구매국장은 김진한에게'형제'라 부르며 수시로 집으로 불러 밤새 양고기 파티를 벌였다. 아랍에서 금지된 술도 밤새 퍼마셨다. 피레리가 독점했던 리비아 통신케이블 시장은 절반이 대한전선에 돌아갔다. 하지만 김진한처럼 제조업체가 영업과 판매를 하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종합상사는 그 여력 없는 기업을 대신해 판로를 뚫고 아이템을 찾아내는 역할을 했다. 초창기 종합상사 회의실에는 항상 세계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회의는 단순했다.
    지도에 점을 찍고서 팀장이 선언한다. '이번에는 여기로 간다.' 북극이든 사막이든 시베리아 동토(凍土)든 상사맨들은 갔다. 그 결과 1980년 5월 19일 미국 주간지 'USA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한국이 종합상사 체제를 도입한 이래 수출이 급격히 성장해 일본과 비슷한 양상의 무역그룹으로 부상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상사맨들의 활극은 더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ㆍ파바로티를 사랑한 여인
    "무슈 손, 제 곁에 앉아요. 파바로티 얘기를 좀 더 하고 싶군요." 열병합발전소 석탄 가루 처리 시스템을 제작하는 프랑스 회사의 사장 아내가 말했다. 일본 도요엔진과 함께 처리시스템 판매권을 놓고 겨루던 삼성물산 손모 대리는 제작사의 사장 아내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정보를 무기로 달려들었다. 사장 집 파티에 무작정 찾아간 그는 꽃다발과 파바로티 레코드판을 내밀었다. 파티가 끝나고 새벽까지 이어진 대화에는 남편도 동참했다. 삼성물산은 한국에 대한 독점공급권을 따냈다. 삼성물산 나이지리아 지점은 주택 사업이 한창인 나이지리아에 합판을 팔았다. 동남아에서 수입한 원목을 가공해 나이지리아로 보냈다. 그런데 지점장이 6개월을 살면서 보니 그 찌는 더위를 이기려고 사람들이 짠 음식을 먹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소금은 어디서 나는 거지? 조사해보니 100% 수입품이었다. 6개월 뒤 나이지리아 수도 라고스에 있는 합판 거래처들은 모두 소금장사로 변신했다. 합판보다 이윤이 더 남았다. 본사에서 간부들이 왔을 때 지사에서는 귀한 라면과 소금으로 간을 한 부추김치로 잔치를 벌였다.
    ㆍ내가 마피아가 아니라서
    … 이집트에서 시작한 김진한의 케이블 장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끝났다. 2000년 6월 망해가던 남아공 케이블회사 엠텍을 아예 인수해버린 것이다. 유럽계 2개 회사가 장악했던 통신케이블 시장에서 엠텍은 1위를 차지했다. 그때 3개사가 서로 협력관계였는데 한 회사가 협력관계를 깨고 배신했다. 그래서 김진한이 그 사장에게 말해줬다. "마피아가 아니라서 팔목은 자르지 못하겠고 경고만 하 는데 장사 포기해라." 결국 그 회사는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김진한은 무장괴한 2명으로부터 총격 테러를 당했다. 훗날을 짐작해 승용차에 방탄시설을 해둔 덕에 죽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김진한은 이집트에 1억달러 이란에 5000만달러어치 전선을 팔았고 남아공회사 엠텍은 인수 이듬해 흑자로 돌아섰다. 김진한은 2010년 4월 30일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보낸 회사에서 퇴직했다. 1980년 5월 1일 가죽 장갑 회사에서 해외영업을 시작한 이후 딱 30년 만이었다
    ㆍ김진한
    제 아들은 해병대 소위이고 딸은 사우디항공 승무원입니다. 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외국 생활이 한국보다 훨씬 긴데도 부모의 말에 따를 줄 알고 잘 컸습니다. 대견스럽습니다. 가족에게 빚이 많습니다. 저는 만 30년 수출에 몰두하고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다 나를 위한 길이고 가족을 위한 길이고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아서 한 일이어서 신명나게 일했습니다. 선배 수출인들에게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 험한 길을 어떻게 이리 굳게 다져주셨는지요.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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