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6] 버스 여차장 송안숙

浮萍草 2015. 5. 23. 15:30
    하루 18시간, 승강구서 졸며 "오라이~" 그렇게 산업화시대 滿員버스를 굴렸다
    학력·나이제한 없던 차장 취업 - 새벽4시 첫차~子正 막차까지 콩나물버스 올라 동생학비 벌어… 손님 밀쳐올릴 땐 '욕바가지'
    알몸 삥땅 검사에 매질까지 - "차비 빼돌린다" 옷벗기고 뒤져 졸다 승강구서 추락해 사망도… 1989년 안내양 직업은 사라졌다

    ㆍ1978년 9월, 130번 버스 늘도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열일곱 먹은 부안 처녀 송안숙은 마음속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노래를 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영국 황제 루이스가 날 부러워하네~." 운전기사가 급커브를 돌았다. 차가 기우뚱하더니 사람들이 안쪽으로 쏠려 들어갔다. 꼽쳐 신은 신발로 발판에 버티고 있던 안숙은 배로 승객들을 밀면서 황급히 차문을 닫았다.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X아, 우리가 뭐 콩나물인 줄 아니!" 버스가 속력을 냈다. 안숙은 버스 안내양이다. 사람들은 차장이라고 부른다. 차장(車掌)은 차의 손바닥이다. 사람이 아니라 차의 부품이다.
    ㆍ여차장의 등장
    1961년 6월 교통부는 8월 1일부터 시내버스 차장을 전원 여자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회기강 확립을 주문했던 정부였다.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없이 하기 위함." 6월 12일 부산 시내버스를 시작으로 8월까지 전국 버스 차장이 남자에서 여자로 교체됐다. 이미 2년 전 서울 버스에 여차장 87명이 시범 운영된 적도 있던 터라 사람들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젊고 예쁜 여자 안내원들을 기대했다. 1960년대 사람은 남아돌았다. 여자는 더 남아돌았다. 사람값은 쌌고, 여자값은 더 쌌다. 많은 시골 계집아이가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도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무학(無學)의 10대 소녀들에게 돌아갈 일자리는 없었다. 차장은 학력은 물론 나이도 제한이 없었다. 식모보다 나았고 직공보다 쉬웠다. 사람대접 못 받는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여차장은 쉽게 취직할 수 있는 꿈의 직업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직업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회는 사람대접 못 받는 여자들을 딱 그만큼만 대접했다. 사람이 아니라 차장, 그러니까 '손바닥' 정도로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학생과 직장인, 중산층의 안전을 책임지던 연약한 손들.
    ㆍ"35 곱하기 7은?"
    송안숙은 여차장이 도입된 그해에 태어났다. 고향은 전북 부안이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와 열심히 일하는 엄마 그리고 언니와 남동생 둘과 함께 주산면 들판에서 농사짓고 살았다. 국민학교 6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노름으로 논 열두 마지기를 하룻밤에 탕진했다. 가족은 바닷가 하서 마을로 이사했다. 안숙은 엄마를 따라다니며 갯가에서 조개도 줍고 가마니도 만들어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딸년들 필요 없다"고 술주정을 했다. 오기가 난 안숙은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자기 손으로 두 동생을 공부시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는 가지 못했다. 대신 조갯살 다듬는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었다. 서울에 올라와 식모 생활도 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결국 택한 직업이 여차장이었다. 힘은 들지만 열심히 일하면 많이 번다고 했다.
    1983년 3월 30일 서울 시내버스 안내양
    직장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김포교통이었다. 안숙은 130번과 41번 버스를 탔다. 김포에서 서울을 오가는 버스였다. 친구 소개로 면접 보던 날 경기도 김포교통 사람이 문제를 냈다. "35 곱하기 7은?" 그때 성인 요금이 35원이었다. 질문 여섯 개에 바로 정답을 맞힌 안숙은 취직이 됐다. 1978년 9월 2일이었다.
    ㆍ중노동과 집단탈출
    출퇴근 시간이면 버스는 비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을 태워 날랐다. 버스마다 사람들로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어떻게 터지지 않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차장이 생겨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961년 9월 21일 아침 아홉 시,서울 상도동 상도극장 정류장에서 출발하던 버스에서 여차장이 추락했다. 문을 닫지 않고 떠난 버스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여차장은 병원으로 옮긴 지 세 시간 만에 죽었다. 정경자, 열여덟 살이었다. 차장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첫차에 올라서 하루 16~18시간을 승강구에 서서 일하다가 밤 12시가 다 돼서 막차에서 내렸다. 차 내부를 청소하고 세수를 하고 합숙소에 누우면 새벽 1시 정도였다. 3시간 만에 아침이 왔다. 1964년 그녀들이 받은 월급은 1400원이었다. 쌀 한가마니는 3556원이었다. 차장들은 그 월급을 쪼개서 저금을 하고 고향으로 부치고 동생들 학비를 댔다. 1964년 1월 16일 새벽 2시
    , 서울 영등포구 신대방동에 있는 한 버스 회사 여차장 74명이 합숙소를 집단탈출했다. 대우를 잘해달라고 요구한 게 탈이었다. 18시간만 일하게 해 달라,일급을 50원 올려달라,밥을 제대로 달라,매질을 일삼는 감독을 내보내라. 이런 요구에 회사는 열일곱,열여덟 먹은 여자애들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구 때렸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22년4개월20일 동안 버스
    여차장들은 대한민국 서민들의 발이었다.사회적 냉대
    속에서 18시간에 이르는 중노동에 시달린 안내양들은
    차창에 기대어 졸기 일쑤였다.
    이듬해 2월 서울 서교동에 있는 회사에서 여차장 두 명이 '삥땅'을 하다 적발됐다. 회사는 경찰을 동원해 여차장 전원을 조사하며 손가락 사이에 만년필을 끼워 비틀며 고문을 했다. 여차장 117명이 새벽에 탈출했다. 그해 가을, 삥땅 혐의를 받던 희자가 제1한강교에서 투신자살했다. 열여덟 살이었다. 1969년 삥땅 감시원이 생겨났다. 넘버링(발판 아래 설치한 계수기로 승객들 숫자를 새기는 일)을 해가며 이들이 얻어낸 승객 숫자는 여차장들 ' 센터 까는 데(몸수색을 하는 데)' 이용됐다. 그해 12월 서울시는 시내 여차장 7000여 명 가운데 50%가 매일 매를 맞고 있다고 발표했다. 1970년 4월 YMCA 주관으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는'삥땅이란 무엇인가'. 한 여차장은 "하루 300원 삥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죄의식이 너무 커서 교회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누구나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석 달 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1960년대 후반에 생기기 시작한 전국 수출공단이 본격 가동됐다. 많은 차장이 공단으로 빠져나갔다. 공단에서는 야간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벌이도 더 좋았다.
    ㆍ고학생의 추억
    승객들로부터는 천대받지만 차장들은 감상 가득한 사춘기 어린 소녀들이었다. 안숙도 그랬다. 교복 입은 고학생이 물건을 팔고 내릴 때면 안숙은 가끔 차비를 받지 않았다. 어떤 남학생은 꼭 안숙이 탄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더니 회수권과 연애 쪽지를 쥐여주고 달아나곤 했다. 안숙도 그랬고, 차장 동생 선희도 그랬다. 선희를 쫓아다니던 남학생은 선희가 차장을 그만둘 때까지 쫓아다녔다. 키가 허리춤만 한 국민학생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누나 누구야?" 하고 바라보면 안숙은 승강구 계단에 아이를 앉히고 자기는 좁은 발판에 두 발을 모으곤 했다. 그러다 열 장 묶음 회수권을 열한 장으로 교묘하게 잘라 낸 고등학생이 걸리면 그때는 언니고 누나고 다 필요 없었다. 그 유치한 장난에 혼나는 건 차장이니까.
    소설가 송기원은 기억한다. 1960년대 후반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와 함께 또래 여자애들과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재수생이라던 그녀들과 늦은 밤까지 술집도 가고 재미나게 놀았다. 그러다 버스를 함께 탔는데 자기 짝이 무심코 차장한테 말하더라고 했다. " 얘, 옥자야, 저분 표 받지 마." 그 뒤로 송기원은 그녀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들은 여자고, 언니고, 누나였다.
    ㆍ대통령 친서 한 장에
    1977년 1월 부산 버스 회사 합숙소에 불이 났다. 입구 쪽 난로에 붙은 불이 번졌다. 뒤쪽에 큰 창문이 있었지만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돈 빼돌리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여차장 다섯 명이 죽었다. "차장들 불쌍하다"는 말이 모두에게서 나왔다. 이듬해 초, 대통령이 "버스 안내양 처우를 개선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화들짝 놀란 서울시가 91개 업체를 몽땅 조사했다. 16개 업체는 합숙소에 난방시설 자체가 없었다. 두 군데는 비가 샜고, 스무 군데는 큰 방 하나에서 76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대통령 말도 무용지물이었다. 두 달 뒤 부산 버스업체들이 여차장들 호주머니를 미싱으로 박아버렸다. 또 회사끼리 삥땅 파파라치를 운영해 다른 회사 버스를 타고 승객 수를 셌다. 현상금은 5000원이었다. 대통령이"종업원 후생복지 향상에 앞장서 줘서 감사하다"고 격려 친서를 보냈다. 버스 회사들은 행간에 숨은 무시무시한 경고를 직감했다. 열흘 뒤 여차장 월급이 33% 전격 인상됐다. 임금 인상은 전국으로 파급됐다.
    ㆍ찬송가를 부르며 견뎌낸 노동
    안숙은 바로 그해 차장이 됐다. 차장들 말로, '문짝을 잡았다'. 씩씩하게 일하리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남자들은 가슴을 건드리고 내렸고, 항의하면 욕을 했다. 도저히 더 태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안숙은 "저기 다음 버스 온다"고 거짓말하고"오라이~!"를 외쳤다. 손잡이를 쥔 팔이 끊어질 것 같은 때면 급커브를 틀어주지 않는 모범 기사들이 미웠다. 차장들에게 담배며 토큰 상납을 요구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어쩌다 졸다가 버스에서 떨어지면 무릎에 난 생채기는 빨간약 대충 바르고, 구멍 난 옷은 자기 전에 꿰맸다. 욕먹기도 싫었고 욕하기도 싫었다. 자존심에 상처받기는 정말 싫었다. 35원 안 내겠다고 거들먹대다가 만원짜리 지폐를 내는 관리들에게 안숙은 꼬박꼬박 10원짜리로 잔돈을 거슬러줬다. 속으로는 통쾌했지만 종점에 가서는 회사에 싹싹 빌어야 했다. 대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목돈 200만원 모아 소 두 마리 사서 엄마한테 선물했다. 두 동생은 "너희는 우리 집 기둥이다"고 설득해 전문대까지 보냈다. 훗날 남동생들이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안숙이 물었다. "아직도 딸이 싫으시냐. 미안하지도 않으시냐"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다 미안하다. 잘살거라." 그때 안숙은 울면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ㆍ1989년, 마지막 여차장들
    1984년 인금란이 김포교통에 교양 선생님으로 왔다. 말 그대로 어린 여자들에게 교양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중학교 교사였던 인금란은 학교보다 넓은 교육을 꿈꾸며 안내양들을 가르쳤다. 한강도 하루에 몇 번씩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니!" 스물여덟 살 난 물정 모르는 처녀 선생한테 차장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는 한강 건널 때면 그냥 빠져 죽고 싶어요." 아침에 합숙소 바닥 대걸레질을 하는 아이들 입에서는 김수희의 노래가 반복됐다.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 낭만 속에 갇혀 있던 처녀 선생은 어린 차장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그해 정부가 결정적인 조치를 내렸다. '시민자율버스'. 승객이 토큰통에 직접 요금을 넣게 됐다. 아예 안내양을 없애기로 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자율버스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지하철이 일상화되면서 버스 승객도 줄었다. 여자들 일자리가 늘면서 차장이 되려는 시골 아이도 줄어들었다. 세상은 더 이상 버스 안내양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1985년 가을, 최고참 안내양인 '1호 언니' 안숙이 버스 회사를 떠났다. 만 7년 동안 문짝을 두드린 세월이었다. 4년이 지난 1989년 4월 20일, 교양 선생 금란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내가 결혼 욕심에 너희와 더 있을 수가 없구나." 밤새 합숙소에서 회의를 한 안내양들은 이튿날 회사에 집단으로 사표를 냈다. 김포교통은 '안내양이 없습니다'라고 버스에 써 붙였다. 대한민국에 마지막 남았던 버스 안내양 38명은 그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30일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안내원 승무 의무 조항이 삭제됐다. 여차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극적으로 실종된 직업군이 되었다. 송안숙은 남편과 함께 재활용품상을 하고 있다. 인금란은 지금 목사다.
    재회한 버스 안내양 송안숙(오른쪽)과 교양 선생 인금란. 지금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박종인 기자

    ㆍ송안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부르기가 싫었습니다. 울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이 큰 고생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실 때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가끔 아이들 타이를 때 아버지 말씀 그대로 읊는 저 자신을 보고 놀라기도 합니다. 술 따르고 웃음 팔며 쉽게 돈 벌 직업 택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창피하고 우스운 직업이라고 손가락질도 당했지만 부끄럼 없이 살았습니다. 지금도 넉넉하지는 못합니다. 차장 생활 숨기고 사는 분이 훨씬 더 많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어찌 됐든 한 시대 한 분야를 맡아서 사회를 굴러가게 했으니까요. 다들 힘들었죠? 우리는 조금 더 힘들었습니다.
    Chosun ☜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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