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나봄 명상예술학교’ 운영 이기와 시인

浮萍草 2015. 5. 20. 23:00
    “유년기 풀 뜯어먹을 만큼 결핍·상처… 이젠 ‘명상 힐링’ 전파”
    시인 이기와(47) 씨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서울 서대문 판자촌에서 해녀의 딸로 태어났다”고 시작하는 인물 소개가 나온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해 어렸을 때부터 들판에 버려진 벌레 먹은 배추 잎사귀를 주워 먹고, 풀을 뜯어 먹었다. 시장에서 서리하다 된통 맞기도 했고 가난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살아남기 위해 남자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아버지라 불렀던 사람이 여럿인 사연도 있다. 서리하고 붙잡히지 않기 위해 달밤 둑길을 뛰며 악착같이 달리기를 연습해 뜻하지 않은 학교 육상 대표도 했다. 중국집 점원,봉제공장 직공을 전전하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악바리가 그다. 술장사를 하며 담배 냄새 찌든 술판이 끝난 뒤 적막함을 견디기가 힘들어 시를 쓰기 시작,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 이기와는 어둡고 질펀한 공장 여성,성매매 여성의 아픔을 격정적인 언어로 적나라하게 토해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그가 최근 ‘자기 평정’을 찾는 명상가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강원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 폐교를 리모델링한‘나봄 명상예술학교’에서 7일 그를 만났다. 누군가에 의해 버려졌다 이 씨를 만나 새로운 삶을 찾은 강아지'보미'가 함께 살아가는 토끼들과 마당에서부터 반겼다.
    7일 강원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 ‘나봄 명상예술학교’ 숲 속 평상 위에서 시인 이기와 씨가 명상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이굽이 산길을 따라 도착하다 보니, 두메산골에 들어온 이유가 궁금했다. “경기 김포시 한 전원주택에서 살았어요.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이것저것 장사로 모은 돈으로 2001년쯤 집을 샀죠. 계절마다 꽃 심고, 손님 오면 정원에서 평상 펴놓고 밥 먹고…. 꿈이 실현된 거죠. 너무 가난하게 살다 보니 초인종 있는 집이 무척 부러웠거든요. 그런데 한 5년쯤 지나서인가,가뭄이 심해 인근 주민들은 물 길어다 작물에 간신히 주고 있는데 마당 잔디밭에 물 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사치라는 것을 깨달았죠. ‘아,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나한테 동정표를 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접었습니다. 사회에 도움도 안 되고.” ―왜 하필 화천이었습니까.
    “김포 생활이 사치란 사실을 느낀 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미혼모 여성 쉼터나 아이들 입양해 키우면서 사회복지시설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전국에 땅을 보러 1년은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2006년 12월쯤 추운 겨울 눈발이 막 날리던 날 여기서 조금 떨어진 화천 간동면 용호리에 왔는데,산꼭대기쯤 앉아서 펼쳐져 보이는 능선이 참 푸근한 느낌이 들더군요. 곧바로 계약했어요.” 이 씨는 이곳에다 사회적기업 형태로 ‘나봄 명상예술원’을 추진하고 있다. 용호리 일대 2만 평 부지에 투자하고 입주할 사람들을 모아 재능기부로 서로 교류하고,힐링푸드 등을 공동 생산하는 형태의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명상예술원 사업 가운데 하나인 ‘나봄 명상예술학교’는 3년 전부터 문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왜 여성 쉼터 같은 복지시설을 생각하다 명상마을로 바꾼 겁니까.
    “그 사이에 책을 하나 썼는데 ‘비구니 산사 가는 길’입니다. 그 책이 제 삶에 큰 정신적 변화를 일으켰어요. 책을 쓰면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됐죠. 불교의 배경과 철학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종교로서의 의미라기보다 자연학이자 철학이고, 인문학이자 인식론인 불교를 알게 됐죠. 그런 게 좋아서 명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도시민들이 귀촌이나 귀농을 많이 하지만,명상을 테마로 한 마을을 통해 평정을 얻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명상마을을 계획하게 됐죠.” 이기와 시인은 최근 ‘나봄’이란 책을 냈다. ‘나를 바라봄’이란 뜻이다. 그는 2007년 인도를 찾아 순례기행을 다녀온 뒤 2008년 수행을 위해 인도로 다시 건너갔다. 인도 남갈 사원에서 달라이 라마 수행법을 배웠고 인도 타시종마을 캄바갈 사원과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 등에서 수행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펴낸 명상시집이 ‘나봄’이다. ―유년시절 굉장히 가난했다면서요.
    “집에 된장, 고추장도 없었죠. 소금만 있었습니다. 배고프면 밖으로 나가서 풀을 뜯어 먹는데 밭에 작물을 길러 추수하고 나면 찌꺼기가 남아요. 배추 수확한 데서 벌레 먹은 이파리를 주워 김치를 해먹었죠. 고춧가루도 비싸서 소금으로만 해서 김치로 먹었어요. 주변에 당근밭이 있었는데, 그것도 찌꺼기를 주워서 물 넣고 쪄서 먹으며 살았죠.” 그는 배곯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다른 집들은 부모가 일하고 돌아오면서 봉지 쌀을 사오곤 했는데,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끼니는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왔어요. 시장에 가서 버려진 튀김옷 같은 걸 주워 먹고,쓰레기통 뒤져서 먹을 만한 것 주워 먹기도 했죠.” 어려운 가정 형편에 입을 덜고자 3남매는 떨어져 살았다. 여섯 살 많은 큰 언니는 일찌감치 남의 집 식모로 가서 살았고 세 살 위 오빠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집의 양자로 보내졌다. ―왜 그렇게 어려웠나요.
    “제 어머니가 애를 못 낳는다며 소박을 맞고 상경해요. 열 아홉 살이었죠. 나중에 우리 낳았으니 엄마 문제가 아니라 당시 남편이 문제였던 거지만…. 외지에서 혼자 살다 실향민인 아버지를 만났어요. 엄마는 임신했고 애를 낳았죠. 돈도, 먹을 것도 없는, 몸만 있는 사람과 만나 판자촌 생활을 시작했던 거예요.” 그의 인생 첫 기억은 다리 밑 어딘가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5∼6세 무렵, 위는 다리고 밑에는 개울이 흘렀어요.서대문 굴레방다리였던 것 같아요. 엄마가 국수를 삶고 난 저쪽에서 오줌을 누고 있었죠. 그때 ‘내가 이 물에다 오줌 싸고 똥 싸는데 엄마는 왜 저 물로 국수를 삶고 있지’ 이런 생각을 한 게 기억 속에 깊게 박힌 것 같아요.” 음식을 훔쳐 먹다 걸렸던 경험이 이 씨의 재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 사건도 있었다. 그는“시장에서 친구들하고 돌아다니다 음식을 훔쳐 먹는데, 매번 나만 걸리는 거예요. 여럿이 사방으로 도망가는데도 저만 걸려 혼나다 보니 밝은 달밤에 둑을 뛰면서 도망치는 연습을 했어요. 맹훈련 덕인지 나중엔 학교 대표 육상선수도 했어요. 하하.” 초등학교는 2학년 때 그만뒀다. 새아버지가 돈을 벌어 오라고 성화하는 통에 유리공장,봉제공장 등을 다니며 일했다. 그러다 한 공장을 운영하는 집 식모로 보내졌다. 열 살짜리 이 씨가 그 집 아이들을 돌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까지 해야 했지만 그래도 밥은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의 집 눈칫밥이 서러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가끔 찾아올 때마다 데려가 달라 떼쓰다가도 자기가 돌아가면 입 하나 늘어 엄마 고생하겠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기 일쑤였다. “하루는 총각김치가 익어 기름에 볶으면 그렇게 맛있는데 그걸 자기 집 애들만 주고 절 못 먹게 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솟는 듯하다. 그는 생부 외에 4명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때 아버지였던 남자에게 왼쪽 눈을 맞아 피고름이 찬 것을 그대로 뒀다가 지금은 한쪽 눈이 실명된 상태다. 핍박받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초등학교 6학년 나이 때 4학년으로 학교에 다시 갔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은행에 들어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꿈을 꾸지만 중2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수석으로 상업고등학교 입학은 했지만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도 신문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다. 그러다 기타 연주자인 남편을 만나 19세 때 딸을 낳았다. 이 씨는 “중·고등학교 때 내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부모 없이 자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잘 안되더군요. 남편이 생활력이 없었어요. 그러다 남편은 안 들어오기 시작했고 혼자서 미용기술 배워서 애 업고 ‘야매’(비합법적인 방법)로 사람들 머리를 해 주며 살았죠.” ―‘화곡동 황진이’로 불렸다던데요.
    “힘든 역경을 이긴 시인이라고 해서 방송 다큐멘터리로 소개될 때 ‘화곡동 황진이’로 소개됐어요. 포장마차하고 이러 저래 돈 모아 카페나 단란주점을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렇게 불렸죠.” 이 씨는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역경 속에서 시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시인이 된 것이다. ―시를 쓰시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카페 장사가 파장하면 적막하고 공허해요. 카페 생활이 상당히 어두운 측면이 많아 더 밝은, 빛이 되는 것을 잡으려 했던 것 같아요. 더 건강하고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순수한 것을. 그것이 시였고 그것으로 나를 씻어냈죠. 파장하고 난 뒤 적막함을 달래려 두벌식 타자기로 시를 썼어요. 시인을 만나 글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디 가면 시인을 만날 수 있나 찾다가 대학에 가면 시인이 있다고 해서 한양여대 문예창작과에 가게 됐죠.” ―2007년에 낸 시집 ‘그녀들 비탈에 서다’에 보면 같은 이름의 시에 ‘성매매특별법 시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2006년 ‘비구니 산사 가는 길’을 통해 인생 전환점을 맞았다면서도 여전히 고통받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애잔함의 흔적이 있어요. “그때가 과도기였던 것 같아요. 명상에서는 ‘업장소멸’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상처를 털어내는 시간이 필요해요.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 공부를 못한 것 등에 이유를 갖다 붙이는데 자신이 상처받고 결핍이 있던 것을 털어내면 그것에 발목 잡히지 않아요. 첫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때 많이 털어냈는데,‘그녀들 비탈에 서다’ 때도 남아 있었죠. 하지만 명상에 대한 것, 마음 바라보는 것에 대한 글도 절반 정도 담겼어요.” 1997년 시인으로 등단한 뒤 한 대학 강단에도 섰다. 심지어 모교인 한양여대에서는‘문예창작과 등단 1호’인 이 씨에게 강의를 맡기려 했지만 거절했다. 이 씨는 “집착하게 될 것 같더군요. 어려움이 많았던 사람들은 집착도 크죠. 그래서 어렵지만, 강의 제안을 거절했어요.” 시인 이기와의 인생을 감히 표현하면 물을 닮았다. 넘치고 채우는 물처럼 배고픔,학문에 대한 열망,사랑 등 부족한 것을 채우려 노력했고, 채워진 것이 넘치게 되면 김포 전원생활, 대학 강단 제의 등을 과감히 사양했던 그였기에 그렇다. 그는 이제는 고요한 수면처럼 자기 평정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씨의 앞으로의 인생 스토리가 더 궁금해진다.
    Munhwa ☜     장석범 문화일보 사회부 기자 bu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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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와 시인이 말하는 명상법… 바로앉아 생각 멈춘 뒤 들숨·날숨에 의식 집중
    인 이기와(47) 씨가 강원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 한 폐교를 리모델링해 운영하는 ‘나봄 명상예술학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게 마음치유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인근 군부대 장병들의 힐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이 씨는 소개했다. 
    이 씨는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장애, 언어발달장애나 자폐증 등의 어린이에게 명상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성인들은 만성 피로감이나 스트레스, 분노조절 장애 등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명상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했다. 
    이 씨는 “명상예술학교에서는 현재의 삶을 성찰해 보고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는지 함께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명상 예찬론을 펴는 이 씨에게 과연 명상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갑자기 유리잔을 들어 노란 빛깔의 여주차를 따랐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주입한 여러 생각, 제도 같은 것들 때문에 본디 있던 것과 달리 색깔이 생겨요. 
    그런 데다 계속 생각을 하다 보면 유리컵 안의 물처럼 마구 흔들리죠.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어요. 
    그래서 ‘자기 평정’을 얻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것, 이게 명상이에요.”
    간단한 명상법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호흡 바라보기’라는 명상법을 일러준다. 
    일단 허리를 바로 세우고 자세를 잡고 앉는다. 
    명상을 위해서는 잡생각을 멈춰야 한단다. 
    눈을 지그시 감고 코로 숨을 자연스럽게 쉬면서 호흡이 들고 나는 것에 집중한다. 
    의식을 코 주변에 두고, 꾸준히 숨의 드나듦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씨는 한 시간 이렇게 집중할 수 있다면 얼굴빛, 걸음걸이가 달라지면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씨는 “수행자들이 몰입된 상태에서 뇌파를 검사하면 알파파가 형성됩니다. 
    아주 지극히 고요하고도 명징한 상태인데 이때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해요. 
    이 단계에 들면 원래 가지고 있던 행복감이 느껴지고,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고 말했다. 
    
    Munhwa ☜     장석범 문화일보 사회부 기자 bu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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