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제작자와 결혼했는데 공주커녕 무수리 대접”

浮萍草 2015. 1. 21. 22:16
    고은아 서울극장 대표는 여전히 여배우 시절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염색을 하지 않은 회색 머리로 다니는 그는“겉모습이나 생활 방식 모두 세월 가는 대로 따라
    가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김동훈 기자 dhk@

    ㆍ1960년대 톱 여배우 고은아 서울극장 대표
    “어제를 발판으로 오늘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세월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죠” 지난 1965년 영화 ‘난의 비가’(감독 정진우)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 고은아(69·본명 이경희) 서울극장 대표는“얼떨결에 배우의 길로 들어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됐지만 후회는 안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당시 홍익대 공예과에 다니던 고 대표는 우연히 영화사 조감독에게 발탁돼 이 영화에 출연했다. “대학 1학년 때 학교 조교를 통해 저를 알게 된 정진우 감독의 조감독이 수업시간에 강의실 밖에서 저를 보고 집에까지 찾아왔어요. 어머니께서 배우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거절을 하기 위해 영화사에 갔다가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 하는 건데 어떠냐. 옷도 다 만들어준다’는 말에 설득당해 출연하게 됐죠.” 영화사에서는 신인인 그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국제복장학원 원장님께 부탁해 제가 입을 의상을 만들어줬고, 명동 한복판에 영화 선전 간판도 세웠어요. 그 영화 촬영을 끝내고 그만하려 했는데 영화사에서 ‘돈을 많이 들였으니 한 작품만 더하자’고 해서 계속 배우로 살게 됐어요. 제 팔자였는지 그렇게 끌려왔어요.” 배우가 된 고 대표는 대학을 중퇴했다. 촬영 때문에 수업을 자주 빠져야 했고 특히 실기를 해야 하는 학과라 학교에서 이해해주지 않으면 다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과 배우 이승룡, 오영일 등이 우리 학교 학생이었는데 저까지 배우로 데뷔하자 학교가 발칵 뒤집혔어요. 연극영화과도 아니고, 그림을 그려야 학점이 나오기 때문에 배우 활동을 하며 다닐 수 없는 상황이어서 포기했죠. 뭐 제가 대학을 계속 다녔어도 지금 엉뚱하게 다른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웃음). 지나보니 모든 삶이 다 연결돼 있더라고요. 친구를 만나러 화실에 갔다가 목탄 데생을 하며 빵으로 지우는 게 멋있어 보여 계획에도 없던 미대에 진학했고, 미대에 갔기 때문에 배우가 된 거잖아요.” 고 대표는 이후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발돋움했지만 1967년 영화 제작자인 곽정환 합동영화사 회장(2013년 별세)과 결혼하며 연기하기가 힘들어졌다고 밝혔다. 제작자의 부인으로 융숭한 대우를 받았을 것 같지만 그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고 소개했다. “결혼 전에는 ‘공주’였는데 결혼 후‘무수리’가 됐어요(웃음). 아무래도 결혼 후에는 합동영화사 작품에 많이 출연했는데 현장이 항상 다른 배우 위주로 돌아갔어요. ‘주연 배우’가 아닌 ‘제작자 부인’으로 희생을 해야 했죠.” 그러면서 고 대표는 점차 영화와 멀어졌고, 1970년부터는 영화와 TV 드라마를 병행했다. 20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그는 1989∼1990년 방송된 MBC 드라마 ‘제2공화국’을 끝으로 연기를 접었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영화 촬영이 너무 불규칙하게 진행돼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제가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더라고요. 밤낮없이 촬영하고 지방 촬영도 많았거든요. 하지만 드라마는 아침에 촬영을 시작해 밤 12시 전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어서 좋았어요. 또 제가 부산 출신이라 사투리를 썼는데 ‘이 기회에 억양을 고쳐보자’는 생각도 했고요. 영화는 성우가 더빙을 해줘서 제 목소리가 안 나왔지만 드라마는 대사를 직접 해야 했거든요.” 고 대표는 ‘제2공화국’에서 육영수 여사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 연출자인 고석만(현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PD가 ‘육 여사와 목선이 닮았고 한복이 잘 어울린다’며 고 대표에게 간곡히 출연을 제의했다. “사실 1980년 기독교방송(CBS)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시작하며 이미 연기를 접었어요. 그러다 MBC 신입일 때부터 알던 고 PD가 부탁해 다시 나서게 된 거죠. 육 여사님은 제가 앙드레김 모델로 패션쇼에 출연했을 때 한 번 뵌 적이 있어요.” 그는 자신의 영화 출연작 중 ‘갯마을’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데뷔작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청순한 여인을 연기한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출연작인 이 영화에서는 관능미를 선보이며 청상과부의 복잡한 운명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는 평을 받았다. “제가 배우가 된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두 번째 출연작인 ‘갯마을’에서 청상과부 역할을 맡은 건 천지개벽할 일이었어요. 연애 한번 안 해본 스무 살 처녀가 두 번 과부가 되는 연기를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그것도 첫 남편은 물에서 죽고, 두 번째 남편은 산에서 죽었으니…(웃음). 그래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곽 회장은 1987년 고 대표와의 결혼 20주년을 맞아 부인의 고향인 부산에 부인의 이름을 딴 은아극장(부산진구 부전동)을 마련해줬고 그때부터 고 대표는 극장 경영 인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때 종교영화를 제작하는 은아필름도 설립했는데 1994년 ‘무거운 새’를 만든 후 후속작 제작을 못하고 있어요. 은아극장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밀려 문을 닫았고요.” 1997년부터는 합동영화사와 서울극장 대표직도 맡은 고 대표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인연이 깊다. 고 대표의 아버지는 서울 서대문 동양극장을 운영하는 극장업주였다. “아버지가 6·25전쟁 이후 서울에 와서 극장 사업을 하셨는데 저는 동양극장에 딱 두 번 가봤어요. 한 번은 고등학교 방학 때 서울에 와서 갔었고 또 한 번은 아버지 장례식 때였죠. 극장에서 번 돈으로 밥을 먹었고 그러다 배우가 됐고, 이제는 극장과 영화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영화가 제 인생의 전부인 셈이에요.” 그는 지난해 부활절을 맞아 ‘기독교 영화 기획전’을 열었고 가을에는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추억의 영화 기획전도 개최했다. “대기업 멀티플렉스 체인에 밀려 토종 극장들이 숨조차 쉴 수 없게 됐어요. 그러면서 영화의 메카였던 종로3가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고요. 옛 관객들과 다시 소통하고 싶은 생각에 기독교 문화를 알리는 기획전과 추억의 영화를 다시 보는 자리를 마련하게 됐어요. 두 기획전은 매년 열 계획이에요. 제 아들(곽승남 서울극장 부사장)이 잘 해주겠죠.” 고 대표에게 ‘화려했던 시절이 그립지 않으냐’고 묻자 “내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깔려 있을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 ‘연기를 다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까봐 영화를 자주 안 봐요. 오랜만에 다시 나와 성공한 배우를 못 봤거든요. 영화인들과도 잘 안 만나고요. 자주 보는 사람은 30년 동안 같은 교회에 다닌 신영균 씨밖에 없어요. 만나서 밥도 먹고, 속상한 일을 털어놓기도 해요.” 올해 일흔이 된 그는 아직도 여배우 시절 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 대표에게 ‘여전히 아름다우시다’고 말하자 손사래를 치면서도 환한 웃음을 보였다. “겉모습을 꾸미는 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 나이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려 보이는 건 괜찮지만 열 살,스무 살 젊어 보이기 위해 애쓰면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드러나죠. 제 언니들은 제가 염색을 안 하고 회색 머리로 다니는 걸 싫어해요. 하지만 저는 겉모습이나 생활 방식 모두 세월 가는 대로 따라가는 걸 좋아해요.”
    Munhwa ☜      인터뷰 = 김구철 문화부장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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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아 대표의 ‘나눔’… 2003년부터 행복한나눔 이사장 활동
    최근엔 커피 공정무역도
    고은아 대표는“혹시 ‘연기를 다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까봐 영화를 자주 안 본다”고 밝혔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인연이 깊다.아버지가 극장업주였던
    그는“극장에서 번 돈으로 밥을 먹었고,그러다 배우가 됐고,이제는 극장과 영화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영화가 내 인생의 전부인 셈”이라고 말했다.
    은아 대표는 지난 2003년부터 재단법인 행복한나눔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사회적기업인 행복한나눔에서는 기부받은 중고물품을 판매해 저소득층 사람들을 돕고 전 세계 재난지역에 구호물품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정무역에도 참여해 멕시코 커피 농장에서 재배한 원두를 수입하고 있다. 고 대표는 이 재단 일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기독교방송(CBS) 라디오 진행을 하며 행복한나눔의 모체인 기아대책을 많이 다뤘다. 그러다 기아대책으로부터 생명창고 이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며“몇 차례 거절하다 ‘나누는 일인데…’ 하는 생각에 수락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생명창고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헌혈하는 곳으로 알더라. 무거운 느낌이 들어서 행복한나눔으로 재단 명칭을 변경했다”고 덧붙였다. 고 대표는 또 “재단 직원들이 내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단이 하는 일을 알리길 원한다. 하지만 현업에 있는 사람이 나가야 효과가 있지 내가 나가봐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지금은 개그우먼 박미선 씨가 대표를 맡아 홈쇼핑에 나가 물건을 잘 팔고 있다(웃음)”고 설명했다. 그는 재단 일을 하면서 절제하는 삶을 살게 됐다고 밝혔다. 고 대표는“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나눔의 생활화’다. 자신이 안 쓰는 물건을 기부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며“지난 십여 년 동안 이 일을 하며 과욕이 없어졌고, 절제하는 습관이 들었다. 돈을 쓰려다가도 ‘이 돈이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라는 생각에 다시 지갑을 넣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상이 점점 각박해진다. ‘나’를 지키려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갑질’을 하게 되는 것”이라며“70이 되니 햇볕만 비치는 게 아닌 비도 오고 태풍도 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햇볕만 있는 곳은 사막이 되지 않나”라고 강조했다.
    Munhwa ☜      인터뷰 = 김구철 문화부장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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