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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탈영실정 (2)

浮萍草 2015. 5. 7. 09:57
    연산군 적거지 사진./조선일보DB
    선 왕조의 폭군으로 첫손 꼽히는 연산군이 빨리 죽은 것은 ‘탈영(脫營)’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창 때인 31세에 반정을 당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는데, 그래도 처형되지는 않고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딸린 섬인 교동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가장 고귀하던 사람이 갑자기 궁궐에서 쫓겨나 외딴 섬의 허름한 집에서 허접한 음식을 먹으며 지내게 된데다 그것도 탱자나무나 가시울타리가 집주변에 둘러쳐져 있어 거주를 제한하고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상태였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형편이었죠. 게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는 등의 과도한 성생활과 음주를 계속 했었기에 이미 몸 상태가 엉망이었으니 회복될 수 없는 중병이 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31세였지만 몸도 마음도 면역기능도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라고 봐야겠죠. 그러다 폐세자가 된 아들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프기 시작해서 식음을 전폐하더니 역질(疫疾 :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연산군은 몹시 괴로워하며 물도 마시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눈도 뜨지 못하다가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ㆍ탈영과 비슷한 ‘실정(失精)’
    실정이란 역시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물질인 ‘정(精)’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인데 재력이 풍족하던 사람이 재산을 탕진하든가 졸지에 손재를 당하고 가난해져서 생긴 것입니다. 동의보감에 ‘탈영실정’으로 함께 나옵니다. 탈영은 권세가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이 권세를 박탈당했을 때 오는 우울증이고 실정은 부자가 갑자기 망하여 재물을 잃었을 때 슬퍼서 비관해서 생긴 마음병으로 보면 되겠죠. 그래서 좌절에 빠져서 음식 맛도 없고 기운이 없으며 자주 드러누우려고만 하고 밖으로 외출하기도 싫으며 남과 대화하기도 귀찮아하게 되지요. 요즘으로 보면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거나 주식투자에서 실패하여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린 경우에 생긴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회사에서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50대 나이에 회사가 파산하거나 혹은 조기퇴직, 명예퇴직 등으로 실직하게 된 경우도 포함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경우에 상실감과 허무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죠. 그 때문에 비관을 하다가 끝내는 지병을 얻어 드러눕거나 아니면 1-2년 사이에 부쩍 늙어 버리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사실 조기퇴직이나 명예퇴직을 하신 분 중에는 남성 갱년기장애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여성분들 중에 재산상의 손실로 마음병을 얻은 분도 적지 않고, 여성 갱년기장애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요.
    ㆍ왕위에서 쫓겨났지만 오래 살았던 광해군
    광해군 제주 적소 비석 사진./조선일보DB

    당연히 예외도 있습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지만 18년이나 더 살아서 67세에 사망했습니다. 광해군 일가는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는데 광해군 부부는 동문 쪽에,폐세자 부부는 서문 쪽에 각각 안치되었습니다. 2개월 뒤에 폐세자는 담 밑에 구멍을 뚫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사약을 받아 죽었고 세자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게다가 왕비였던 유씨부인도 화병(火病)을 얻어 고생하다가 1년 반쯤 뒤에 사망했지만 광해군은 오래 살았던 겁니다. 영창대군을 잃고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죽이려 하였고 인조의 측근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껴 몇 번이나 죽이려고 시도하였지만 이원익 대감의 반대와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중들고 경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해서 살아갔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배에 실어 충남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고,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교동도로 보냈다가 다음 해에 후금에 항복한 뒤에는 제주도로 내려 보냈습니다.
    ㆍ광해군이 오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광해군은 당시로선 절해고도였던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멸시해도 전혀 분노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습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목숨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 아니면 긴 세월 동안 다시 기회가 주어져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는지 모를 일입니다. 유배된 지 18년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는데 죽기 전에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의 공빈 김씨의 묘 아래쪽 오른편에 묻어주었습니다.
    Premium Chosun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kyjjc19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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