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과학 이야기

34 엉터리 석학이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사회

浮萍草 2015. 3. 23. 10:31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초대 루카스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의 저서.
    학이 사회적으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사회적‧도덕적 논란에 휩쓸린 전직 국회의장을 석좌교수로 다시 임용하겠다고 나섰던 대학이 학생들의 격렬한 항의에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강의를 하지도 않고 보수도 없는 명예직일 뿐 아니라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대학의 변명은 옹색하다. 전관예우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이제는 퇴임하는 대법관은 법학대학원의 석좌교수로 가는 새로운 관행이 생겼다는 보도도 있었다. 실제로 변호사 개업 문제로 변호사 단체와 논란을 벌이고 있는 전직 대법관도 석좌교수라고 한다. 대학의 무분별한 석좌교수 임용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ㆍ‘큰 학자’에게 주어지는 명예
    세계적으로 석좌교수는 학문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석학(碩學·큰 학자)으로 인정된 학자에게 대학이 제공해주는 최고의 명예다. 전통적인 석좌교수는 대학‧기업‧개인의 출연금에 의해 운영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루카스 석좌교수가 대표적인 경우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이사였던 헨리 루카스가 출연한 토지를 기반으로 1663년에 만들어져 이듬해에 찰스 2세 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유서 깊은 석좌교수직이다.
    근대 과학 혁명의 주역이었던 아이작 뉴턴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루카스 석좌교수를 역임했던 인물들의 목록은 지난 350년 동안 인류 문명의 핵심으로 성장한 현대 자연과학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그야말로 역사적 사명감으로 석좌교수의 전통을 지켜왔다는 뜻이다. 우리의 석좌교수는 세계적인 전통과는 전혀 다르다. 1985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처음 도입되었지만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 대학의 석좌교수 제도는 위험천만할 정도로 변질된 것이다. 제대로 된 기금을 확보한 경우도 드물고 후보자의 자격을 심사하고 임용하는 확실한 절차를 마련한 대학도 드물다. 대학의 운영자가 분명한 절차나 큰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석좌교수가 정년보장이 아니라 1년 임기의 임시직이다. 제대로 된 강의를 맡길 필요도 없고, 엄청난 보수를 챙겨줘야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석좌교수는 빛 좋은 ‘장그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학의 입장에서는 석좌교수 임용에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실제로 석좌교수는 전국의 대학이 운영하고 있는 80여 가지가 넘는 비정상적인 교수직 중 하나일 뿐이다.
    ㆍ 퇴임 고위직의 놀이터로 변질된 대학
    퇴임 고위직의 신분 세탁용 정거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캠퍼스.
    결국 우리 대학의 석좌교수는 석학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교수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석좌교수를 대학의 홍보와 재정 확보에 활용하겠다는 것이 대학의 솔직한 의도이고 심정이다. 석좌교수직을 수락하는 인사들도 그런 사정을 분명히 알고 있겠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직도 교수직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석좌교수 경력은 다른 자리로 갈아타기 전에 잠시 머물면서 신분을 세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된다. 공직을 마치는 입장에서도 아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달콤한 유혹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현재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좌교수 중 상당수가 학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정계‧관계‧재계 ‧언론계‧군의 고위직 출신이고, 절반 이상은 강의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위직에 있으면서 얻은 경륜을 대학 교육에 접목시켜 대학 교육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명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실제로 아무 인연도 없는 대학에 사명감이나 책임감도 없이 부임하는 석좌교수가 학생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도 많지 않다. 학교 입장에서는 언제 떠날 지조차 알 수 없는 불나방 같은 석좌교수에게 강의를 맡기기도 쉽지 않다. 학문이나 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전문성조차 갖추지 못한 석좌교수의 부실한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도 무시하기 어렵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퇴임한 고위직의 철 지난 회고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ㆍ아픈 청춘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엉터리 석학
    어쭙잖은 힐링을 앞세운 석학 강연td>
    종로통에서 큰 소리로 ‘사장님’을 부르면 앞서 가던 10명 중 7명이 뒤를 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70년대 초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창업 열기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우스갯소리였다. 그러나 하릴없이 저잣거리를 배회하던 어중이떠중이가 너나없이 모두 사장을 자처하던 당시 어설픈 현실을 비웃는 농담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석학’(碩學)이 그런 형편이다. 길거리에서 함부로 ‘석학’을 찾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70년대의 사장만큼은 아니지만 자천타천으로 스스로 석학의 반열에 올랐다고 착각하는 엉터리 석학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엉터리 석학의 활동 무대는 대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경기가 나빠지면서 방황하는 젊은이들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엉터리 석학들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아무 맥락도 없이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달콤한 궤변으로 가득 채워진 값싼 ‘길거리 인문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관심도 엉터리 석학에게 도움이 된다.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아픈 청춘’을 대상으로 어쭙잖은 ‘힐링’을 강조하는 ‘캠프’가 엉터리 석학의 산실이 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우리 사회의 인문학을 살려내기 위해 나섰다는 학자들의 모습도 안타깝다. 인문학이 위기에 빠진 이유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대중이 인문학을 외면한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인과(因果) 관계를 거꾸로 뒤집으면 온전한 치유책을 절대 찾을 수 없다. 스스로를 ‘석학’이라고 자처하는 인문학자들의 대중을 상대로 한 ‘석학강연’이 인문학 살리기에 도움이 될 수 없다. 대중을 상대로 늘어놓는 화려한 수사(修辭)는 덧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석학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친목 단체도 크게 믿을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진정한 학문적 발전을 통해 아픈 청춘들에게 진짜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진짜 석학을 가려내는 일은 온전하게 우리의 책임이다.
    Premium Chosun        이덕환 서강대 교수 duckhwan@sogang.ac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