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커플링 법칙

감정은 몸속 기관의 상호간 작용으로 나타난다

浮萍草 2015. 3. 13. 22:18
    당신 몸 속의 리(理)와 기(氣)
    2004년 6월24일 고(故) 이수현씨의 모교 부산 낙민초등학교에서 열린 제막식에서 학교 관계자가 이씨의 흉상에 꽃목걸이를 걸고 있다. / 조선일보 DB
    "감정이란 머리에서 지각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연인들이 사귀다가 헤어지게 됐다. 그러면 ⓵헤어지면 슬플 텐데 하는 뇌 속의 자각 ⓶가슴이 저리고 찢어질듯 아픈 느낌 ⓷눈에 이슬이 맺히고 ⓸나중에는 눈물이 쏟아진다. ⓵의 단계는 머릿속에서 지각적으로 느끼는 생각의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지 그것이 유기적인 연계성을 가지고 신경의 경로로 거쳐 신체로 전달되는 단계는 아니다. ⓶의 단계는 뇌의 지각을 신체적 변화로 느끼는 초기 단계요, ⓷과 ⓸는 본격적인 신체의 반응과 결론이다. ⓵의 단계는 실연했으니까 슬퍼져야 한다는 스스로의 지각 단계일 뿐 그 자체가 슬픔의 감정은 아니다. ⓶, ⓷, ⓸의 단계를 지나서 이슬이든지, 눈물이든지간에 슬픔의 신체적 표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그때서야 곧 체화된 감정이 완결단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⓵, ⓶, ⓷, ⓸단계는 그것이 곧 감정의 풍부함과 완성도를 말해주는 하나의 감성적 감기(感期)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병이 심해지는 정도에 따라 병기(病期)가 있듯이,즉 병의 단계가 있듯이 감정에도 느낌이 익어가는 정도에 따라 감기,즉 감정의 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허경구 ‘커플링법칙’ p.169) 위에서 보듯 감정이 느껴지는 단계는 그 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폭된다. 뇌에서 인지하는 단계에서는 신체 속의 관련 장부 하나하나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인지된 정보에 대한 가부와 호오와 승인여부를 몸이 표현하고자 할 때는 예외없이 관련 장부 하나하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 허락받는 징표는 그 감정을 표시하는데 필요한 호르몬의 분비일 수도 있고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일 수도 있고 신경조직에 울리는 경고음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건 ⓵단계에서는 그런 장부의 호응이 필요없을 수도 있지만 ⓶단계 ⓷단계, ⓸단계에서는 감정의 증폭에 따른 장부의 협조여부가 구체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감기(感期)가 고조되면 될수록 그것은 오장육부에서의 상응하는 반응을 수반하게 된다. 머릿속의 생각만으로는 기(氣)가 발한다고 할 수 없다. 오행 즉 목화토금수와 서로 상생과 상극작용을 통해 하나의 작동체계를 형성해야만 감정은 비로소 움직이게 된다. 즉 오행의 생극 작용을 통해 오장육부의 관련 장부가 그 생각에 호응하고 그 생각을 무르익게 하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해 주어야만 뇌에서의 생각은 몸의 생각으로 발현될 수가 있다. 몸속의 생각이 굳어져야 비로소 뇌의 생각이 완성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겠다. 2001년 일본 도쿄 지하철에서 우리나라의 이수현이란 청년이 지하철에 빠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하여 아무런 주저 없이 지하철 철로에 뛰어내려서 그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 생명을 잃게 되었다. 이 청년의 순간적인 자극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은 어디서 생긴 것이었을까?
    퇴계 이황(왼쪽)과 율곡 이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청년은 노상에서 노상강도에게 귀중품을 뺏긴 행인을 보았다면 그 노상강도가 칼을 들고 있었어도 그 노상강도와 일전을 불사했을는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강도의 어떤 감정적 자극이 있었을 때에도 이 청년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투척 했을는지도 모른다. 감정적 자극의 강도가 높든지 낮든지를 불문하고 모든 감정적 자극에 대해서 이 청년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반응하는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 때 이 청년은 쉽게 화를 낼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고 또는 걷잡을 수 없이 울분을 폭발시킬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시자승들에게 매일이면 매일마다 화를 내고 강퍅한 소리를 해대던 성철스님과 아주 겸손하고 유순하기 짝이 없던 구산스님 두 사람이 만약 대로상에서 여인을 폭행하는 무뢰한을 보았다고 치자! 이때 이 무뢰한에게 한마디라도 잘못을 지적하면서 덤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성철스님일까, 구산스님일까? 이수현 학생이라면 이런 경우 아마 절대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스님 중에서는 누가 나서서 그나마 시비라도 가려줄 것인가. 아니면 폭행을 당하고 있는 여인에게 보호의 손길을 뻗쳐줄 것인가.
    이 경우 성철스님이 나설 가능성이 구산스님보다는 더 많지 않을까. 자극에 대한 어떤 반응이 화로 나타나든 분노로 나타나든 욕설로 나타나든 폭행으로 나타나든 혹은 그 반대로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타나든 억지로 수용하는 쪽으로 나타나든 또는 마지못해 그에 굴복하는 쪽으로 나타나든 그 어느 경우에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체질유형이 시키는 경우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의로운 일에 쉽게 나갈 수 있는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그 반대로 겁이 많아 옳은 일을 보고도 그 일을 시정하는데 주저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수줍음을 잘 타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 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한 쪽 상황에서의 단점이 다른 상황에서의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둘째로 이렇게 서로 엇갈리는 성향이 하나의 인간 개체 속에서 모순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그 사람의 상황적 선택에 의할 경우보다 그 사람 본래의 기질적 체질모드식의 결과 때문에 나타나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사람 하나에 따라 윤리적 기준에 대한 몰입의 강도가 다를 수 있고 도덕적 표준에 대한 정서적 공감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런 까닭’과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칙’이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성철스님의 화가 그의 용기와 엄격함의 일면이라면 구산스님의 온순함 또는 비겁성은 그의 자상함과 자비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때 누가 하늘의 뜻을 더 따른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은 용감한데 화를 잘 내고 다른 사람은 유순한데 겁이 많은 이유는 바로 몸 속 작동체계의 모순성이 나타내는 ‘그런 까닭’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27회에서 얘기한 사실로 돌아가 보면 바로 이런 모순적인 장점과 단점의 공존이 바로 하늘이 정해준‘그런 까닭’이요 ‘마땅히 그래야하는 법칙’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그것이 바로 하늘이 준 리(理)요 기(氣)가 아니겠는가. 화를 내는데 퇴계가 얘기한 것처럼 리가 따로 있고 기가 따로 있다가 합쳐져서 나타난다기보다 똑같은 저장소에 리와 기가 공존하고 있다가 동시에 어느 순간 어느 계기를 만나 혼발(混發)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이것이 율곡의 입장이 아니던가. 그런데 앞으로 오행의 체질모드식을 더욱더 들여다볼수록 이런 퇴계의 입장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왜 새삼스럽게 퇴계와 율곡의 상반 된 주장을 다시 끄집어내야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본성의 시작으로 보았던 사단칠정이 사실은 퇴계율곡이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더 개명된 그리고 발달된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그 실상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퇴계와 율곡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음양오행의 과학적 함축성은 오늘날의 인간에게도 훨씬 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Premium Chosun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aronge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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