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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과 '마땅히 그래야하는' 법칙

浮萍草 2015. 1. 22. 11:54
    든 사물에는 각기 ‘그런 까닭(所以然之故)’과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칙(所當然之則)’이 있다고 한다. 
    성리학에서는 이것을 곧 리(理)라 한다. 
    중국의 주자(朱子)는 후자의 설명으로 임금은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공경 되어야 한다는 예로 들고 있으며 전자의 설명으로는 임금은 왜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왜 
    공경 되어야 하는가의 예로 들고 있다. 
    그런데 리의 본질에 관한 이런 설명에도 리는 이해되지 않는 개념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왜냐하면 임금이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공경 되어야 하는 것도 우주에 내재한 어떤 초월적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임금도 때로는 포악해질 수도 있고 인색해질 수도 
    있다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그 진실도 또한 우주적 진실의 한 단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하도 마찬가지다. 신하도 공경 되어야 하는 대상이지만 때로 혐오의 대상일 수도 있고 공격의 대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다 우주적 진실의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임금의 선이 우주적 리의 한 반영이듯이 임금의 악 또한 우주적 리의 다른 면의 한 반영이 아니겠느냐 하는 의문이다. 
    이런 질문은 우주의 리를 하나의 절대적 진리(Ultimate principle)로 간주하는 성리학의 기본전제에는 어긋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물음이 아닌 것은 율곡과 퇴계의 공발설과 각발설을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율곡은 사단이란 리의 발현에도 칠정의 어느 요소가 똑같이 섞이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인간심리로 발현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얘기해서 임금의 어진 측면인 인(仁)이 발현하려면 임금이 느끼는 측은지심이 발동되어야 하는데 이 측은지심에는 일정부분 분노란 기의 감정도 섞일 수 있고 
    좋고 싫음의 기란 감정도 섞일 수 있을 때에만 측은지심의 현실적 발현은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는 측은지심이 발동될 때에는 일정부분 성(性)이란 우주의 본연지성이 압도적 우위로 발동의 기미를 보이고 그리고 여기에 칠정의 한 부분인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받쳐주는 정도에서만 그 나름대로 발동 기미를 보이고 이 양자가 합쳐졌을 때 드디어 측은지심의 현실적 발현은 가능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상좌로 삼십여년간을 시봉생활을 했던 원택스님은 그 오랜 세월동안 성철스님으로부터 ‘직사게 욕먹고 쥐어터지게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도 도망갈 궁리를 안 해본 날이 없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성철스님은 주변의 시자나 다른 승려들에게 왜 그렇게 까다롭고 강퍅한 성질을 부리고 살았을까. 
    성철스님은 ‘이 밥 도둑놈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성철스님과 젊은 시절 해인사에서 강사로 같이 지낸 적이 있는 법정스님은 성철스님과 송광사 방장을 지낸 구산스님을 이렇게 비교해서 말하고 있다.
    “구산스님은 아침 공양이 끝나면 당신이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대중 앞에 나서서 손수 도량을 청소하시고… 
    대중 속에 가깝게 다가가시는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인 데 비해 성철스님은 참선 기도할 때 대중에게 밥값을 내라고 어깻죽지를 내리치면서 압박하고 윽박지르는 
    그런 호랑이 같은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이 두 스님의 행태를 비교해보면 완연히 차이가 난다. 
    한 사람은 자비롭고 너그럽고, 온화한 반면 다른 사람은 격하고 조급하고 무자비하다. 
    이 두 스님의 경우 성철스님 성정을 순연지성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기질지성의 폭발로 보아야 할까?
    임금이 어질어야 하고 또 신하들이 공경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주의 리(理)에 합당한 것이라면 구산스님의 그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도 분명히 우주의 리를 반영하는 
    행동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철스님의 그 괴팍한 언동은 우주의 어떤 이치를 반영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주의 리에 반역하는 행동일까? 성철스님의 그 행동은 율곡에게는 리기가 공발(共發)하고 동발(同發)하는 그 행위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성철스님의 그런 행동에도 분명히 다른 스님들의 수행을 돕고 원택스님의 말대로 깨달음의 경지를 빨리 가르쳐주고 싶다는 그 선의의 욕심도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분명히 퇴계의 리의 개념에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율곡의 리의 개념에는 분명히 포함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퇴계와 율곡의 입장은 분명히 다르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퇴계는 성인의 경지를 지향하는 그 마음가짐을 리로 보고 있고 율곡은 오욕칠정이 나타내는 그 다양한 감정의 파노라마와 스펙트럼의 정서적 
    좌표 속의 움직임을 기와 동시에 리로 보고 있다. 
    어떠한 감정의 격발에도 리는 포함되어 있고 어떠한 심리의 평정에도 기는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율곡의 입장처럼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결론은 간단하다고 본다. 
    율곡의 리와 기의 동시적, 공시적 그리고 통시적 공발이야말로 이론적 또는 경험적 측면에서 타당하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구산스님의 그 행동은 퇴계의 리에 합당한 행동으로 보인다. 
    다만 구산스님의 그 행동에도 일정부분 감정의 부정적 측면을 반영하는 감정도 얼마 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섞여 있을 것이다. 
    퇴계식으로 얘기하면 선한 행동은 다리에 해당하고 악한 행동은 다 기의 발동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Premium Chosun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aronge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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