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He 스토리

금호전기 박명구 회장의 '발명'

浮萍草 2015. 1. 14. 22:50
    회장보다 발명가로 불리는 게 좋다는 '형광등 회장님'
    - 젊은 날의 도전은 최고의 자산 30년전… 대학친구들과 함께 밤낮 안 가리고 납땜, 또 납땜 지하 단칸방서 '안정기' 개발… 세계 형광등 기술 표준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찾아 우리 20대가 꼭 도전해보길"
    세계 최초로 형광등에 쓰는 전자식 안정기를
    개발한 박명구 회장은‘장래가 유망한 발명가’로
    국내 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개표 형광등'으로 유명한 조명·디스플레이 전문 기업 금호전기의 경영을 맡고 있는 나는 지금도 경기도 화성에 있는 회사에 출근하면 집무실보다 연구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넓고 안락한 집무실보다는 각종 실험 장비가 반기는 6.6㎡(약 2평) 조금 안 되는 연구실에 더욱 애착이 간다. 여기서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분해해보고, 터치스크린 패널도 들여다보면서 어떤 기술, 제품을 새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것이 내가 기술자·개발자이자 경영자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젊은 직원들과 함께 토론하며 신제품 개발에 몰두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아마 젊은 시절부터 공학도로서 새로운 발명·개발에 도전해왔던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이나 호칭도 '대기업 회장'보다 '발명가'로 불리는 게 더 반갑다. 1978년 연세대 전자공학과에 다니던 시절 나는 절친한 학교 친구 5명과 함께 서울 장충동의 한 지하 단칸방에 금파 전자연구소'란 회사를 설립했다. 지금으로 치면 벤처나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정도 될 것이다. 금파(錦坡)란 이름은 금호전기 선대 회장이셨던 아버지(고 박동복 회장)의 호를 땄다. 당시 나는 학교 공부보단 온종일 연구소에 틀어박혀 새로운 제품을 발명하는 일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연구소라고 해봤자 별다른 장비는 없었다. 납땜용 인두, 책상 등을 가져다 놓고 전화도 인근 집 전화선을 따서 쓰기도 했다. 그래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콘덴서·저항·마이크로프로세서 같은 부품을 사다가 외국 잡지에 나온 전자회로를 보고 디지털시계 같은 걸 만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던 중 당시 금호전기 김사득 사장이 우리 연구소를 찾아왔다. 그는 대뜸 "형광등에 들어가는 자기식(磁氣式) 안정기를 대체할 제품을 너희가 개발해보겠느냐"고 제안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나에게 숙제를 내준 것 같았다. 안정기는 형광등을 켤 때 필요한 전압을 순간적으로 일으키고 이후 전류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불이 깜빡거리거나 꺼지지 않도록 하는 부품이다.
    하지만 당시 사용하던 자기식 안정기는 전력을 많이 쓰고 비효율적인 데다 불빛이 깜빡이는 현상이 심해 눈이 아팠다. 갑작스러운 제안을 듣고 상당히 당황했다. 당시에는 형광등의 점등(點燈) 원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연구해보면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덜컥 수락했다. 그때부터 지하방에서 다른 장비는 다 제쳐두고 형광등 연구에 몰두했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는 영어로 쓴 원서(原書)를 동료들과 함께 하나하나 찾아가며 공부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제품을 만들었다 부수고, 다시 조립해 만드는 과정을 반복했다.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납땜 작업을 하다가 인두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납 방울이 뚝뚝 떨어져 손과 팔뚝에 화상을 입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결국 6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전자식 안정기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안정기는 형광등을 켰을 때 깜빡거림이 없고, 절전 효과도 높았다.
    금호전기 박명구 회장이 경기도 화성 공장에서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을 선보이고 있다.박 회장은“1978년 설립한 금파전자연구소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금
    금호전기를 이렇게 운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젊을 때 해보고 싶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나는 1980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9회 국제 발명전'에 전자식 안정기를 출품,대학생 신분으로 전자 부문 금상과 그랑프리를 받았다. 1982년 '제6회 뉴욕 발명가 엑스포'에서도 금상을 받았다. 당시 국내 신문에 '장래가 유망한 발명가'로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30여년 전에 발명했던 전자식 안정기는 지금도 세계 형광등 제조 기술의 표준으로 남아 있다. 금파전자연구소의 발명품은 또 있다. 지금도 전국 택시에서 볼 수 있는 전자식 택시미터기가 그것이다. 택시 미터기는 택시가 얼마나 이동했고, 승객의 탑승 시간이 얼마인지 계산해 요금을 매기는 기계다. 예전에는 택시를 타면 운전기사가 택시 앞자리에 있는 기계식 미터기를 '꺾어서' 요금을 계산했다. 일부 기사는 미터기를 교묘하게 조작해서 승객에게 바가지요금을 받기도 했다. 우리 연구소는 미터기를 전자식으로 바꿔 버튼만 누르면 택시가 얼마나 이동했는지 거리와 시간에 따른 요금이 얼마인지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전자식 미터기는 복잡한 전자회로를 고치지 않는 한 조작이 불가능해 정확한 요금이 나왔다. 택시 승객들은 대환영이었다. 나는 금파전자연구소를 3년간 운영하면서 '뭐든지 노력하면 안 될 게 없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대학원생이었던 1981년에는 전자식 안정기를 만드는 '엘바산업'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조명 산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왜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질문했지만 나는 내가 만든 기술로 제작한 제품과 회사를 운영하는 게 더 보람차다고 느꼈다. 1998년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금호전기가 어려움에 처했다. 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금호전기로 들어가 20대 발명가 시절에 가졌던 도전 정신을 되새겼다. 회사는 차세대 TV용 광원(光源)인 CCFL(냉음극형광램프) 같은 신제품을 개발해 IMF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우리가 국내 점유율 70%를 차지하던 형광등 사업에만 매달렸으면 과연 회사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도 LED(발광다이오드) 조명과 터치스크린패널 센서 등으로 끊임없이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나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20대 청년 시절에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꼭 도전해보라고. 그것이 30년 40년이 지나면 자신에게 가장 큰 자산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 박명구 회장은 누구인가?
    
    박명구(61) 금호전기 대표이사(회장)는 재벌가(家)에서는 보기 드문 엔지니어·발명가 출신 경영자다. 
    연세대 전자공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미국·스위스 등 국제 발명전에서 수상했으며 형광등에 쓰는 전자식 안정기 등 발명 특허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그는 고(故) 박동복 금호전기 회장의 5남이자, 금호그룹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의 조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직접 조명 회사를 창업해 17년간 운영하다 1998년 금호전기에 합류했다. 
    이후 연구·개발과 사업 전략 등을 맡으면서 '번개표 형광등'으로 알려졌던 금호전기를 TV용 광원(光源)인 CCFL(냉음극형광램프), 
    LED(발광다이오드) 조명, 터치 스크린 패널 등을 만드는 전자 부품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를 통해 손가락으로 모든 기능을 조작할 수 있는 '풀터치 TV' 시대를 준비한다는 것이 박 회장의 계획이다.

    Premium Chosun ☜      강동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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