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He 스토리

배중호 국순당 사장의 아버지

浮萍草 2014. 12. 14. 06:00
    '주먹'들이 술 試飮場(시음장) 엎었을 때, 아버지의 말 생각나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 "갈구하라"는 말 가장 많이 하셔 혼자 트럭에 흑주 20박스 싣고 우두머리 찾아가 밤새 대작… 다음날 "뒤끝 없더라" 태도 변해 버지(고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는 내가 주류업을 하도록 만드신 분이다. 또 선배 사업가로서 조언도 자주 해주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조언은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선문답' 비슷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네가 생각해서 알아서 해보라'는 식의 주문이 많았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실패를 많이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패를 해도 도전하고, 다시 실패를 해도 또 도전하는 일을 반복했다. 실패를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고, 내 가슴에도 강하게 남아 있는 말은 "갈구(渴求)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냥 구하는 게 아니라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 그렇게 구해야 하며 구하고자 하는 정도에 따라 의욕도 달라지고 달라진 의욕에 따라 결과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는 아버지와 "갈구하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1987년 여름이었다. 내 나이는 30대 중반,당시 강릉의 약주 공장을 인수하고 약주인'흑주'를 만들어 대규모 판매를 준비할 때였다. 당시 약주는 마시면 머리 아픈 술, 명절이나 제사 때 쓰고 버리거나, 생선을 조릴 때 비린내를 없애는 데 쓰는 술 정도로 인식돼 있었다.
    어린 시절의 배중호 사장이 아버지인 고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의 목말을 타고 있다. /국순당 제공

    소비자에게 알리고자 경포대에서 무료 시음회를 겸한 판매 행사를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판매를 못 하면 그달 직원 월급을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사정은 다급했고, 심정은 간절했다. 다행히 시음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돼 경포대로 휴가를 온 사람들이 술을 맛봤고, 조금씩 술이 팔리기도 했다. 그런데 직원 한 명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더니 "큰일이 났다"고 말했다.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주먹'들이 시음회장을 부수고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기들 허락 없이 행사를 한다는 이유였다. 그 순간 많은 고민을 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똑같이 주먹 쥐고 싸우다가는 정말 큰 사고가 날 것 같았고, 신고를 하자니 보복이 걱정됐다. 그런다고 물러서면 직원 월급을 줄 수 없었다. 아버지 말씀 그대로 갈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영업용 트럭에 흑주 20상자(500mL 24병)를 싣고 건달 우두머리의 사무실을 혼자 찾아갔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우두머리 앞에 흑주를 내놓고 말했다. "이 술은 정말 좋은 술이다. 소비자에게 알려서 팔지 못하면 우리 회사는 망한다. 이제 이 일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시음회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우두머리는 내 말을 듣더니 술을 한 병 따고 나와 대작을 시작했다. 안주는 근처 구멍가게에서 사 온 마른오징어와 과자였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술자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나중엔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마셨다. 그것으로도 끝이 안 나 다시 옆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얼핏 계산해보니 알코올 도수 13%짜리 흑주를 30병 정도 마셨다. 그렇게 먹었다는 게 지금은 나도 안 믿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 날이었다. 다음 날 다시 만난 우두머리는"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뒤끝이 별로 없다. 좋은 술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경포대에서 계속 판매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강원도에서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전국에 판매할 수는 없었다. '공급 구역 제한'이라는 제도 때문이었다. 헌법소원을 낸 지 4년 만인 1994년 1월 약주에 대한 공급 구역 제한이 풀렸다. 규제가 풀린 뒤 서울 판매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희망이 보였다. 업주에게 '백세주' 맛을 보이면 맛있다고 하며 넣고 가라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서울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나는 강릉에서 성공한 소비자 시음의 경험을 되살렸다. 직접 소비자가 맛보고 백세주가 눈에 잘 띄도록 '차림표'와 '포스터' 등을 서울 변두리 음식점부터 붙여 나가기 시작했다. ' 백숙에 어울리는 백세주' '장어에 어울리는 백세주' 하는 식이었다. 업소 주인들은 처음 가서 술을 받아달라고 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다음 날 또 가서 손님들 신발을 정리해줬다. 점심이나 저녁에 가서는 설거지도 하고 테이블 정리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하면 업소 주인들은 "백세주 한 박스 줘봐" 하고 주문을 해줬다. 이런 영업은 통했다. 1992년 5월에 출시한 백세주 매출은 시판 2년 만인 1994년에 20억원이 됐고 1996년에는 40억원 1997년에는 70억원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1300억원 규모의 전통주 시장에서 점유율 95%를 차지했다. 작년 6월 돌아가신 아버지는 '한국을 대표할 만한 우리 술' 만드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갖고 계셨던 분이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 말씀대로 갈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름 모를 양조장 주인부터 유명한 막걸리 업체 사장까지 우리 술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많은 분이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제 나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대표 술을 갈구하고 있다.
    '백세주 신화' 배중호 사장은
    배중호(61) 사장은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한 뒤 롯데상사에 입사했다. 2년 뒤인 1980년 아버지 고(故)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가 운영하는 배한산업(국순당의 전신) 부설 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주류업에 뛰어들었다. 1993년부터는 국순당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일정 지역의 식당을 집중 공략해 백세주의 인지도를 크게 높여 놓은 뒤 인근 지역으로 천천히 영업 대상을 넓혀가는 ‘게릴라 영업’,업소별로 다른 차림표를 만들어주는 ‘맞춤 영업’ 등으로 ‘백세주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2008년부터는 우리 술 복원 사업을 시작해 이화주,사시통음주 등 22가지 전통주를 되살렸다. 1994년에 농림부장관상을, 2002년 납세자의 날에는 철탑산업훈장을 각각 받았다.

    Premium Chosun ☜       정성진 기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