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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조선에 파고 들어 온 서학

浮萍草 2014. 10. 7. 10:50
    9. 조선에 파고 들어온 서학(西學)
    조선 태종때인 1402년에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편집부
    부분의 실학자들이 동도서기(東道西器)적 입장에서 서양의 실리적인 학문을 취하려 한 것과는 달리, 성호학파의 일부에서는 서양의 종교에 탐닉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도 나타났다. 지난하게 여겨지던 전래의 성통공완(性通功完) 방법에 몰두하기 힘들었던 근기(根氣)가 낮은 성품을 지닌 사람들을 통하여 번져 가기 시작한 서양종교(당시는 천주교)는 타율적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천당으로 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과 함께 맹목적으로 그 저변을 확대해 갔다. 성호학파의 원조(元祖)인 성호 이 익은 일찌기 마테오 리치의 서적들을 읽고서, "리치는 불교의 윤회설을 배척하고 있지만 천주교의 천당·지옥설도 결국 불교와 마찬가지로 환망(幻妄) 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었으며 그의 문인(門人)이었던 신후담은 서학변(西學辨)이라는 글 에서,"저들의 천당·지옥·정령불멸(精靈不滅)의 설은 명백히 불씨(佛氏)의 설이며 천주교와 불교가 무 엇이 다른지, 천주교와 유학과 무엇이 같은지 모르겠다. 구구한 불씨의 여론(餘論)을 주워 맞춰서 거꾸로 척불(斥佛)을 말한다. 마테오 리치는 유자·불자의 공통의 죄인이다." 라고 갈파하기도 했다. 이 익의 제자였던 우수한 역사학자이자 실학자인 안 정복은 정조(正祖) 년간에 저술한 천학문답 (天學問答)에서,"우리 유가의 명덕신민(明德新民)의 공(功)은 모두 현세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서양 학자의 위선거악(爲善去惡)은 모두 후세를 위한 말이다. 사람이 이미 현세에서 태어났으므로 바로 현세의 일을 다하여 그 지선(至善)을 구해야만 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후세에서의 복을 구할 뜻이 있겠는가?
    천주교의 뜻은 오로지 한 몸의 사(私)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 유가의 공정(公正)의 학문이 어찌 이와 같으랴?"하고 천주교를 비판했으며,소장학자들(이승훈·이가환·정 약용 형제 등) 중에서 천주교쪽으로 기우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경고하기도 했다. 세종임금과 어깨를 겨루는 현군으로 평가되고 있는 정조임금도 천주교를 깊이 연구한 끝에, '천주교는 불교와 다를 것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160년대 지도. Hondius Henricus Saim. Asia Old Maps.(1620 A.D). Mare Tartaricum(타타리 조선의 바다).위 지도와 아래 러시아가 제작한 지도를 보면
    좀더 조선의 강역이 명확하다. © 편집부

    1800년대 러시아가 제작한 조선의 지도. 조선의 강역이 현 중국대륙,한머리(일제명칭 한반도), 만주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 편집부

    일부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도 처음에는 학문적 호기심 이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8년(4117년, 서1784) 2월에 북경에 갔던 이승훈이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조선사회는 큰 변동을 겪기 시작했다. 내세구복적인 천주교는 근기가 약한 사람들 사이에 갑자기 널리 파고 들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사회기강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극단적 광신으로 나아간 남인파 일부 선비들중에서는 정조15년(4124년,서1791)에 이르러 마침내 조상의 묘당을 헐고(毁祠) 제사를 폐지해버리는(廢祀) 일찌기 없던 패역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문명 인류로서의 최소한의 존재조건마저 부정하려 했던 무리들,즉 전라도 진산(珍山)의 윤지충·권상연은 즉시 처형당했으나 이미 광신적인 천주교도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인류문명의 실마리나마 간직해 오고 있던 조선사회에 마지막 괴변이 닥쳐 온 것이었다. 이처럼 국혼의 정수인 선비들의 정신마저 썩어 들어가는 현상을 우려한 정조임금은 서양서적들을 소각시킬 것을 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선·악논리를 주 제로 한 내세구복의 서양종교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런 현상은 이미 올바른 국혼을 제쳐두고서 주자학이라는 외래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던 폐풍때문에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불·도(儒佛道)의 세가지 사상의 내용과 장점들을 종합적으로 갖추고 있는 환·단 이래의 국교였던 국선도(國仙道)를 모른 체하고 말단 지엽적인 외래종교들이 횡행하며 천여년을 지내오는 동안,지엽 중의 지엽인 서양의 종교마저 마침내는 마구 파고 들어 온 것이니 마치 주인없는 집안에 객들만 잔뜩 들어와 설치는 꼴이 되고야 만 것이었다. 또한 서양종교라는 게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그 서양종교가 '발달'해 왔다는 유럽지방에서 수백년래 계속되어 온 같은 기독교도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들과 유럽해적들의 식민지 늑탈과정에서 스스로 입증되어 온 이상 그러한 터무니없이 아집만 강한 투쟁적인 종교가 들어 올 때는 이미 사회적 분열과 내부투쟁을 일으킬 소지마저 내포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입으로는 하나같이 사랑을 외치는 자들이 칼과 총포를 휘두르며 어떠한 짓을 했는지는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정조임금도, "서양서적이 조선에 전래된 지 이미 수백년이 되며, 사고(史庫)와 홍문관(弘文 )에도 많이 쌓여 있다."는 증언을 했을 뿐 아니라, "서양종교는 불교와 다를 것이 없다."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도들이 저지르고 있던 종교재판적인 만행과 식민지 강탈행위는 활발해진 대외활동에 의하여 잘 알려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정보는 북경과 광동 등지를 다녀오는 학자·관리·상인 등을 통하여 그 때마다 전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흡사 정신분열증적인 서학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달갑게 여길 선비들은 없었다. 불교가 전래되어 올 때는 적어도 칼을 들고 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기독교의 앞·뒤·옆에는 항상 불길한 총·칼·대포 등이 따라 갔던 것이다. '사랑의 종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하여튼 한민족이 수용했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던 기독교는 더구나 초기의 광신자들이 서양세력을 적극 이용하려고 한 때문에 더욱 위험한 면모를 보였다. 앞서 살펴 본 윤지충·권상연의 소위 훼사폐사(毁祠廢祀) 사건이 일어나자 선비 윤 광보의 상소를 받아 들인 정조임금은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여 서양서적에 대한 소각을 명했다. 정조임금 승하후에 갓 임금이 된 순조는 어렸기 때문에 대비 김(金)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대비 또한 서양종교의 폐해를 지적하여"이른바 사학 (邪學=서학)은 애비도 없고(無父) 임금도 없고(無君) 인륜을 헐고 무너뜨려서 교화(敎化)에 배치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오랑캐나 짐승으로 되려는 소행‥"으로 단정하고 사학(邪學)에 대한 적발에 나섰다. 당시 처형당하고 유배당한 학자들 중에는 남인계열이 많았는데,정약용도 그 중에 끼어 오랜 귀양살이에 처해지게 되었다. 소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불리운 이 사건에는 물론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겹쳐 있었지만 황사영이라는 천주교광신자가 북경에 있던 서양주교 그베아 에게,"조선에서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있으니 무력을 써서라도 포교를 해야 하며 재정지원도 해 주어야 한다." 는 내용의 고자질을 써서 보내려다가 발각된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이로써 당시 조선에 있어서의 천주교도들이란 서양오랑캐(해적)들의 무력을 끌어들이는 망국적 행위도 서슴치 않는,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적행위자들(즉, 반역자들)로 밖에는 볼 수가 없게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도들에게는 그러한 이적행위에 걸맞는 최고로 엄격한 국법이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청국에 있어서도 서양오랑캐들의 정신분열증적인 침투는 큰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으니,즉 영국섬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인도지방에 본부를 둔 영국 동인도회사가 본격적으로 벌여놓기 시작했던 아편장사가 점점 그 규모를 확장하여감에 따라서,황국의 남쪽지방을 중심으로 아편중독자들이 크게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영토획득과 황금만능주의를 관철하기 위하여 악마와 손잡은 듯한 그러한 '민주주의의 개척자(?)'들은 아무리 잘 봐 주려 해도 오랑캐짓으로 밖에는 단정할 수 없는 야만적인 무법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면서 지구상에 남아 있던 최고의 문명대국들을 파먹어 들어오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조선과 청국의 백성들은 그러한 악마적인 서양 오랑캐들의 다른 면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천국을 약속하는 꿀처럼 달콤한 속삭임에만 혹하여 천주교도로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꿀은 꼬임에 빠진 자들의 참된 민족성을 잘라 없애는 날카로운 비수끝에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과 함께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편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망국의 지경으로 치달리게 되자 대청의 제8세 황제인 선종 도광제(宣宗 道光帝)는 드디어 아편수입을 봉쇄해 버리기로 결단을 내리고, 임 칙서를 흠차대신(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대신)으로 광주에 파견하여 영국섬 해적들에게 경고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황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국해적들이 계속 아편을 반입하는 무도한 짓을 자행하자 임 칙서는 분연히 모든 아편을 몰수하여 태워 버린 후 광동 앞바다에 쓸어 넣어 버렸다. 그러자 영국해적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를 트집삼아서 아편 팔아먹기 전쟁을 일으켰으니 경건한 기독교도들인 영국섬의 오랑캐들이 일으킨 그 기상천외한 전쟁은 아편전쟁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아편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하고 말세적이었던가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이렇게 극도로 열악해져 가는 동아시아의 국제적 환경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서양 오랑캐들에 대한 반발과 증오감이 인륜문명 대국인 조선사회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다시 조선의 국법을 어기고 밀입국한 프랑스선교사 세 명이 임 칙서의 아편소각 다음해인 4172년(서1839)에 체포되어 국법에 의하여 처형되자, 청나라에 와 있던 프랑스의 해군제독 세실은 그 7년 후에 프랑스 군함 3척을 조선 앞바다에 끌고 와서 협박을 가하는 행패를 자행했다. 그것도 위협에만 그치지 않고 다시 20여년 후에는 실제적인 프랑스 오랑캐들의 침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소위 '인류의 자유·평등·박애'를 국가적 이상으로 삼았다는 프랑스인들도 아시아에 와서는 오랑캐노릇 이외에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기여한 바가 없었다. 당시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주장되고 있던 '인류'나 '인권'이라는 개념은 단지 유럽의 야만인들만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한민족에게는 별 쓸모도 없는 천주교의 이론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불순한 서양 오랑캐들의 무력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이 대부분의 국민들(서양 사대주의자 일부는 제외됨)을 자극하여 한 편으로는 이 항로 선생을 필두로 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전개되었고,다른 한 편으로는 서양의 무기제조 기술등 필요한 지식을 이용하여 서양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도 일어나게 되었다. 인류문명의 유산을 비록 미미하게나마 최후까지 간직해 오고 있던 조선땅에 바야흐로 서양 오랑캐들(=양이:洋夷)의 광풍이 몰아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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