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커플링 법칙

14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浮萍草 2014. 9. 29. 12:35
    <몸 속의 생태학을 모르고서는 스스로의 몸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여기 당신의 몸과 마음,그리고 뇌가 연동되어 빚어내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인간 행동학의 세세한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 보라. 그러면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본성은 어디서 오는가? - 마음의 기원 물행동학이란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패턴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물이나 인간의 습관, 태도 그리고 각 종(種)마다 특유하게 가지고 있는 표현형적 특색과 특징을 연구한다. 흔히 nature와 nurture라고 해서 타고난 그대로의 태생적 본능을 nature라 하고, 여기에 환경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인이 가미된 것을 nurture라고 한다. Nature가 글자그대로 자연그대로의 생득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nurture는 인위적인 노력을 보탠 연후에 형성된 인간의 행동패턴을 말한다. 따라서 야생 그대로의 특징이 보존된 동물의 행동패턴과 태생적인 습성에 더하여 환경,교육 기타 다양한 교양이 보태진 인간의 행동패턴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동물의 행동패턴을 말하는 동물행동학자들은 많으나 인간의 행동패턴을 말하는 동물행동학자들은 아주 드물다. 설사 인간의 행동패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동물행동학자가 있다고 해도 인간의 행동에 대한 그의 견해는 미숙하다고나 할까 믿기 어렵다고나 할까 인간 행동에 대한 동물학자들의 판단은 인간의 본질과는 차이가 많이 나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동물행동학자의 한 사람이라고나 해야 할 에드워드 윌슨조차 그의 명저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에서“인간 본성에 대한 궁리를 한다는 것이 추상적이고 어렵다”는 영국의 경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의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윌슨조차 인간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지 연구하고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사실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윌슨조차 그 자신이 어떠한 성격의 인간인지 어떤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어떤 본성의 소유자인지 그리고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과연 알고 있을지 필자도 극히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동물행동학자들 예컨대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이나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나 벌거벗은 원숭이의 저자인 데스몬드 모리스 등은 동물의 행동에 대한 탁월한 이론을 발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조차 하나같이 인간의 행동패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외에 더 크게 보태지는 못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패턴은 여전히 미궁 속에 가려져 있는 미지의 영역이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패턴에 대해 가장 날카롭고 신랄하고 그리고 가장 그 본질에 가까운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동물행동학자들이 아니라 예술에 종사 하는 사람들, 예컨대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영화감독 같은 예술가들일 경우가 많다. <허경구의 커플링 법칙>을 읽어오신 독자라면 아시겠지만 인간의 에토스를 지배하는 여러 가지 라이트 모티프 중에서도 생식본능과 성적욕망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의 구체적 표현이 불륜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불륜은 인간 본질의 가장 절실한 한 단면이다. 불륜은 무엇인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사람의 몸까지 이해하고 싶어한다 ... 본능이 우리를 그쪽으로 이끈다.” 이렇게 해서 불륜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코엘료는“수줍음이 과감함으로, 조용한 신음이 요란한 교성과 음란한 말들로 바뀌는 그 신세계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했다. 코엘료는 그의 소설‘불륜’에서 불륜의 세계를‘신세계’로 정의하고 그 ‘신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동물행동학자들의 백 마디 말보다 코엘료의 이 한마디가 불륜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의 절박한 심정을 얼마나 잘 표현해주고 있는가. 불륜이 왜 인간사회에서 그토록 유행하지 않을 수 없는가하는 그 이유를 얼마나 간단명료하게 설파해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코엘료는 오르가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위 동시오르가즘이라는 것ㅡ두사람이 서로 같은 부위를 애무하고 함께 신음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절정에 도달하는 것ㅡ은 다만 신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신경을 쓰다보면 정작 나는 쾌감을 느낄 수 없다... 교감은 완벽해야 한다. 달리 말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코엘료의 이 판단은 아주 틀린 말이다. 완벽한 성적교감을 이루는 커플 또는 이룰 수 있는 커플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성적교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코엘료의 오르가즘에 대한 명쾌한 부정적 결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여류 소설가 윤효씨는 그의 소설 ‘노러브 노섹스’에서“... 사랑은 뭐죠? 욕망이 그토록 원기왕성한 생물이라면 사랑의 자리가 남아 있긴 한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해서 다른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욕망만을 느끼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관계이고 사랑하는데도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가짜야.” 이 역시 사랑이 없는 정욕은 있을 수 있어도 정욕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다. 박완서씨도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상상만으로도 엑스터시를 경험한다. 그러나 최고의 엑스터시도 육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걸 어이하리.” 이 말 역시 사랑의 진실은 영혼에 있지 않고 육체에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어떤 상대에 대해 육체가 성적으로 들끓고 있어야 그 상대에 대한 영혼도 끓어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영혼이 아무리 혼자 앙탈을 부려도 끓어오르지 않는 정욕이 없다면 적어도 그 상대에 대한 영혼은 죽은 것이다. 이 사랑의 진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역시 프랑스 여류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다음 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내 몸을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의 진실은 남자의 정욕의 징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남자의 발기현상에 있었다. 천 마디, 만 마디 심리학자들의 사랑에 대한 분석보다 여자이고 소설가이고 작중의 주인공인 그녀의 말 한 마디가 사랑의 본질을 여과 없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본질이란 결국 남녀가 서로 간에 느끼는 정욕이 그 시작이요, 끝이다. 다른 것은 거기에 붙는 장식이요 치장이요 화장일 뿐이다. 이미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이 사랑의 현실이다. 안젤리나 졸리도 자기가 섹시하게 보이는 비결은 따로 없다고 했다. 오직 “브래드 피트가 자기를 원할 때라야만 자기는 섹시해 보일 뿐”이라고. 졸리도 피트의 정욕이 발동된 것을 알고 난 다음이라야 자기 정욕도 발동 될 수 있고 바로 그때라야만 자기는 섹시해 질 수 있다는 표현이다. 남자가 자기 몸을 원할 때에만 자기도 남자를 원하게 된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사랑의 진실에 대한 실토다. 사랑의 진실에 대한 이 이상의 웅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지금까지 얘기해온 몸이 움직여야 비로소 마음이 움직인다는 명제는 바로 생리심리학의 아버지격인 윌리엄 제임스의 주장이 곶이 곧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제임스는 그의 주장을 이런 레토릭으로 표현한 바 있다. 어렵지 않은 영어로 되어 있으니 원문을 여기서 그대로 옮겨보기로 하겠다. “We feel sorry because we cry, angry because we strike, afraid because we tremble and not that we cry, strike or tremble because we are sorry, angry or fearful, as the case maybe.” 출처 : William James, What is an Emotion, Mind, Volume9, issue34(Apr, 1884), 188~205, p.190. 제임스의 느낌이 먼저요,생각은 나중이라는 주장은 뇌신경학자로서는 드물게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데카르트의 오류(DesCartes Error)를 낸 바 있는 안토니오 R. 다마지오에 의해서도 확인 된 바 있다. 적어도 1차 감정에 한해서는 말이다. 슬픔은 눈물이라는 신체적 표징을,공포는 떨림이라는,사랑은 발기라는 신체적 표징을 전제로 한다. 적어도 1차적 감정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이 맞는다는 것을 다마지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1차 감정을 거치지 않은 2차, 3차 감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위의 인용한 문장을 한 번 잘 음미해보기 바란다. 정욕이 일어나야 비로소 사랑하게 되지 사랑한다는 생각 때문에 정욕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염두에 새기면서 다시 한 번 위의 문장을 곱씹어 보기 바란다.
    Premium Chosun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aronge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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