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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미국의 원주민 박해

浮萍草 2014. 9. 23. 09:35
    침략과 살해의 선봉에는 언제나 기독교 선교사가 있었다. 남성들의 손을 도끼로 자르고,여성들의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임신한 배를 갈라내고,아기를
    공중에 던져서 땅에 떨어뜨리거나,칼이라는 이름의 그 이상한 빛이 나는 물체에 꽂아버렸다.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기독교,문명화,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름
    으로 저질러졌다. 편집부
    7. 미합중국 독립 이후의 원주민박해그림화더즈(Pilgrim fathers)라고 불리우는 청교도 이주자들은 북미주 동해안 북쪽 한 귀퉁이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하자 다른 종교나 종파에 대해 종교재판이나 다를 바 없는 가혹성을 드러냈다. 유럽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대륙'에서도 마녀 전설에 대한 광범위한 공포감이 조성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된 자들에게는 가차없이 교수형이나 추방 등이 행해 졌다. 같은 백인들에게조차도 발휘되었던 그러한 잔인성이 원주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폭발할 것인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거나 다름없었다. 필그림화더즈의 지도자인 브랫퍼드는 청교도와 인디언과의 싸움을 '크리스트의 제자와 사탄의 제자와의 싸움'으로 오판하고 있었으며, "동방에서 시작된 복음이 후반기에는 서방을 비춘다."는 마태복음 24장 27절의 내용을 맹신하여 자신들을 굶주림에서 구해준 고마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원주민들의 땅을 청교도의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는 근거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 아닌 사상은 점차 미합중국의 기본정책으로 되어 갔다. 합중국의 독립이 실현되자 13개의 주들은 마치 독립국처럼 제각기 행동을 하려 했으며 서쪽에 있던 주들은 다투어서 영토를 넓히기 위한 말뚝을 더욱 서쪽에다 멋대로 박아대기 시작했다. 각 주들이 하나의 국가다운 법률이나마 갖게 된 것은 5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서기 1787년에 필라델피아의 헌법제정 의회에 모인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민주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는 선동가를 배출하고, 선동가는 정당을 만들고 정당은 야합과 파벌을 일으킨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유럽지방 역사에 대한 관찰에 의한 것 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회가 가는 길은 독단과 독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기 쉬울 것이었다. 자신들의 논리에 충실하게, 건국의 아버지들이 최초로 한 일은 대통령을 선거로 선출하기로 한 자신들의 규약을 스스로 파기하고 초대 대통령을 자신들만의 만장 일치로 선출한 일이었다. 동양사회(특히 동아시아사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던 성선설(性善說)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듯한 유태인 학자 제임스 메디슨은, "정부는 시민 각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일견 옳다고 인정되어 왔던 의견을 제시하는가 하면, "만약 인간이 고결하다면 정부같은 것은 전혀 필요없을 것이다."라는 흡사 백여년 후인 서기 19세기초에 문서화되는 '시온의정서'에나 나올 법한 아리송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정당의 발생은 인간 본래의 성질로 볼 때 불가피한 일이다." "각자 간의 이해의 대립은 정부에 있어서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건전한 정부의 근원이다."라는 등의 알쏭달쏭한 의견들을 제시하면서도 미합중국 헌법제정에 '큰 공헌'을 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이란 정부없이도 이미 지상낙원을 누리고 살고 있던 원주민(몽골계 인종)들을 제외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호한 민주주의자'인 조지 메이슨이 서기 1747년에'토지투기와 식민지 획득을 목적으로' 설립한 오하이오 회사가 펜실바니아주 서쪽의 토지를 측량하면서 시작된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던 원주민의 시련은 끝간 데를 모르고 이어졌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동맹자인 원주민들을 무시한 채 애팔래치아 산줄기 서쪽까지 영국섬에 양보했고,그에 따라서 영국섬의 침략자들은 더욱더 인디언땅으로 밀어닥쳤다. 그러한 고난은 서기 1811년에 쇼쇼니족을 중심으로 한 원주민 부족들의 완강한 저항을 초래했지만 야만적인 백인침략자들이 쏘아 대는 총·포의 위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쇼쇼니족 등의 연합항쟁세력에게 이긴 합중국측은, "인디언의 토지소유권을 결코 침해않겠다."고 정부자신이 보증을 섰으나 보증과는 달리 백인야만세력의 날강도적인 침략은 계속되었다. 미합중국의 보증이란 것은 '원주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사기를 치겠다'는 보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기치는 데 이골이 나기 시작한 미합중국 정부는 다시 서기 1823년에 합중국 최고재판소를 통해서,"인디언은 자신의 토지를 빼앗기지 않고 그들의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공상소설같은 공약(空約)을 내 놓았으며 그것을 곧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고 다시 보증했으나 7년 후에 7대 대통령인 잭슨에 의해 파기되어 버렸다. 지독한 인디언 혐오자로서 원주민들에게 비수(匕首)라는 원한맺힌 별명으로 불리운 잭슨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미시시피강 동쪽의 모든 원주민들을 제거시켜 버리기로 하고 미시시피·알라바마·조오지아 세 주에 있던 인디언 부족들을 불법화시키는 실로 미합중국 자신의 법에도 위배되는 가히 불법적인 횡포를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공짜로 원주민들의 토지를 약탈하는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민주주의의 보루'라는 미합중국의 의회는 잭슨의 불법행위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땅에서 추방당할 운명에 처해진 체로키족은 합중국 최고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고 최고재판소는 체로키족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결과에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라는 일반 정상인 수준의 상식도 없었던 듯한 잭슨은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오히려,"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처사‥"라고 일축해 버리고는 군대를 시켜서 인디언 추방을 집행했다. 그에 따라서 3만여 명에 달하는 체로키족은 아무런 이주 대책도 없이 미시시피강을 건너 오클라호마의 변경으로 쫓겨 갔으며 그 기나긴 여정에서 네 명 중 한 명 꼴로 사망하는 호된 시련을 겪었다. 그 비참했던 여로는 원주민들에게 '눈물의 길'로 불리워졌다.
    불에 태워 죽이고 어린이를 던져 죽이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청교도들 편집부
    잭슨은 미시시피강을 인디언과의 경계로 삼겠다고 공언했으나 체로키족의 이동과 비슷한 시기에 많은 백인들(인디언들이'와지쿠'라고 부름)은 이미 미시시피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불과 4년 후에는'영구한 인디언경계선'이 텍사스를 세로 지르는 서경 95도로 다시 바뀌었는데, 멕시코와 합중국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서 멕시코가 텍사스와 그 서쪽지역 전체를 합중국에 빼앗기자, '영구한 경계선'은 10년도 채 못되어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아예,"백인과 그 자손들이 야만인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신이 내린 '명백한 백인의 운명 (manifest destiny)'이다."라는 근거를 알 길 없는 힘의 논리를 내 걸고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내 쫓았다. 드넓은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던 수천만 마리의 들소(버팔로우)들도 인디언들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 멸종위기에 처한 들소들의 '명백한 운명'에 대해서 수우족의 추장인 '검은 사슴'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들소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와지쿠들은 먹기 위해서 들소들을 죽인 게 아니라 쇠조각에 불과한 돈에 미쳐서 들소들을 죽였다. 어떤 때는 가죽만을 벗겨가기도 했고 어떤 때는 혀만 떼어가기도 했다. 와지쿠들의 배가 들소의 말린 혀를 가득 싣고 미주리강을 내려 간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어떤 때는 혀조차 떼어 가지 않기도 했으니 그놈들은 다만 들소들을 죽이고 싶어서 미쳐 버린 놈들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주민의 운명이 들소들보다 더 나을 것도 별로 없었다. 유럽지방에서 수천만 명에 이르는 잉여인간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미시시피강 서쪽으로까지 홍수처럼 몰려들어 오자 원주민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밖에 없었다. 텍사스 지방에서는 스페인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250여년 간이나 처절한 투쟁을 벌여 온 강인한 아파치 부족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멕시코로부터 불법적인 독립을 선언했다가 알라모에서 참패당했던 텍사스 지방의 백인이주자들이 미합중국의 원조를 받고 결국 미합중국에 편입되자,아파치 부족은 스페인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는 보다 강폭한 침략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백인의 '명백한 운명'라는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터무니없는 사명감까지 지니고,'정부없이도 살아왔던 선량한 사람들'의 땅과 자원들을 송두리째 빼앗으려고 승냥이처럼 들이닥친 야만인들은,일찌기 누구에게도 굴복해 본 적이 없던 아파치 부족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멸종적인 인디언 토벌만행에 앞장섰던 기병대장 카스터가 무장도 안 한 아녀자와 노인들까지도 무차별 학살하는'작전'을 마구 밀고 나가자 더 이상 참을래야 참을 명분조차 없게 된 원주민들은 서기 1871년부터 15년간이나 형편없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파치 부족 추장 제로니모를 중심으로 장렬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리고 인디언 저항군은 서기 1876년에 몬타나주의 리틀빅혼(Little big horn)강 유역에서 수우족의 야영지를 수색하던 카스터의 제7기병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 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초토화작전과 원주민 멸종작전을 겸한 미합중국측의 대규모 공세에 몰린 끝에, 15년 만인 서기 1886년에 제로니모가 불과 수백여명 밖에 남지 않은 원주민 들을 멸종에서 구하기 위해서 항복함으로써 기나긴 원주민의 무력항쟁은 그 막을 내렸다. 당시 체포진 원주민들은 아녀자까지도 모조리 플로리다 감옥으로 보내어졌고 그 후 다시 오클라호마의 요새에 감금당한 채 1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서기 1914년까지 무려 삼십여년 간을 산송장으로 지내어야만 했던 것이다. 제로니모가 체포된 서기 1880년대의 종반에 마침내 자신들의 멸족 위기가 실제로 눈앞에 닥쳐왔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 원주민 사이에는 '바프테스마의 요하네'로 불리운 구세주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원주민의 독립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극한적인 절망상태에 빠져 있던 원주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교령(交靈)의 춤'이라는 특수한 의식을 통하여, "와지쿠의 총탄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와지쿠 자체도 사라지며, 들소떼가 다시 나타나서 번식하는 평화로운 옛 시절이 찾아온다."고 절망에 빠진 동족들을 위로했다. 멸종을 면하고 남아 있던 얼마 안되는 원주민들은 마음의 평온이나마 얻기 위해서 그를 따랐는데 와지쿠들의 탐학은 그러한 마지막 평온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남북전쟁이라는 한심한 동족상잔을 치른 후 할 일이 별로 없던 와지쿠의 군대는 다시 한번 승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와지쿠들은 단지 종교적 위안에 도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했던 선량하고 핍박받는 원주민들을 마침내 몰살시켜 버리려는 '정책'을 세웠다. 서기 1890년 가을에 사우스 다코다주에 있던 미합중국의 '인디언 보호지구'인 파인릿지(Pine Ridge) 부근에 대포까지 동원하여 모여든 미합중국 제7기병대는, 아무런 저항도 않고 '보호'받고 있던 원주민 남녀노소 200여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또 한가지의 만행을 자행했다. 소위'운디드니(Wounded knee) 학살'이었다. 운디드니의 만행은 와지쿠들로서는 인디언 멸종 작전의 시작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와지쿠들 중에서도 최소한의 양심만은 남아 있던 극소수의 '사람(백인들 중 극히 일부)'들이 그 만행에 대해서 크게 비판하고 나섰으므로 남은 원주민들은 멸종당하는 대신 지나간 역사의 유물로서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또 다른 '인디언보호구역' 으로 모두 옮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러셀 스미스라는 비평가는 그 보호구역에 대하여, "백인들은 자기들이라면 도저히 살아 나갈 것 같지도 않은 불모지로 인디언들을 쫓아냈으나(즉,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다 저절로 죽어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인디언은 백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살아 나갔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신과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대지와 더불어 살아온 진정한 문명인이던 원주민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후 인디언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이라는 허울좋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져 갔던 것이다. 무엇이 문명인가? 무엇이 양심인가? 무엇이 정의였는가? 무엇이 인민(링컨이 언급한 'people')이었던가? 도대체 누가 참된 '인간'이었던가? - 라는 숱한 인류문명사적인 수수께끼들을 남겨놓은 채‥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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