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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나폴레옹 이후의 혁명프랑스

浮萍草 2014. 9. 16. 10:33
    6. 나폴레옹 이후의 혁명프랑스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1789년 작 편집부
    폴레옹이 다시 유배당하자 루이 18세가 복귀했으나 연합국은 프랑스에게 가혹한 배상조건을 강요했다. 대의명분에 둔감한 유럽지방국가들에 있어서 전쟁이란 일종의 장사였기 때문이다. 루이 18세는 프랑스를 영국처럼 안정된 입헌군주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왕당파중 과격분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를 자행하자 그에 격분해서 자신의 지지기반이기도 했던 왕당파를 오히려 견제하는 과감한 면모도 보여 주었다. 그는 충실하게 여론에 따르려 했고, 어떠한 과격행위도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랬다. 안정과 부국강병을 도모한 그의 정책은 주효하여 국민들의 신망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불과 3년만에 전쟁배상금을 모두 물 수 있었고 서기 1820년에는 다시 40만 명에 달하는 막강한 병력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왕당파가 다시 득세하는 등 권력구조에 혼란이 야기되던 중에 루이 18세는 사망했고(서1824), 프랑스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어 갔다. 다시금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루이 18세 이후 샤를 10세와 루이 필립 등의 집권을 거쳐 완전히 부르조아의 세상이 되다시피 한 프랑스에서 다시 혁명이 발생하여 공화국이 탄생했으나 폭동에 폭동을 거듭한 혼란 속에서 지새운지 10개월만에 보나파르티즘을 내 세운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후예답게 일년 후인 서기 1852년 12월에 마침내 다시 제국(帝國)을 선포하고 나폴레옹 3세 황제로 자처했다. 무엇보다도 질서유지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서서히 국민의 자유를 허용해 나가는 안전제일주의로 국가를 안정시켰고 서기 1870년대에는 드디어'자유제국'을 공언 하기에 이르렀다.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의 나폴레옹 © 편집부
    루이 나폴레옹이 이끈 자유제국의 종말을 가져온 것은 내부의 반란세력과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였다. 프러시아의 부국강병책을 강행하며 유럽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려 한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를 굴복 시키자 나폴레옹 3세는 그에 대비하여 국민방위대의 훈련기간을 1년중 4개월로 늘이는 등 현실적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대폭적인 자유가 허용된 반대파들의 반대로 오히려 년간 15일로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빙자한 그같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결국 프랑스를 프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참패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어리석은 프랑스 의회의 지도자들은 비스마르크의 음모에 걸려 들어 자기 역량도 모르고 먼저 프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가 연전연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서 프랑스를 구해 보려고 애쓰던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의 포로가 되고 말았으나 그 사이에도 수도 빠리에서는 반정부데모와 혁명이 다시 발생하는 등 '자유제국' 프랑스는 완전히 혼란의 도가니에 다시 빠졌으며,최종적으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이 제3공화국을 만들었다. 비스마르크는 승세를 몰아서 전격적으로 빠리를 포위해 버렸다. 포위가 시작 후 4개월간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면서 쥐와 고양이까지 다 잡아먹으며 버티고 있던 빠리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사이에 다시 패권다툼이 벌어졌다. 치열한 분쟁끝에 권력을 장악한 과격파는 모든 타협의 길을 차단하고 가망없는 파국으로 스스로를 몰아 갔다.
    몽마르뜨르 결전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과격파는 혁명이후 두번째의 빠리꼼뮨을 결성했고,이미 조직되어 있던 유럽지방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빠리지부 회원이 지도자로 선출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꼼뮨이 결성된 지 72일만에 정부군은 피로 피를 씻는 무력진압을 단행하여 다시 빠리를 장악했다. 야만을 극했던 당시의 상호 살륙전(동족상잔)은 다름 아닌 문명세계의 중심부임을 자처하던 빠리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전 유럽지방에 큰 충격을 던졌다. 빠리꼼뮨의 경직되고 살벌한 대응방식은 심지어는 인터내셔날의 창립자였던 마르크스조차도 비난하는 바가 되기도 했다. 이로써 프랑스 지방에서는 모든 폭력적 혁명이 잠들고, 왕은 사라졌으며,부르조아적 시민사회가 그 나름대로 다시 자리를 잡아갔다. 이것이 100여년간 혼돈을 거듭해 간 프랑스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혼돈이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간 백년세월의 결론은 아무 혼란없이 지내어 간 영국섬과 마찬가지로 '부르조아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였다. 자유·평등·박애를 부르짖던 프랑스는 곧이어 다른 약소국의 자유·평등·박애를 짓누르기 위한 식민지쟁탈 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들어가는 한심스런 제국주의자 로서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보여 주기 시작했다. 식민지 민중에 대한 자유박탈과 악랄한 착취를 통해 불평등한 식민지 무역을 강요하여 더욱 더 부자나라가 되기 위하여!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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