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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나폴레옹의 흥망

浮萍草 2014. 9. 13. 10:56
    5.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혼란
    기 1789년 8월 26일,소위 인권선언이라고 불리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공표되었다. 온갖 미사여구와 애매모호한 용어들의 혼합체이기도 한 그 선언문은 일단 당시 유럽지방의 사회적 수준 에서는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되어 오고 있으나 그 실천면에 있어서는 극히 독선적인 행위가 발생할 수도 있는 여지가 많았다. 인권선언에 수록된 고상한 용어들과 관계없이 프랑스는 혼돈 속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갔고, 온갖 폭력과 권모술수가 마키아벨리를 무색케 할 정도로 난무하는 속에 2년 후인 서기 1791년 9월 3일에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 헌법에 의하면 프랑스는 형식상으로는 입헌군주국이며 루이 16세는 국가의 상징이긴 하지만 국가로 부터 필요한 경비를 지급받는 봉급군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르조아들의 이익에 알맞게 급조된 헌법의 내용때문에 가난한 민중은 오히려 그 헌법에 대해서 이의를 많이 제기했으므로, 불과 1년 만에 그 헌법은 폐기되고 말았다. 프랑스 국내에서 철저히 박해당한 귀족 중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여 자신들을 몰아 낸 새로운 귀족계급인 부르조아 자본귀족들을 타도하려고 다른 군주들의 협조를 구했다. 전통귀족과 자본귀족이라는 두 집단간의 불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가자, 프랑스 입법의회는 망명귀족들이 많이 몰려 있던 독일지방 군주들에게 마침내 최후 통첩을 보냈다.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혁명의 유능한 지도자중의 하나였던 로베스피에르는 그와 같은 무모한 전쟁 도발이 공화정 수립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군사독재자가 등장할 기회를 제공할 뿐이라고 판단하여 반대 했다. 그러나 오합지졸의 모임에 불과한 의회에서 서기 1792년 4월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시작된 소위 '혁명전쟁'은 전쟁보다도 지도층간의 자중지란이 심각하게 벌어져서 결국 참다못한 노동자·빈민·영세 상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후에 실권을 탈취했다. 이른바 빠리꼼뮨이 난국을 떠맡게 된 것인데 고립무원의 위기감에 빠진 꼼뮨의 지도자 마라·당통·로베스 피에르 등은 초강경 일변도의 독재를 자행했다.
    빠리는 완전히 공포와 전율 상태에 빠져 들어 갔다. 그러한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경건한 카톨릭교도인 루이왕은 부활제 행사를 빠리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담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끝에 일단 빠리를 떠나 처가인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 했으나 국경마을에서 체포당하고 말았다. 재판이라는 명색이 부끄러울 정도로 모든 절차와 상식이 무시된 채 진행된 루이 16세에 대한 어거지 재판에서 루이왕은 마침내 단두대 처형을 선고받았다. 서기 1793년 1월 21일에 전격적으로 집행된 루이 16세의 처형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단두대에 올라선 그는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나의 원수들을 용서한다. 바라건대 나의 피가 프랑스인의 행복을 공고히 하고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기를‥" 하고 기원도 채 마치기 전에 성급한 길로틴의 칼날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바구니에 떨어져 들어간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용과 타협으로 사태를 상식적으로 수습하려 했던 한 경건한 카톨릭교도의 목이었다. 그는 결코 악랄한 전제군주도 아니었고 악독한 독재자는 물론 아니었으며 국민대중의 지지를 잃고 따돌림당한 인기없는 왕도 아니었다. 그는 모든 순간에 국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이해하려고 애썼던 평범한 군주였다. 루이의 목이 떨어지자 처형장인 꽁꼬르드 광장을 메운 군중은 함성을 올렸으나, 루이의 시체를 운반하는 마차를 지켜 본 많은 부인들은 통곡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된 주위의 군주국들은 곧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공격했다. 프랑스 '혁명군'은 자기들도 갖고 있지 못한'자유·평등·박애'를 전 유럽지방에 퍼뜨리겠다는 몽상에 사로 잡혀 진격해 나갔으나 점령한 지역에 대한 자치를 허용치 않고 무작정 합병해 버리는 겉과 속이 다른 정책을 취함으로써'혁명군'의 본질은 곧 마각이 드러나고 말았다. 점령지역의 주민들은 혁명정부의 권력을 부(富)의 강탈수단 독재의 도구, 독립파괴의 흉물이상으로 볼 수 없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말 았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곧 밀리기 시작하여 국내로 쫓겨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한 난국을 수습하겠다고 급조한 공안위원회,혁명재판소 등의 무시무시한 독재기구를 완비한 쟈꼬방 과격파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대공포(大恐怖) 정치를 감행 했다. 전쟁과 사회혼란으로 생활필수품의 극심한 공급 부족이 야기되자 민중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독재정권의 대답은 언제나 무력진압과 단두대였을 뿐이었다. 마라가 암살당하고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잡자 그는 더욱 더 공포정치에 박차를 가했다. 혐의를 뒤집어 쓴 수천명의 용의자들은 가차없이'반혁명'의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단두대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한 공포정치는 전쟁 때문에 실시되고 있는 게 아니라,'민주공화국건설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된 자들은 재산도 몰수되었는데,그러한 혐의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약 30여만 명이나 감옥에 쳐박혀 있었다. 과격파 지도자 중의 하나인 생쥐스뜨에 의하면, "이러한 혁명프로그램에 의해 시민제도가 확립되고 그에 의하여 시민정신이 뿌리를 박고 거기서 비로소 이기주의·지배욕·탐욕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허위의 자유는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시작된다." 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시민과 시민정신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용어였을까? 뒤죽박죽이 된 권력장악의 추악한 음모가 쉴새없이 계속된 끝에 마침내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파멸당하고야 말았다. 이러한 대혼돈의 와중에서 왕당파의 반격기도를 대포로 잠재우고 등장한 자가 나폴레옹이었다.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처단하고 권력을 장악한 테르미도르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으나,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백작 루이 18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 쪽에서는 테르미도르파를 신용하지 않았으므로 군주없는 입헌군주제라는 묘한 상태가 잠시 계속되었다. 당분간 다섯명의 도독(都督)이 주관하는 도독정부를 운영하게 된 집권층은 다소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여 혁명을 안정시키려 했다. 왕당파도 무력반격보다 합법적 선거에 의해서 세력을 회복하려고 입법부로 대거 진출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도독정부가 이태리반도를 장악한 나폴레옹에게 왕당파 숙청을 비밀리에 의뢰했는데 나폴레옹은 제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으므로 그에 응했다. 한편 새롭게 토지를 얻을 수 있었던 농민들은 부르조아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안정을 바랐으므로 보다 더 강력한 정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해외원정에 나가 있던 나폴레옹은 그러한 요구에도 충실하게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귀국 후 즉시 쟈꼬방파를 숙청해 버리고 통령(統領)정부를 결성하여 실제적 권력자가 되었다가 서기 1799년 12월 15일에는 새 헌법을 제정하여 독재자의 지위를 확보했다. 시저가 죽은 지 2,000여년 만에 유럽지방에 다시 '합법적인 독재자'가 탄생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내치와 외정에 힘을 기울여 매우 효율적인 체제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으나 마침내 시저와 마찬가지로 야심을 드러내어 5년 후 서기 1804년 12월 2일에 교왕을 구슬러서 황제로 즉위했다. 카톨릭의 수호자처럼 행세하는 종교문외한(宗敎門外漢) 나폴레옹을 위하여 교왕 피우스 7세는, "황제를 경외하고 받드는 것은 곧 신을 경외하고 받드는 것이다." 라는 문구를 서기 1806년의 교리서에 넣도록 했다. 나폴레옹 스스로는'혁명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으므로 이미 혁명으로 사라져 버린 왕이 될 수는 없었으므로 한술 더 떠서 프랑스 최초의 군인황제였던 샤를마뉴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에 대해서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은 '혁명국민'답지 않게 별 이의없이 그러한 나폴레옹의 속임수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체제에 의하여 기득권을 확보한 자들이 더 이상의 혼란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부르조아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기득권자들인 부르조아들과는 상호간에 이해의 일치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기고만장해진 나폴레옹은 막강한 해군을 보유한 영국섬을 제압하려고 무모한 대륙봉쇄정책을 강행했으나,그것은 전략상의 대실수였을 뿐이었다. 그는 스페인을 점령했으나 대대적 반란에 직면하자 시라고사의 시민과 군인 5만명을 대 학살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고 대륙봉쇄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타격이 심해진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불응하자 대규모의 러시아원정군을 조직하여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에 걸려 든 나폴레옹의 군사를 모스크바에서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항복문서가 아닌 폐허와 동장군(冬將軍)뿐이었다. 프랑스군은 기아와 혹한에 떨면서 후퇴를 했고, 유럽지방 역사상 최대규모였다는 60만 병력 중 10여만명만 간신히 생환하는 대참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2년후인 서기 1814년 3월 30일에는 연합군에게 빠리를 점령당함으로써 그는 무조건 퇴위를 선언하고 물러났으며 곧 지중해에 있는 엘바섬으로 유배당했다. 나폴레옹이 유배당한 후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를 왕으로 삼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루이 18세는 유럽지방의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자유주의적인 프랑스를 만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자유·평등·박애'를 간판으로 내어 걸었던 혁명지지 세력은 자기의 기득권(즉 새로 얻은 지위나 재산 등)을 도로 왕당파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했다. 그런 정세 속에서 엘바에 간 지 1년도 안되어 나폴레옹이 탈출해서 돌아오자 그는 어렵지 않게 다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망명갔다. 나폴레옹은 루이 18세보다 더 광범위한 자유가 규정된 부가헌법을 공표하여 소위 자유제국(L'Empire Liberal)을 건설하려 했으나,100일 만에 연합군의 대공세에 밀려 워털루에서 대패당하고 말았다. 그는 남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센트헬레나섬에 유배당한 끝에 사망했는데 희비가 엇갈렸던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프랑스인들의 기억 속에 전설처럼 남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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