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아름다운 박물관

사람 박물관 ‘얼굴’

浮萍草 2014. 7. 28. 06:00
    백 년 인생 동안 넘치듯 모은 석상이 한 자리에 터를 잡았다. 
    세월이 훑이고 간 석상의 얼굴에는 인생이 담겼다. 
    연극 연출가 김정옥은 그 얼굴을 모았다. 
    박물관에 모인 석상에도 저마다 인생이 담겼다.

    나다니앨 호돈의 소설 속 큰바위얼굴이 여기 있었다. 부자도 군인도 정치가도 시인도 아닌 연극 무대에서 반백 년을 보낸 노인의 터에 큰바위얼굴이 모였다. 마음속에서 기다리던 큰바위얼굴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 김혜자,최불암 등 숱한 배우들의 얼굴을 세상에 선보이고도 아직도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 많은가보다. 김정옥 관장의 ‘박물관 얼굴’을 찾아갔다.
    ㆍ철문 너머 얼굴들의 세상으로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광주. 김정옥 관장의 박물관 ‘얼굴’이 있다. 창고 건물인 듯 보이는 박물관 대문 앞에 섰다. 돌아보니 검단산과 예봉산이 남한강 줄기 너머로 보인다. 돈 좀 모으면 빌딩 사서 임대료 받으며 살겠다는 것이 요즘 은퇴 설계의 ‘베스트’로 꼽힌다면 분명 이 박물관은 실패한, 이른바 ‘워스트’ 은퇴다.

    이 골짜기까지 찾아오는 이가 얼마나 있을 것이며 ‘얼굴’이라는 독특한 주제로 요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또 얼마나 ‘흥행’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얼굴을 전시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면서도 흥행 역시 이뤄야 살아남는 짐을 어깨에 졌으니 굳고 커다란 철문처럼 무거운 일이다. 어느 노인의 ‘평생의 과업’이었을까, 궁금해 인터폰을 누르고 철문을 열었다.
    ㆍ똑같지 않은 얼굴의 매력
    정식 명칭은 ‘사람박물관 얼굴’이다. 하지만 건너짚고 사람들은‘얼굴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마치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석인(石人)이 늘어섰다. 여느 무덤가, 마을입구 학교 계단에 있을법한 석인이다. 이곳 박물관의 석인은 어림잡아 400여 점. 모두 김정옥 관장이 수집했다. 지난 50년간 모아온 석인과 민예품을 한 자리에 모았다. 2004년 개관한 얼굴 박물관의 탄생 설화다.

    마치 신들린 듯 김 관장은 석인을 모았다. 처음 석인을 들여온 건 1967년. 서울 동교동 길가에 방치된 1m가 족히 되는 석인이었다. 누군가 도로에 늘어놔 운전기사들이 투덜대는 것을 봤다. 그냥 가져가도 된다는 말에 리어카를 빌려 화곡동 집까지 옮겨왔다. 그러고는 목기, 가구, 그림 수집에서 석인으로 수집품이 바뀌었다. 1970년대부터는 즐겨하던 포커도 그만뒀다. 그 후로 50년간 모은 석인이 4000여 점에 이른다. 선물로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아끼고 아끼던 석인들로 박물관을 만들었다. “왜 석인을 모으냐”는 우둔한 질문에 김 관장은 이렇게 답한다. “태초부터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적어도 수백억 명은 됐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똑같은 얼굴은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신기해요. 부자지간이건 쌍둥이건 어딘가 조금은 꼭 다르단 말이죠”. “그 사람들의 얼굴이 석인에 녹아있습니다. 특별히 석인을 모으는 데는 그만의 특별한 이유도 있다. 김 관장은 “석공(石工)과 흘러간 시간과 바람·눈·비의 합작품이 석인입니다”라며“특히 우리나라의 석인은 서양 조각과 달리 질박한 멋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석인이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많은 석인을 한꺼번에 모은 것은 바로 경부고속도로 공사와 같은 대형 사업에서였다고 전했다. 조상의 묘에 세웠던 석인을 새로 만들면서 옛 것을 땅에 묻었고 고속도로 공사에서 이것들이 드러났다는 설명이다. 석인은 갈 곳을 찾지 못했고 그는 이것들을 모았다.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여느 수집가가 그렇듯 남편은 모아오고 부인은 타박하는 모양새 그대로였다. 지금은 박물관 부관장을 맡아 안살림을 하는 부인 조경자씨는“크지도 않은 집에 돌덩이가 늘어나 웅크리고 살았지만 1997년 경기도 광주로 이사 오면서 사람들과 같이 즐기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김씨 부부가 박물관에서 생활한다. 초기에는 강 건너편에 집을 따로 두고 박물관을 오갔지만 그마저도 번거로워서 아예 집과 박물관을 합쳤다고 한다.
    ㆍ무질서의 전시…이유는?
    ‘얼굴 박물관’의 전시는 이해하기 힘들다. 힘들게 모아온 작품이라면 좀 더 차분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야 제맛이라 하겠지만 이 박물관의 전시품은 곳곳에 산재했다. 박물관과 공연장을 겸해서 지은 2층 건물은 여기저기 얼굴이 널려있다. 바퀴가 달린 간이 책장 같은 것에 사진이며 그림들이 걸렸다. 전라도 지방 부부의 초상화가 나란히 붙었고 석인을 찍은 사진과 석인이 앞·뒤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김 관장을 찾아왔던 예술인과 기자 등의 사진도 액자에 걸렸고 서양 유명 배우의 모습도 액자에 담겨있다. 마치 박물관, 전시관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깝다. 작품에는 설명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고 전시중인 것인지 쌓아놓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작품도 있다.

    후에 알았지만 이것이 김 관장의 전시철학이다. 마치 젊은 시절 김 관장이 숭인동 어느 시장에서 평생 잊지못할 얼굴을 가진 석인을 발견하듯 관람객도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수집품 사이에서 평생 잊지못할 작품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한 것이다.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를 석인과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홀을 지나면 계단인지 의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장소가 나온다. 올라서서 거꾸로 내려다보면 온갖 얼굴들이 보인다. 중앙에 늘어놓은 책장 모양의 전시대를 밀어내면 홀은 넓은 무대가 된다. 이곳에서 연극, 무용 등 축제가 열린다. 수백 년 같은 표정의 얼굴이 놓였던 박물관에서 살아 움직이는 얼굴들이 축제를 벌인다. 2층 난간까지 빼곡한 얼굴 들은 관객이 된다.
    ㆍ기와집과 석인의 마당
    기이한 전시관을 지나며 얼굴에 대해 이해할 즈음,밖으로 나오면 또 한번 낯선 광경이 펼쳐진다. 박물관 안에 정갈한 한옥이 들어섰다. ‘ㄱ’ 자로 뻗고 마루가 놓였고 대들보에서는 세월이 느껴진다. 한옥 역시 수집품이다. 박물관의 한 켠을 채우는 작품이다. 김 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한옥은 전남 강진에서 옮겨왔다. 80여 년 전 백두산 소나무를 가져와 지은 것으로 화가 김승희 여사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다. 김 관장은 ‘장춘실(長春室)’이라 부르던 한옥의 이름을 ‘관석헌(觀石軒)’이라고 바꿨다. 봄이 길게 오는 남도의 집에서 돌을 바라보는 집이 됐다. 한옥은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다. 몇 해 전 따스한 봄날 마루에 앉아 인터뷰하는 사진에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김 관장에 따르면 한옥은 ‘영빈관’의 역할을 한다. 손님들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박물관의 백 년 고택에서 지내는 특별한 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날도 특별한 손님들이 오는지 한옥을 관리하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바쁘다. 짤뚱한 빗자루로 마루를 쓸고 걸레를 적셔 부지런히 닦는다. 닦고 쓸어내는 모습도 옛날 그대로다.

    한옥에서 마당을 내려다보면 입구에서 바라봤던 병마용 석인이 가득 늘어섰다. 크기며 모양이 제각각이다. 사람이 다닐만한 통로는 비웠지만 전후좌우 자유롭게 늘어선 모습이 역시 ‘얼굴 박물관’ 스타일이다. ‘관석헌’ 뒤뜰에는 장승이 서 있고 앞뜰에는 석인들이 늘어섰다. 문인석은 머리에 관을 쓰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홀(笏)을 들었다. 조선시대 왕 앞에 신하가 나아갈 때 그 모습이다. 죽은 이를 모신다는 의미가 있는 동자석도 있다. 장승이 마을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고 마을을 지켜준다면 동자석은 망자의 벗이라고 불린다. 바닥에 깔린 돌도 어디선가 수집한 듯하고 어느 마을에서 사용했을 법한 연자방아도 놓였다. 김 관장은 말했다. “얼굴은 모두 매력적이다. 아름다울 수 있고 추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사람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변화가 많다. 그래서 내면의 ‘얼’을 보여주는 통로가 된다. 그것이 얼굴의 매력이다”. ‘사람박물관 얼굴’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동절기·하절기 각각 1개월 정도는 휴관하지만 다른 날에는 항상 사람을 기다린다. 철문을 열고 들어오면 조선시대 마을을 지키던 얼굴을 볼 수 있고 중국·일본은 커녕 서울에도 한번 온 적 없는 시골 석공의 모습을 닮은 석상도 만날 수 있다. 박물관의 철문은 그 경계다. 철문을 열고 잠시 과거의 우리 모습과 소통해보는 것은 어떨까.
    ㆍ관람안내
    하절기와 동절기에 장기간 휴관한다. 올해는 2월 14일(금)까지 방문객을 받지 않고 새단장에 나선다. 10시~18시 개관 (매주 월, 화 휴관) 수, 목 관람은 사전예약 필수 (031-765-3522) 관람료 일반 4000원, 청소년·경로·광주시민 3000원, 어린이 2000원 (www.visagej.org)
    ㆍ찾아가는길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68번지 버스 : 동서울터미널에서 퇴촌방면 13-2번 자동차 : 중부고속도로 광주 천진암 방향 광주IC 우회전 천진암 방향 2km

    Segye ☜        이다일 기자 aut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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