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권력과 얼굴

여자에겐 이탈리아어, 남자에겐 불어… 대제국 다스렸던 어학의 神 '카를 5세'

浮萍草 2014. 6. 1. 12:10
    19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극 
    종교개혁·주변국 반대에 막혀 유럽 통합의 꿈 결국 못 이뤄 
    재위 40년 뒤 왕위서 물러나… 수도원서 시계 고치며 末年
    
    "나는 하느님께는 스페인어로 여자에겐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겐 프랑스어로 그리고 내 애마(愛馬)에게는 독일어로 말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1500~1558)는 다분히 냉소적인 어조로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자랑했다. 
    어학 취미가 남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가 다스리던 제국이 그만큼 크고 광활했기 때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의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 일,네덜란드,이탈리아 일부를 비롯,스페인과 멕시코,페루,볼리비아 등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까지 
    포함한 광대한 왕국이었다. 
    카를 5세는 저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공적 결혼 정책의 첫째 수혜자로, 광대한 왕국을 상속을 통해 이루었다.
    ▲ 티치아노의 1548년 작 ‘뮐베르크의 카를 5세’/이진숙 제공

    그는 16세 때였던 1516년 어머니와 공동으로 왕으로 즉위하며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외할머니인 이사벨라 여왕의 콜럼버스 후원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해온 유럽의 최강국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부계 혈통을 이어 19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하니 이제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이 신성로마제국에 포함 되었다. 로마제국 시절부터 유럽인들에게 전해져 온 오래된 꿈 즉'한 제국이 된 유럽과 세계 평화'가 카를 5세를 통해 실현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중심이 된 유럽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적극적으로 카를 5세의 세력 확장을 저지했던 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는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1527년 카를 5세는 두 나라 사이에서 교활하게 줄타기를 하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징벌하기 위해 로마를 침탈했다. "독일인의 광포와 플랑드르인의 탐욕과 스페인인의 방종"으로 국제적 군대는 로마를 초토화했다. 후에 에라스뮈스가"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한 문명의 파괴"였다고 표현한 대로,이 침략으로 말미암아 이성과 진보를 믿어온 르네상스의 낙관론은 붕괴하기 시작 했다. 그래서 르네상스풍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역사가들은 카를 5세의 로마 침탈이 르네상스의 내용적 종결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한다. 카를 5세의 세계 제국 꿈을 방해한 또 다른 원인은 1517년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독일 내 몇몇 선제후가 신교를 옹호하면서 정치 세력화되어 분리를 꿈꿨고 카를 5세는 이들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 티치아노가 그린 '뮐베르크의 카를 5세'는 뮐베르크에서 신교도들과 치른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48년 그린 그림이다. 카를 5세는 호시탐탐 유럽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튀르크와도 충돌했다. 그는 평생 40여 번 전쟁을 치렀다. 그 모든 비용을 스페인에서 조달했으니 스페인 국민의 원성도 하늘을 찔렀다. 재위 40년간에 그는 큰 피로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1556년 왕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아들 펠리페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물려준다. 나라는 다시 오스트리아와 독일 중심의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으로 나누어졌다. 지금도 유럽연합은 통일된 단일 유럽이라는 이상과 엇갈리는 각국의 이해관계라는 현실 사이에서 복잡한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 말년을 보낸다. 그는 시계 고치는 일로 주로 소일했다고 한다. "시계 몇 개를 일치시킬 능력도 없으면서 감히 모든 백성을 하나로 모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으니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이었던가?" 이것이 그 넓은 땅을 다스렸던 황제의 소회다.
    Dongascience         이진숙 '위대한 미술책'·'러시아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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