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권력과 얼굴

6번 혼인, 결국 王妃 2명 처형… 혼마저 政治였던 '헨리 8세'

浮萍草 2014. 4. 30. 06:00
    ▲ 한스 홀바인 작업실, 헨리8세 초상화, 1540년경 / 이진숙 제공
    컷 공작처럼 잔뜩 부풀린,화려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 사람은 영국왕 헨리 8세(재위 1509~1547)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190㎝가 넘는 거구에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했고 젊은 시절 '세계 최고의 남자'라고 떠 받들어졌다. 역사가들은 헨리 8세가 큰 과오 없이 나라를 운영했으며 국가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후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여섯 명의 왕비 중 두 명을 처형한, 그 말 많은 결혼이었다. 그에게 결혼은 곧 정치이기도 했다. 그의 첫 아내는 스페인 출신의 캐서린 왕비였다. 당시 2류 국가였던 영국은 최강국인 스페인과 사돈을 맺어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왕권 강화를 꿈꾼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에서 채 세 살도 안되었던 캐서린과 헨리 8세의 형 아서 왕자는 약혼을 하게 된다. 13년 후 이 아기들이 자라 결혼을 하긴 했는데 결혼한 지 20주 만에 병약한 아서 왕자가 죽고 만다. 그러나 이 어린 신부를 썩히기에는 그 정치적인 활용도가 너무 컸다. 첫 결혼의 무효선언을 교황청에서 받아내고, 이번에는 둘째 아들 헨리 8세가 연상의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다. 18년의 결혼 생활 동안 6명의 아이가 태어났으나 유일하게 딸 메리만 살아남고 아들들은 모두 유산되거나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 헨리 8세는 이 일들이 성경에서 금지한 형수와의 결혼에 대한 징벌이라 생각했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 이혼 허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가톨릭 수호국인 스페인 공주이자 신성로마제국 칼 5세의 이모였던 캐서린의 지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교황은 이혼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외교 분쟁 가능성을 감수하고 헨리 8세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감행한다. 이어 헨리 8세는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 스스로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교회 개혁을 통해 1200개가 넘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매각했다. 이것으로 그것들을 헐값에 사들인 세력은 후에 더 부유해졌으며 더욱 공고한 지지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중간 계층으로 이루어진 신진 세력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헨리 8세는 봉건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사실 그가'위험한' 결혼을 계속 감행한 데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헨리 8세의 아버지가 세운 튜더 왕조는 왕위 계승 문제로 야기된 장미전쟁(1455~ 1485)의 결과물이었다. 제2의 장미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헨리 8세에게 합법적인 결혼으로 얻은 적자(嫡子)에게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 여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는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병약한 아들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돼 죽고 왕권은 딸들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권은 결국 다른 가문으로 계승되었다. 헨리 8세는 건강한 왕자를 얻기 위해 강박증처럼 왕비를 갈아치웠다. 그러나 그가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과연 여자들의 잘못이었을까?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최근의 한 연구에서 헨리 8세는 영국인의 0.2%만이 가지는 Kell 항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Kell 항원은 X염색체에 대한 유전적 변이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건강한 자손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낮았다고 한다. '왕'이란 사회적 지위를 지칭하는 말이지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제아무리 왕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Premium Chosun ☜        이진숙 '러시아 미술사' '미술의 빅뱅' 저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