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권력과 얼굴

佛 앙리 2세에 시집 온 메디치家 여인, 그녀의 혼수품은 마키아벨리 '군주론'

浮萍草 2014. 4. 28. 06:00
    남편 죽은 뒤 30년간 섭정 통치… 신·구교도 간 분쟁시대 타협 꾀해
    자기 홀대한 남편 위해 평생 喪服… 앙리 2세 情婦에게도 관용 베풀어
    ▲ 프랑수아 클루에의 1580년작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초상’(부분). /이진숙 제공
    국 신부의 혼수품으로 약속됐던'반지 세 개(제노바,밀라노,나폴리)'는 거짓이 되고 말았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1559년부터 30년간 프랑스 섭정 모후)는 메디치가 장자(長子) 계열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그녀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에게 시집갈 때 친척 아저씨뻘인 교황 클레멘투스 7세는 제노바,밀라노,나폴리에 프랑스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결혼 다음 해 클레멘투스는 덧없이 삶을 마감하고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그녀를 적대시하는 프랑스인 들 틈에 홀로 던져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교황의 술책으로 프랑스 왕자가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출신의 이탈리아 여자와 결혼했다며 그녀를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카테리나는 이 모든 것을 놀라운 자제력으로 버텼다. 남편 앙리 2세(재위 1547~1559)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앙리 2세는 스무 살 연상의 정부(情婦) 디안 드 프왁티에에게 빠져 있었다. 1559년 뜻하지 않게 앙리 2세가 죽고 이후 30년간 세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권력을 손에 쥔 그녀가 선택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관용이었다. 연적(戀敵)으로 자기에게 여러 차례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디안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녀는 자기를 홀대하던 남편을 기려 죽을 때까지 검은 상복을 입었다. 1580년에 그려진 이 초상화에서도 그녀는 상복을 입고 있다. 그림 속의 그녀는 자제력 있게 꽉 다문 입술에 지혜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
    그녀가 프랑스 왕정의 냉엄한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인 진짜 혼수품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 1532년 발간된 이 책은 피렌체의 가장 영화로운 시기의 통치자였던 카테리나의 증조할아버지 로렌초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던 책이다. 이 책을 카테리나는 오랫동안 숙독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보여준 그녀의 태도는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던 군주의 주요 덕목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던 당시 이탈리아는 중소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국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분열을 통일할 수 있는 유능한 군주를 지지하는 정치현실주의를 강조한 것이었지 독재를 옹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효율적 방법으로 권력을 잡고 나서 국민을 존중하는 공화제를 이룩해서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녀의 섭정 기간은 신교도인 위그노와 기즈 가문으로 대변되는 로마 가톨릭이 광신적 증오 암살과 테러로 충돌하던 종교 분쟁의 시대였다. 그녀는 '위대한 중재자'로 내전에 빠지기 직전의 프랑스를 구했다. 적대적 양 진영으로부터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녀가 견지한 것은 마키아벨리적인 정치현실주의였다. 아쉽게도 카테리나는 성공한 개혁왕이 되지는 못했다. 화해 정책으로 추진한 딸 마고와 신교도'나바르의 앙리'의 결혼식 날 한자리에 모인 신·구교도가 끝내 충돌'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유럽 전체는 종교를 이유로 피비린내 나는'30년 전쟁'(1618~1648)을 마치고 나서야 겨우 공존 기술을 배우게 된다. 동시대인들에게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국가 중심의 실용적 정치 투쟁과 궤멸보다는 타협과 관용을 추구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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