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권력과 얼굴

'차르의 敵은 다 물어뜯고 쓸어버려라' 이반 뇌제, 그에게서 푸틴이 보인다

浮萍草 2014. 4. 26. 21:51
    왕비 독살 된 후 누구도 못 믿어
    16세기판 KGB 만들어 공포정치
    결국 아들까지 몽둥이로 때려죽여
    ▲ 일리야 레핀의 1885년작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부분). / 이진숙 제공
    크라이나 사태,크림 자치공화국 병합 문제와 관련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에 국제사회가 깊이 우려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푸틴의 '강한 러시아' 정책과 안하무인 태도는 제정 러시아의 '차르(tsar)'를 떠올리게 한다. 푸틴의 본보기는 표트르 대제이겠지만 푸틴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은'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재위 1533~ 1584)'를 떠올린다. 16세기의 이반 뇌제→18세기의 표트르 대제→21세기의 푸틴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데자뷔를 2회에 걸쳐 그림 으로 살펴본다. 러시아 이동파(移動派·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둔 화가 집단) 화가 일리야 레핀(Repin·1844~1930)은 이반 뇌제의 광기(狂氣)가 초래한 가장 끔찍한 사건을 그렸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는 아들과 대화 중 흥분해서 들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아들을 보고서야 이반 뇌제는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들은 치명상을 입었다. 광기에 이어 피의 공포가 이반 뇌제를 엄습했다. 아버지 품에서 죽어가는 아들은 체념한 표정이다. 레핀이 이 그림'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을 그린 것은 1885년. 황제 알렉산더 3세의 암살과 그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피로 물들었던 시대였다. 레핀은 광기가 부르는 광기, 또 다른 피를 부르는 피의 정책을 고발하고자 이 그림을 그렸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 차르의 폭압적이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의 정식 명칭은 이반 4세. 우뢰와 같은 충동적 성격 때문에 '뇌제(雷帝)'라는 별칭이 붙었다. 러시아 왕을 칭하는'차르'라는 말은 원래 로마의 황제'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차르'가 되면서 긍정적 의미는 떨어져 나가고 강력하고 폭압적인 의미만 남게 되었다. 이반 뇌제가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사려 깊은 왕이었다. 유능한 측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여러 봉건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를 통합 근대적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그는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하는 폭군이 되었다. 1560년 사랑하던 왕비가 독살된 후 그는 병적으로 의심이 많아졌고 잔인해졌다. 그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측근들을 사소한 이유로 재판 없이 처형했다. 결국 그가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은 '16세기판 KGB'인 끔찍한 비밀경찰 기구뿐이었다.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개의 머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차르의 적(敵)을 물어뜯고 쓸어버린다는 의미였다. 공포정치의 원인은 두려움이었다. 그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폭정(暴政)으로 인심을 잃어 협박과 감시 없이는 권력을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공포에 사로잡힌 차르는 제 손으로 제 미래가 될 아들을 죽이고 말았고 그 후 러시아는 왕위 계승 문제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들이 죽고 난 후 이반 뇌제는 자신이 처형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기도하며 참회를 구했다.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 수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만도 4095명에 이른다. 푸틴이 러시아를 중세로 되돌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수직적 소통 과정과 비판자를 용납하지 않는 독단이 이반 뇌제와 닮았기 때문이다.
    Premium Chosun ☜        이진숙 '러시아 미술사' '미술의 빅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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