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5 중국정벌 준비한 감성적 이성계는 나폴레옹의 스승 격

浮萍草 2014. 4. 18. 06:00
    1. 이성계는 예의 바르고 감성적, 나폴레옹은 거칠고 오만 선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조상들을 배경으로 함경도에서 성장한 대륙의 사나이였다. 그는 기마와 궁술 등 무술의 천재였고 천하장사였다. 이성계는 26세 때 반란군 진압 후 약 30 년간의 수많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불패의 맹장이다. 그는 겸손하고 부하들에게도 예의를 다했고 토지개혁으로 백성들의 인기가 높았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고려 조정 백관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도 24세 때 반란군 진압 후 승승장구했다. 그는 군사작전에 천재이나 코르시카 섬 사람 기질로 거친데다 오만하고 도덕성이 결핍된 과욕적인 사람이었다. 이성계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중국정벌을 준비했고 말년에 태상왕으로 있다가 노환으로 73세에 사망했고 나폴레옹은 영웅 심리에 빠져 정복사업을 벌이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귀양가 있다 52세에 죽었다. 2. 대륙적인 정복자 기질과 환경변화에 유연한 이성계
    이성계는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였다. 이성계는 1170년 고려 무신난의 주역이었던 대장군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6대 후손이다. 아래 그림은 이의방이 살해당한 후 이성계 조상의 변천과정을 요약해 그린 것이다. 이성계 부친 이자춘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 환경을 재빨리 분석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한편 군사력만이 집안을 살리는 길이라 하여 사병(私兵)을 양성하고 군사 훈련을 열심히 하였다. 이러한 가족적인 배경 속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북방에서 전투를 한 이성계는 매우 용맹스런 대륙인 기질과 군인의 자질은 물론 국제정세를 민감하게 파악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함께 소유하였다. 원 세력이 약화되자 부친이 부(친)원에서 친고려로 전향하자 이성계도 친고려가 되어 개경에 왔다. 북방서 성장한 이성계의 부대는 몽골족 여진족 등 북방 기마 민족이 많이 섞여 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이성계는 고려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중원에 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아래 그림은 이성계 부친의 부(친)원에서 친고려로 의사결정하게 된 내용을 필자가 현대경영기법인 SWOT 분석을 한 것이다.

    3.전쟁 잦은 고려 말 불패의 맹장 이성계 인기 최고
    이성계는 무술의 천재일 뿐만 아니라 황소 뿔을 한손으로 잡고 황소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의 천하장사였다. 총이 없던 그 시절 무력으로는 그에게 당할 자가 없었다. 원을 몰아내는 전투와 왜구,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전쟁에 시달리는 고려 말에 전투마다 승리하는 불패의 명장 이성계는 조정은 물론 백성들의 인기가 드높았다. 이성계는 공민왕 때인 1361년 26세 때 반란 두목 박의를 잡아 죽여 공을 세웠다. 그해 10 만 명의 홍건적에게 점령당한 개경 탈환 공격에 이성계는 모두가 꺼리는 선봉을 자원하여 단 2,000 명의 군사로 제일 먼저 성을 깨고 진입하여 개경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27세 때인 1362년 동북면 병마사(현재 도(道)의 행정과 군사 책임)가 되어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 만 명 군사와 싸워 승리했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활로 먼저 나하추 부하 장수의 말을 적중시켰다. 말이 비틀거리자 적장이 말고삐를 당기느라“워 워 워” 하면서 입을 벌리는 순간 적장의 입속으로 화살을 명중시켜 죽였다. 실로 영화의 한 장면이다. 이 멋진 장면을 직접 본 병사들의 그에 대한 강렬한 충성도와 높은 인기에 비하면 요즘 연예인들이나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불꽃놀이 때 터지는 일시적인 화려함 같은 것일 뿐이다. 왜? 이성계에 대한 인기는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보존해 주는 대가이며 나중에 새 국가를 창업하는 중요한 기본자산이었기 때문이다. 4. 총리 아들도 중징벌, 부하들에게는 예의 다하는 감성의 맹장
    감성은 논리의 반대 개념으로 타인들의 슬픔이나 기쁨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 같이 공감해주는 것을 뜻한다. 중앙에 인맥이 없던 젊은 장군 시절 총리급 고관의 아들인 장수가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군법을 어기고 그에게 대들자“너는 권력의 배경이 크니 더 맞아야 한다”하고 가차 없이 매우 심하게 곤장을 치는 위엄을 보여 힘이 없는 병사들에게는 통쾌감을 주었다. 전투 시에는 사자와 같은 맹장이고 최고 계급의 상장군(현재 육군대장)이나 부하들에게 항상 예의범절을 다해 대하였고 병사들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잘 파악하고 위로해 주어 모든 병사들과 장수들이 그의 부대에 배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니 전투 시 병사들의 기상과 사기는 철벽을 부수고도 남았고 이성계와 같이 전투하는 자체가 자랑이고 기쁨이었다. 그는 멀리 달아나는 3 마리의 쥐들을 활로 살짝 쏘아 화살만 맞고 도망가게 할 정도로 신기(神技)의 명궁이나 활쏘기 대회에서는 상대방 실력 수준에 맞추어 비슷 하게 활을 쏘아 상대방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무술 재능을 자랑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며 항상 저자세로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맞추어서 응대를 하여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이성계의 카리스마 강한 맹장의 자질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겸손과 감성의 자질이 당시 개혁을 원하는 신진 사대부들의 마음에 들었다.

    5. 병사들에게 기쁨을 주는 감성의 위화도 회군 명령
    1388년 고려 우왕과 보수파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철령 이북 땅에 대한 지배통보에 대한 고려의 반대 요구를 명나라가 거절하자 엣 고구려 땅 회복을 위해 명나라 와의 결전을 위해 5만 명의 병력과 2만 필의 전투마 출병을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명령을 했다. 이성계는 출병을 4 개의 이유를 들어 반대(4대 불가론: 아래 그림 밑 참조)를 했다. 그러나 그는 우군도통사로 출병해 압록강 건너 있는 요동지방으로 진군 중이었는데 압록강에 비가 많이 와 군대를 멈추고 압록강 가운데 섬 위화도에서 진을 쳤다. 비가 많이 와 강물은 불고 병사들의 막사에 비가 줄줄 새어 막사 바닥과 옷은 다 물에 젖어 잠은 커녕 휴식도 전혀 취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역병은 돌고 식량은 부족해 병사들은 병들고 배고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다 고향에 가 있었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이렇게 잠 한잠 못자고 추위와 굶주림과 전쟁 공포에 떨던 병사들에게“병사들이여 기뻐하라! 우리는 전쟁터에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제군들이여 나를 따르라” 하는 회군명령이 이성계 장군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정말 병사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감성의 명령이었다. 병사들은 기뻤다. 산 정상 백마 위에 높이 올라 탄 이성계 장군의 늠름한 모습은 명장을 넘어서 불쌍한 병졸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살게 해주는 고마운 하늘님의 인자한 모습이었다. “장군 고맙습니다! 우리를 사지(死地)로 몰아낸 최영을 무찌르는데 앞장서겠습니다.” 하고 회군부대는 노도 같이 수도 개경으로 진격해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세력은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내 쫒고 창왕을 새로 세웠다.

    6. 백성들 기쁘게 하는 감성의 대 토지개혁
    명장으로 백성들의 인기가 많다고 반석위에 서는 새 나라를 건국할 수는 없다. 반석위에 새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새로운 이념과 철학이 필요하다. 당시 고려 말 사회는 귀족들은 물론 권력의 비호를 받은 사찰들도 타락하여 어마어마한 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 이자놀이도 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강제로 토지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등 귀족들과 사찰의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하늘이 귀족 지주들을 죽여주기를 기대하고 살 뿐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 백성들의 바람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계와 회군지지들인 신진 사대부들은 주자학을 정통으로 공부한 신진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불교 국가 고려를 주자학이념의 새로운 사회로 개혁하려는 사람들로 우선 토지제도의 전면적인 개혁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우왕과 창왕을 가짜 왕족이라 하여 내쫒고 허수아비 공양왕을 세웠다. 공양왕 2년(1390년)에 모든 토지문서를 개경 한복판에 모아 불태워 버리고 새로운 토지제도로 개혁을 했다. 백성들을 갈취하고 짓밟던 모든 토지문서가 불에 타 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죽이고 싶은 귀족 지주 놈들의 땅이 없어지는 것만 봐도 속이 뻥 뚫리고 굶어도 살 것 같았다. 이성계는 이렇게 백성들의 뼈아픈 고통과 절망을 인식하여 공감해 주고 해결해주는 감성적인 개혁을 한 것이었다. 7. 감성 경영인 이성계 백성을 위해 중국 정벌 준비
    1392년 7월 위화도 회군과 토지개혁으로 얻은 인심을 기반으로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서 조선이 건국되었다. 대륙기질의 이성계와 신진개혁가 정도전은 중국 중원 정복에 대한 웅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는 하였지만 중국(명나라)의 굴욕적인 간섭을 이기고 백성을 위하려면 오직 전쟁에서 중국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화도 회군시의 요동정벌계획과는 전혀 달리 중국에게는 겸손하게 저자세로 대하면서 몇 년 동안 철저히 군사 훈련을 시키고 군량과 각종 보급품도 다 준비하고 국가를 전쟁의 군사시스템으로 전환했다. 1397년 중국에서 외교문서 시비로 계속 정도전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고 조선 사신들을 처형하자 이성계는 중국을 정벌하기로 결심했고 출진 명령만 내리면 되었다. 1398년 8월 출병을 결심했는데 이성계가 갑자기 중병으로 누웠다. 상황은 정벌 반대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중병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 이성계의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5남 이방원(3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중국 정벌을 계획한 정도전, 남은 등은 이방원 일파에게 모두 죽었다. 이렇게 이성계의 중국 정벌 꿈은 아쉽게 끝났다. 아래 그림은 이성계의 자질과 조선건국 및 중국정벌 준비의 그림이다.

    8. 나폴레옹은 영웅 심리에 불타 계속 전쟁하다 패배
    나폴레옹은 로마의 시져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와 같이 유럽의 최고 영웅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출생하여 친 프랑스파 귀족인 부친을 따라 파리에 와서 유년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24세 - 26세의 대위 시절 불란서 혁명 후 2번에 걸쳐 반란을 포병부대로 진압한 공으로 육군 소장으로 특진되어 27세 때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그는 천재적인 군사 작전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이집트 등을 정벌하고 승승장구하여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루소 등의 계몽가에 영향을 받아 민주공화제에 매력이 끌리기도 했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심취해 야망도 키우는 등 이중적 성격이었다. 1804년 35세 때 인민 투표로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 즉위 후 그의 영웅 심리의 전쟁욕심은 더욱 불탔으나 1805년 영국과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패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완전 대패하고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엘바 섬으로 귀향 갔다. 그는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재기하였으나 단 100일 천하를 누리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등 연합군에 대패해 다시 체포되어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에 귀양 가 있다 52세에 죽었다. 아래 표는 이성계와 나폴레옹의 인생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성계와 나폴레옹 모두 시골 출신으로 혼란기에 반란군을 진압하고 20 대에 장군이 된 군사의 천재들이며 후에 국가통치자가 되었다. 전체 인생과정을 보면 이성계가 나폴레옹보다 승리자이다.

    9. 나폴레옹이 이성계를 배웠다면 패배는 없었을 것
    나폴레옹은 최후에 패배했으나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던 공으로 프랑스 최고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성계는 무패 맹장이며 중원정벌의 꿈이 있었음에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자로 잘못 인식되어 왔다. 명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저자세였다고 사대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한국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저자세로 군사 및 경제시스템을 미국에서 그리고 각종 과학기술은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면 지금의 한국도 사대주의 국가인가?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때로는 저자세로 외국의 발달된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도자의 지혜롭고 현명한 장기 전략이다. 아래 표와 같이 이성계는 북방 대륙기질은 물론 인간성,도덕성,군사능력,국제정세,현실파악 능력,카리스마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국가통치자의 자질과 리더십을 갖고 있었으며 불패의 세계 최고 명장이다. 그는 나라와 백성의 삶을 위하여 오만하게 간섭하는 중국을 정벌할 웅대한 꿈을 실현하려 했다. 반면에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사람의 기질로 솔직하나 거칠며 독선적인 성격이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민의 영웅이 되고 황제가 되자 영웅이라는 인기의 과욕에 사로 잡혀 자신의 군사적 천재성만 믿고 계속 전쟁을 하다 실패한 인물이다. 나폴레옹이 이성계 인품과 리더십을 배웠다면 영웅 심리에 빠져 전쟁을 계속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의 패배도 없었고 엘바 섬과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살이 가는 불행도 없었고 더 위대한 영웅으로 인식 될 수 있었을 것이다.

    10. 겸손하게 준비하는 이성계 배워 통일 위한 국력 배양
    이성계는 당대에 당할 자가 없는 무술과 군사작전의 천재이고 천하장사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과 예의로 대인관계를 하면서 철저한 준비를 하여 새 나라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보다 국토가 40 배 이상 크고 인구가 20 배 많은 대국 중국을 정벌하는 것은 대전쟁이다. 아주 세밀하고 용의주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저자세로 외교하는 한편 중국 정벌을 위해 뒤에서 군사력을 증강시킨 것이다. 요즘 같은 미묘한 국제정세에 한국은 대미 대중관계에서 겸손과 예의로 외교하면서 조용히 경제력과 국방력을 미국과 중국에 버금가게 증강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경제력과 국방력이 강하면 언젠가 국제사회의 힘의 균형이 깨질 때 통일은 물론 간도 땅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물론 개인도 기업도 이성계처럼 하면 반드시 성공을 할 것이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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