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3 글로벌 경영가 왕건이 정복자 징기스칸을 이긴다

浮萍草 2014. 4. 16. 10:39
    국 역사의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 중 중세 암흑시대에 휴매니즘의 글로벌 개방 정신을 갖고 있던 장군 출신의 창업제왕 고려 태조 왕건이 있었다. 그는 관용과 포용의 글로벌 개방정신으로 국가를 창업하고 경영하였다. 한편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인 징기스 칸은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대륙정벌에만 눈이 어두워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면서 지배하였다. 왕건,징기스 칸 중 누가 더 위대한 리더이고 우리는 누구를 배워야 할까? 왕건이야 말로 지금 우리 한국이 새로운 도약을 위해 배워야 할 위대한 리더이다. 1. 왕건은 姓이 없는 평민 출신으로 후삼국 통일
    왕건(王建)은 통일 신라 말기 877년 송악(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용건(龍建)으로 용을 만든다는 뜻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으로 제왕을 일으켜 만든다는 뜻이다. 이들의 이름은 성(姓)이 없어 귀족층이 아니고 평민층인데 규모가 큰 해상 무역상이고 재력가였다. 즉 이들 가족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호족으로서 혼탁한 통일신라 말기에 감히 후삼국을 통일할 왕이 되는 큰 꿈을 꾸고 이름 그대로 왕건을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최고의 문무 교육을 시켰다. 후에 왕건은 918년 왕이 되고 936년 후삼국을 완전 통일했다. 2. 부족장 첩의 아들인 징기스 칸 이복형과 은인도 죽여
    징기스 칸의 원래 이름은 테무진으로 부족장 첩의 아들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다른 부족에게 살해를 당한 후 매우 혹독한 환경에서 상장하였다. 소년 테무진은 아버지의 부족장 계승을 위해 이복형을 죽이고 쟈무카라는 다른 부족의 소년과 의형제를 맺었다. 1204년 그는 자기를 칸으로 추대했던 옹 칸과 의형제 쟈무카까지 잔인하게 죽인 후 몽골 초원을 장악했다.

    3. 왕건은 해전의 명수, 징기스 칸은 기습과 공급관리의 천재
    해상세력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바다에 밝던 왕건은 궁예의 심복 부하가 되어 해군을 지휘하여 서해로 이동해 후백제 견훤의 주력부대가 진치고 있는 나주로 상륙 하여 후백제군의 뒤를 치고 점령해 궁예왕의 신임을 완전히 얻었다. 그 후 수많은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다가 궁예왕이 죽은 다음에 918년 왕이 되었고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바다의 중요성을 강조한 왕건의 전함의 길이는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의 산타마라아호 보다 약 4 m 가 더 길어 31 m가 넘었고 아주 빼어난 조선술로 제작 되었다. 징기스 칸은 말, 양, 소 등 가축이 많은 몽골 초원에서 성장한 장수였다. 기병대가 그의 주력 부대이고 육전에는 최강이나 바다에 어두워 해상 진출의 중요성을 몰랐다. 징기스 칸의 몽골군은 약 11 만 명의 기병부대로 유럽 군대를 초스피드로 공격하여 격파한 병력의 수가 약 1000만 명으로 유럽대륙을 마치 파밭을 밟아 작살내듯이 누비고 다녔다. 무기 및 휴대장비가 최소로 경량화 된 몽골 기병대는 하루 평균 진군 속도가 40 km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차부대 진군속도와 비슷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서울서 대전 거리인 160 km를 진군하여 미처 전투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적군을 기습 공격하여 순식간에 괴멸시켰다. 몽골 기병대는 보급부대 없이 각 병사가 보급품을 직접 휴대하는 전투부대로만 편성되어 있고 모든 물자는 창고 없이 무재고로 관리되었다. 이렇게 효율적인 군대와 조직은 현재까지도 없다. 징기스 칸 부대 보급방법을 현대 경영의 공급사슬관리론으로 보면 생산자가 유통단계 없이 직접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 전달하여 유통단계서 발생하는 모든 제반 비용을 대폭 절감하는 것과 똑 같아 현대기업들이 꼭 구축하고 싶은 공급방법이며 앞으로도 기업,군대,정부 등 조직경영의 주요 연구과제이다.

    4. 왕건 집안은 현대 경영기법인 SWOT 분석으로 전략 수립
    왕건 가정의 경영이 바로 기업경영이고 국가경영이었다. 그들은 후삼국을 통일할 왕을 배출한다는 장기적인 웅대한 비젼과 계획을 갖고 있어서 많은 선원들과 사병(私兵)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벌어야 했고 가정을 조직화해야 했다. 또 목적 달성을 위한 장기 전략도 필요했다. 1100년 전 시대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내부조직과 외부의 환경을 현대 경영기법인 SWOT(Strength, Weakness Opportunity, Threat) 개념으로 분석한 결과 WT (weakness & threat)를 선택해 살아남는 전략을 우선적으로 택하였다. 왕건 집안의 SWOT 분석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다.

    5. 왕건은 통일을 위한 군사 전략도 SWOT 분석으로 수립
    왕건이 고려왕이 된 후에도 아직 반대세력이 남아 있었다. 후백제 견훤왕의 군사력은 막강하고 또한 호족들도 세력이 팽배하여 아직 그들을 무력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건은 SWOT 분석을 하고 SO(strength & opportunity)를 택하여 후삼국 통일을 위한 군사 전략을 다음과 같이 수립했다. 1. 신라와 우호적으로 연합해 후백제와 싸워 이긴다. 그러면 약한 신라는 저절로 굴복한다. 2. 호족들의 반발과 적대가 있으면 후백제와 전투가 어려워지므로 호족들의 딸들과 혼인 해 우호관계 맺는다. 그 결과 왕건은 29명의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산 남자가 되었다. 3. 후백제 견훤 왕 父子간의 갈등이 있자 견훤 왕을 관대하게 포용해 형으로 우대하고 견훤 왕의 아들 신검 부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하자 신라 경순왕이 항복해 통일을 이룬다.

    6. 왕건과 징기스 칸이 전쟁한다면 왕건이 단연코 승리
    왕건의 국가 경영 목적은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 받고 백성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면서 포용력이 크고 온화하며 인내심이 강하여 그에게 목숨을 내놓고 충성을 하는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김락 같은 맹장들이 휘하에 매우 많았다. 적과의 전투에서는 매우 용감하고 카리스마가 뛰어 났으나 부하들에게는 부드럽고 온화한 덕장이었다. 그는 해전에도 뛰어난 명장으로 개방적이며 글로벌 지향의 국가경영을 열어 고려는 당시 아랍 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여 예성강 벽란도에는 외국배들로 항상 붐볐다. 한국의 영어 명칭 Korea 도 고려시대에 유럽으로 corea(고려)로 알려진 것이 그 기원이다. 왕건의 고려는 귀화 외국인에게도 높은 벼슬을 주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했고 남녀의 재혼은 물론 연애와 이혼도 허용되고 어느 정도 남녀 평등한 선진사회였다. 왕건의 글로벌 정신이 살아 있는 한국은 글로벌 경영에 성공하여 무역 규모 1조 달러의 세계경제 10위 강국이다. 징기스 칸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맹장이며 기병대 운영의 천재로 카리스마가 매우 강하였고 부하와 백성들에게 매우 무서운 존재였다. 그는 이복형과 친구, 은인도 권력을 위해 잔인하게 죽이는 등 인간을 정복하고 세계 모든 사람들을 지배만 하려 하였다. 정복욕에만 눈이 어두운 그는 다른 나라와 민족을 말발굽으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그의 몽골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군대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서하에서 전투 중 낙마하여 죽은 그의 시체는 아직도 못 찾고 있어 그의 무덤도 없다. 몽골의 원은 거란족의 명재사 야율초재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 살육을 줄이고 법치문화 국가로 전환하려 했으나 그가 죽자 곧 쇠퇴하기 시작해 겨우 100 년 정도 밖에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래는 왕건과 징기스 칸의 개인적인 리더십의 특성과 국가경영 리더십을 요약한 것으로 징기스 칸은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정복자이고 왕건은 21세기인 현대에도 배울 점이 많은 미래지향적인 위대한 글로벌 전략 경영가임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이 살아 있어 현시대에 경쟁한다면 필자는 왕건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1000 년 전에 만나 전쟁을 했어도 글로벌 전략가이며 육전과 해전 모두에 명장인 왕건이 승리하였을 것이다.


    7. 고려 같이 과부도 왕비가 되는 개방정신으로 새로운 도약
    우리 한국의 미래를 위해 왕건의 글로벌 개방정신을 아래와 같이 계승하자. 첫째 한국의 통일과 미래를 위해 왕건과 같이 장기적인 비젼과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하면서도 주도면밀한 창의적인 통일전략을 수립해 유연 하게 진행해 나아가자. 둘째 고려의 외국인 귀화 정책을 계승하자. 고려 말 설장수와 변안렬은 위구르와 원에서 온 귀화 고려인으로 각각 판서와 상장군(지금의 육군 대장)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와 같이 능력 있는 외국인을 귀화시켜 고위직으로 임명하여 한국 사회에 충성을 바쳐 이바지하게 하자. 셋째, 아들·딸 상속이 평등한 고려는 결혼 후 처가에서 일정 기간 사는 장가제도의 결혼관습 국가로 이혼 및 재혼이 자유스러웠고 과부도 왕, 권력자(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최우)의 부인이 되었다. 이제 여성들을 시집의 개념에서 완전 해방시켜 여성 인력이 모든 조직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적극적으로 일하게 하여 한국을 세계 초일류 국가로 만들자. 넷째, 왕건이 호족들을 힘으로 지배하지 않고 결혼정책으로 포용하듯이 우리의 대기업들과 기득권자들도 중소기업들과 서민들을 껴안고 공생하는 새로운 경영방법 들을 창출한다면 경제민주화와 동반성장을 함께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는 고구려 계승국가로 군사력을 중요시하였다. 당시 인구 3백만-4백만 정도의 고려가 정규군인 광군사 30 만 명을 비롯하여 예비군까지 60 만 대군을 보유해 요,금,몽골 등 주변 강국들에 대해 당당하게 맞섰다. 한국도 적화통일을 노리며 핵무기 등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는 북한은 물론 주변 강국들에 비하여 월등한 군사력을 가져야 그들과 당당히 맞서며 창조경제 국가와 복지국가로도 나갈 수 있다. 부국강병의 한국을 만들자. 국방력이 약하면 복지는 커녕 국가는 패망하고 국민은 노예로 전락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ㆍ왕건 정신의 계승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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