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4 황진이의 서비스 패러다임,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에 앞서

浮萍草 2014. 4. 17. 06:00
    1. 서비스의 어원은 SERVUS(종, 노예)에서 유래
    비스는 라틴어의 노예를 뜻하는 servus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즉 서비스란 노예가 수행하는 일을 뜻한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뜻에는 위의 주종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 종을 servant라 하며 종 노예의 일이 바로 service의 본래 개념이다. 
    과거 대한민국 헌법에서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公僕: 공적 노예)이라 규정했고 영어로 공무원을 civil servant라 하는데 모두 다 servus 즉 노예의 개념에서 유래
    되었다고 본다. 
    현대에는 주종관계가 없으므로 서비스 제공자가 근무시간 동안에는 고객을 하인이 주인 모시듯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500 년 전 조선시대 황진이는 종의 신분인 창기이면서도 지체 높은 최고위층 고객들을 친구처럼 대하면서도 고객에게 기쁨을 창조 및 제공하여 고객 
    재방문에 대성공했다. 
    황진이는 당시대의 규범을 완전 파괴하고 새로운 서비스 패러다임으로 그 시대의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을 고자세에서 뒤흔들었다.
    
    2. 기생은 종의 신분이나 양반 사대부들과 자유연애 가능
    조선시대의 기생은 노비(奴婢) 신분과 같으며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은 비(婢), 즉 여종의 신분이므로 기생이 하는 일이야 말로 서비스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원래 뜻의 서비스(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비의 인구는 전 인구의 약 1/3 정도라 하며 이들은 각종 차별대우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돈 벌면 사유재산은 물론 노비도 소유할 수 있었다. 특히 기생들은 종과 같은 천인 신분이지만 양반 사대부들과 자유연애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첩으로 들어 앉아 친정을 살리기도 했다. 3. 황진이는 시각장애인의 딸로 예술과 문학의 천재
    황진이는 조선 11대 중종 명종 때 사람인데 자유를 거침없이 추구하면서 인생을 산 명기였다. 그녀는 송도(개성)의 황 진사 종인 첩의 딸(서녀: 庶女)인데 그녀 어머니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설이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것을 보아 설득력이 있다. 기생이 된 이유도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규범으로는 서녀는 양반의 첩이 되어야 하는데 첩이 되느니 자유분방한 삶을 택해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양반의 첩이 되면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그녀의 자녀들도 종으로 세습 되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생이 되었을 것이다. 외모는 여러 기록에서 뭇 남성들이 흠모하는 빼어난 미인이라 했으니 요즘 말로 얼짱이다.

    그녀는 어려서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워 춤과 노래,악기에 능통함은 물론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사서삼경 성리학을 공부하여 지식인 선비들과 학문적 토론과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겼다. 고명하다고 유명한 대성리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다 실패한 후 서경덕의 인품에 반해 제자가 되어 그에게 깊은 성리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를 스스로 송도삼절이라 칭했다. 그녀는 양반 여자들도 글을 모르는 시대(7대 세조 비 정희왕후도 글을 몰랐음)에 시(時),서(書),화(畵)에 뛰어난 지성미를 갖춘 전위 문학인으로서 몇 백 년의 시대를 앞서가는 신 패러다임의 여성이었다. 애인인 선전관(정3품-종4품,국장-과장급)이며 명창인 이사종을 그리워하는 시조“동지”와 왕족 귀공자 벽계수를 유혹하는 시조 “벽계수야”는 그녀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녀의 시조는 상당히 많다고 전해지는데 주로 연회장에서 즉흥적으로 지었다고 하고 때로는 양반 사대부들을 조롱하는 시도 읊었다고 한다. 그녀의 문학적 자질은 대단했다. 4. 당시 패러다임 파괴, 최고위층 고객들도 동네 친구 삼아
    조선 시대에 종의 신분인 기생의 서비스 수행이 교만하다거나 고객인 양반에게 거슬리기라도 하면 목숨부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러한 시대에 천한 종의 출신 기생 황진이는 지체 높은 고관대작의 고객을 동네 친구처럼 대하였다. 까딱하면 죽음을 초래할 일이다. 그런데 500년 전 밑바닥 신분의 황진이는 무슨 신출귀몰할 재주가 있어 그 지체 높은 양반 사대부들이 황진이의 서비스를 받지 못해 안달을 했을까? 외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외모보다 더 뛰어난 중요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기생으로서 해야 할 서비스 패러다임을 완전 파괴하였다. 고객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굴종하는 서비스를 하지 않았고 당당했고 때로는 고관대작의 고객도 조소하면서 응대를 했다. 그래도 지체 높은 고객들은 그녀를 찾았다. 시,서,화에 뛰어난 그녀는 고객을 친구삼아 시와 문장으로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를 하면서 마음이 내키면 거침없이 고객과 같이 가야금을 타면서 창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낮은 자세로 머리 숙여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올리는 그런 일상적인 서비스보다 자연을 함께 노래하며 세상사와 인생철학을 논하는 풍류가 지식인 고객들에게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을 주었다. 사대부들에게는 황진이의 서비스를 받아 본 경험 있다는 그 자체가 자랑이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런 자유를 누린 여인은 그녀 혼자일 것이다. 황진이가 시각장애인의 딸이어서 심청의 경우처럼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효성을 다해 효녀문을 남기기 위해 심청처럼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황진이는 목숨을 던지는 서비스보다 돈 많은 고관 친구로부터 삼백 석 아니라 삼천 석이상의 돈을 기증 받아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였을 것이다. 5. 황진이의 서비스에는 시 창작과 문사철(文史哲) 지식도 융합되어
    조선 13대 왕 명종 때 사대부 백호 임제는 개성 유수(종2품,차관급) 송순의 잔치에서 딱 한 번 만나본 황진이를 못 잊어 평안도 도사(종5품 이하 직)로 부임도중 양반의 신분을 잊고 죽은 황진이 묘에 가서 시를 읊었다. 선조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이덕형은 황진이의 예술적, 문학적 자질이 천재였다고 칭찬을“송도기이”에 기록했다. 그녀는 뛰어난 예술적 자질과 문사철 지식을 가진 지성 미인으로 500년 후의 현대 서구 지식인 여인들도 감히 엄두를 못내는 당시대의 규범과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자유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좌찬성(종1품, 부총리급) 소세양과 30일의 동거약속을 하고 동거 30일 지난 후 이별의 한시(漢詩)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작성해 줄 정도로 몇 세기를 뛰어넘는 자유인이었다. 소세양은 황진이의 이별시를 받아 읽고서 완전히 넋을 잃어 황진이에게 동거를 더하자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500 년 전 고정된 사회규범과 관습에 눌려 있는 답답한 여인들만 보았던 지식인 사대부들에게는 춤과 노래,악기에 달인인 황진이와 함께 시를 나누고 고정관념을 파 괴하면서 자유롭게 文史哲의 얘기를 나눌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황진이의 실력과 재능이라면 할리우드의 초일류 영화배우가 되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거나 뛰어난 여류 문인이 되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대한민국의 국위를 세계만방에 선양할 터인데 조선시대의 규범이 그녀를 기생으로 만든 것이다. 현대 황진이라면 바이올린의 명연주자요 노래는 명가수요, 춤은 무용의 대가이며 문단의 시인이며 화가요,시대를 앞서가는 자유인의 철학을 모든 재능에 융합한 지성미를 갖춘 여인이다. 이러한 여인의 공연을 이 세상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유튜브 접속 십 수억 번일 것이다. 황진이는 불세출의 융합서비스 창조의 여왕이고 선구자다. 그녀의 융복합 서비스는 아래 그림과 같이 형성되었다.
    6. 스티브 잡스 성장배경과 융복합 철학
    스티브 잡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입양아로 소년 시절 말썽꾸러기였으며 대학도 1 년 안 되어 중퇴하였다. 이런 그의 반항적인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이 기존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정신적 세계를 형성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고교 시절 전자분야 지식에 몰두 Reed 대학시절의 동양철학 공부와 서예수강 및 전자게임 직원생활을 거친 후 친구인 전자 엔지니어 위즈니악과 창업을 해 IT 사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는 CEO 로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다가 애플 CEO로 복귀 후부터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과 연결되는 신제품을 내놓아 대성공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그를 세기적인 대성공의 반열로 올려놓은 것이다. 디자인에서 색과 모양을 중시하고 음악에 관심을 두어 아이 팟,아이 맥을 개발하였다. 그 후 아이 폰과 아이 패드를 개발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열어가는 창조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는 휴대용 전화기와 무선 인터넷 통신연결을 이용하여 각종 기술들을 융합하는 새로운 융복합 창조 세계를 열었다. 그의 융복합 창조능력은 어린 시절 부터의 굴곡 많은 인생 여정과 CEO 생활 실패 및 성공과,특히 대다수 미국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동양철학과 서예공부 등의 다양한 경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융복합 창조능력 형성은 아래 그림과 같다.

    7. 스티브 잡스의 융복합 철학과 황진이의 서비스 융복합
    스티브 잡스는 자유와 벤처정신의 고장 미국 실리콘 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했고 황진이는 약 500년 전 자유가 전혀 없는 종의 신분으로 조선에서 자랐다. 자유와 첨단기술의 고장에서 성장한 스티브 잡스는 기존 고정관념을 파괴하려 했고 자유가 없는 천한 종과 기생의 신분인 황진이는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사회규범 자체를 파괴하며 목숨 걸고 자유를 추구했다. 황진이는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부를 했고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의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경험으로 융합의 창조 능력이 축적되었다. 아래 표들은 두 사람의 생애와 그들의 융복합 능력을 비교한 것이다.

    융복합 능력을 보면 황진이의 문학 및 성리학 등 문사철지식과,음악,무용,기악,그림,서예 등 다양한 예술 독창성이 스티브 잡스보다 더 독특하다. 그리고 천민의 신분이었던 황진이의 서비스융합을 활용한 기존 고정관념의 파괴는 스티브 잡스보다 이미 500 년 앞서 있었고 더 나아가 그녀는 당시의 시회규범과 패러다임을 홀로 전력을 다해 파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은 후 지배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대부분의 그녀 행적 기록과 작품들이 없어졌다. 황진이 행적과 작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녀의 평가는 더 높아 질 것이다. 8. “고객은 왕이다” 고정관념 파괴한 황진이의 융합창조 배워야
    197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몬(경제학자는 아님)은 수많은 다양한 경험의 축적으로부터 경험들이 융합되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했다. 황진이와 스티브 잡스 모두 다양한 경험자들이면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가였다. 이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경험들이 융합되어 창조된 서비스는 지금 한국의 외모지상주의 서비스와는 다르며 외모보다는 독창성 있는 융합 창조능력의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주고 있다. 특히 현대 서비스 조직들이 “고객은 왕이다”라고 무조건 강조하는 고정관념도 버려야 한다고 황진이 서비스는 시사하고 있다. 모든 불치병을 완치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환자들은 그 의사의 진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낮아질 것이다. 서비스 능력이 탁월하지 못하면 고객 앞에서 한 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다. 이제 고객 앞에서 낮아지지만 말고 아래 그림과 같이 한국의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무한 잠재력(무한대의 경험)으로 한국의 문사철 지식과 독창적 문화, 동방예의 지국의 예의범절을 모든 서비스 분야에 응용 융합하는 신 패러다임의 서비스 문화를 창출하여 세계 서비스시장을 석권하자.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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