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식 이야기

굴비

浮萍草 2014. 4. 3. 12:23
    왕위 찬탈을 위해 난을 일으킨 이자겸은 왜 왕에게 ‘굴비’를 보냈을까?
    ▲ 굴비. 사진=쿡쿡TV
    려의 왕 인종(仁宗, 1109~1146)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외척세력 이자겸(李資謙 ?~1126)은 왕좌를 찬탈할 야망으로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죗값으로 귀양살이 해야 했다. 이자겸이 유배를 떠난 곳은 영광. 이곳에서 건조한 참조기의 맛을 보고 반한 이자겸은 이를 인종에게 진상했는데 이때 진상품에 굴비(掘非)라는 글귀를 적었다고 한다. 귀양살이를 하고 있으나 굴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굴비의 이름에 얽혀 전해지는 설화다. 하지만 굴비가 ‘굴비’가 된 진짜 연유는 그 모양과 관련 있다. 굴비를 만들기 위해 조기를 말리는 과정에서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매달면 조기의 등이 구부러지게 되는데 이 모양새를 따서‘구비(仇非)조기’라는 명칭이 붙었고 훗날 이 이름이 변형돼 굴비가 된 것이다. ‘구비(仇非)란 구부러져있는 모양새를 뜻하는 말로 이를 한자어의 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굴비는 제철에 대량 어획한 조기를 효과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염장을 하면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조기의 아가미를 헤치고 조름을 떼어낸 후 간수를 뺀 천일염을 활용해 절였다가 건조시키면 굴비가 완성된다. 보관기술이 발달한 현재는 살점이 쫄깃해질 정도로 말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옛 선인들이 즐겨먹던 굴비는 북어와 같이 바싹 말린 것이었다. 봄철에 잡은 조기를 오랜 기간 먹으려면 수분을 완전히 없애야만 했던 것. 이렇게 만든 굴비는 먹기 전에 물에 살짝 불려 찌거나 지져서 먹었다고 한다. 요즘 같은 굴비는 옛날로 치자면 간조기에 해당한다. 굴비의 본고장이라고 하면 영광 법성포를 꼽는다. 법성포가 굴비로 유명해진 이유는 조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석수어(조기의 다른 명칭)는 영광군 서쪽의 파시평(波市坪 지금의 법성포 일대)에서 난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때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모여 그물로 잡는다. 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 국용으로 쓴다’라고 전하고 있다. 옛부터 법성포 바다 일대가 조기를 어획하는 중요 어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영광에서 조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쉬이 찾아볼 수 없다. 남쪽의 따뜻한 바다에서 월동을 마친 조기들이 봄이 되면 서해로 회유를 해야 하는데 기후 변화로 인해 제주도의 서쪽바다 인근까지만 올라오기 때문. 현재 조기의 주요 어획장소는 제주도의 추자도 일대와 목포다. 더 이상 굴비를 만들 때 사용되는 조기의 주요 어획지가 아닌 영광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영광굴비는 여전히 가장 유명하다. 조기를 염장하는 영광의 전통방식과 건조시킬 때 필요한 지리적 조건이 좋아 맛있는 굴비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영광의 굴비는 타 지역에서 천일염을 녹인 물에 조기를 담갔다 말리는 것과 달리 ‘섶간’이라는 염장법을 쓴다. ‘섶간’이란 1년 넘게 보관해 간수를 충분히 뺀 천일염으로 직접 조기를 염장하고 이를 겹겹이 쌓아두는 것을 말한다. 조기의 수확철인 봄부터 이를 굴비로 만드는 기간인 여름 사이, 법성포의 습도와 일조량은 굴비를 말리는데 적절하다. 황태와 마찬가지로 굴비를 건조시킬 때 해풍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맘때쯤 법성포에는 꾸준히 바다 쪽에서 북서풍이 불어와 굴비가 만들어지는데 좋은 영향을 준다.
    Food Chosun ☜        정재균 조선닷컴 라이프미디어팀 PD jeongsan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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