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생로병사

"나는 우울증을 느끼는 腦를 다쳤나 봅니다"

浮萍草 2014. 4. 3. 11:31
    사지마비 9년째 '한국의 호킹', 여객기·식당 이용에 불편 겪고
    정치 입문·치료 권유 시달려도 꿋꿋하게 주변에 유쾌함 안겨줘
    장애인 된 뒤 삶 알게됐다는 그… '再活 연구는 내 몫' 책임감 토로
    ▲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한국판 스티븐 호킹'으로 널리 이름난 이상묵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와 지난달 네덜란드와 덴마크,스위스를 6박 7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유럽의 선진 장애인 재활 공학 연구 활동을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그는 2006년 미국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뼈 척수를 다쳐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된 장애인이다. 9년째 휠체어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활동 도우미 손에 기대어 살아간다. 음식은 누군가가 먹여줘야 하고 물은 빨대로만 마신다. 그의 말로는 남몰래 혼자서 무엇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생활이 없는 생활이란다. #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는 빡빡한 일정 탓에 거의 매일 비행기를 타야 했다. 휠체어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그의 몸이 비행기 좌석에 앉는 과정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국제선 큰 비행기는 게이트까지 휠체어가 접근하지만 작은 공항의 단거리 비행기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는 짐이나 음식물을 나르는 사다리차에 올라타서 비행기 뒷문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비행장 맨땅에서 2층 높이의 비행기 출입구까지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야 할 때는 항공사 직원 두세 명이 달려들었다. 낙상할까 봐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하다. 덴마크 북부 지방 공항에서는 휠체어 장애인을 위한 계단 이송 전동 장치가 나왔다. 특수 상황을 위한 장애 보조 장비가 개발돼 있다는 사실에 그와 나는 감탄했다. 반면 지난해 유럽의 한 기차역 광장에서는 휠체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지갑을 소매치기가 다가와 훔쳐 줄행랑을 친 적이 있단다. 이 교수는 장애인도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식당을 예약할 때는 항상 출입구 상태를 물어봐야 한다. 문턱이 높으면 휠체어 진입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좌석 배치도 고려 대상이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식사하기 때문에 다른 손님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전동 휠체어가 들어갈 약간 널찍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상석(上席)을 장애인에게 내주는 것이'장유유서'다. '모든 순서는 장애인 먼저'라는 뜻이란다. 이 교수는 전동 휠체어가 대개 식당 의자보다 높아서 자기와 같이 식사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를 우러러보며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맛있는 거 먹는 게 유일한 즐거움인데 운동을 할 수 없으니 맛있다고 많이 먹으면 살이 바로 찐단다. 그러면 엉덩이 피부가 눌려 욕창이 생기기 쉽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술은 속이 거북하지 않을 정도만 마셔야 한다고 했다. 복부 근육 신경도 마비돼 토할 수가 없어 큰일이 난다. 장애 초창기에 한번은 멋모르고 술을 많이 마셨다가 뱀이 자기보다 큰 동물을 삼키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분을 느꼈단다. # 사지마비를 낫게 해주겠다는 사이비 치료사들은 스토커처럼 요새도 잊을 만하면 찾아온단다. 의학적으로 걸을 수 없다고 판정받은 이후 한 번도 그런 사람에게 진료받지 않은 장애인은 아마도 자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과학을 전적으로 신뢰해 버텼지만 주변에서 장애인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돈은 돈대로 탕진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소진해야 다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이 교수의 막내 아이가 두 살 때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아이는 아빠가 걷는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모습만 본 게 제일 가슴 아프다고 했다. # 몇년 전 카이스트 대학생들이 연거푸 자살하여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교수는 서울대 총장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단다. 서울대에서 학생 자살이 없는 것은 학생들이 자기를 보면서'이상묵 교수는 저러고도 사는데 우리가 왜 자살 하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도 기여 수당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상묵 교수는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나 지역구 의원 공천을 제안받았다. 주변에서 나중에 과학부 장관도 할 수 있다고 떠민단다. 멀쩡한 몸으로 교수 할 때는 받을 수 없었던 대접을 장애인이 되고 나서 받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가 연구만 안 하면 교수처럼 좋은 직업이 없는데 그는 연구할 게 너무 많아서 정치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장애인으로 살게 되면서 우울하거나 아쉬운 것이 정말 없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은 내가 목뼈 손상을 당할 때 우울증을 느끼는 뇌(腦) 부위도 같이 다친 것 같다고 농담으로 말해요. 내가 항상 유쾌하니까요. 나는 장애인이 되고 나서 세상과 삶의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남자는 죽기 전에 감옥만 빼고 오만 군데를 다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장애도 그중 하나라고 여기며 살아 갑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재활 의료 공학을 앞장서 일으켜 세우는 데 나만 한 사람이 더 있겠어요? 할 일도 많고 갈 데도 많아 우울할 틈이 없어요."
    Premium Chosun ☜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 기자,의사 docto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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