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45> 서울 중구의 카바레들

浮萍草 2014. 3. 7. 21:46
    장바구니 들고 뒷구멍으로 입장하던…‘오후 4시의 춤바람’


    대낮에 가정주부들을 모아 영업을 한 퇴폐 카바레를 단속했다는 내용은 주요 일간지 사회면의 단골기사였다. 세계적 시설을 갖췄다는 플래카드를 내건 서울
    장안동의 무학성 카바레.
    1990년대부터 한국의 대중음악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대중음악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있던 댄스음악이 가장 중요한 음악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사람보다는 춤을 멋지게 추는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춤의 역사가 한국에서는 마치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의 수난사만큼이나 험난한 것이었다. 그 수난사의 정점에 카바레가 있다. 지난 시절 한국에서 춤을 추기 위한 업소는 그 명칭을 달리하며 진화해왔다. 개념정리를 하면서 가보자. 한국에서 본격적인 서양 춤의 도입은 해방이 돼 미군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해방의 기쁨으로 억제됐던 욕망이 분출됐다. 한국사회에서 각종 유흥업소가 새롭게 난립하기 시작했다. 그중 유독 댄스교습소와 댄스홀 카바레는 사회적 지탄의 표적이었고 집중 관리의 대상이었다. 댄스교습소는 일단 처음 추는 춤인 지르박, 맘보,차차차 등 미국에서 들어온 터치댄스인 볼룸댄스를 익히는 곳이었다. 이렇게 돈을 주고 춤을 배워서 유흥업소로 실습을 나가게 됐다. 댄스홀과 카바레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댄스홀은 오직 남녀가 터치댄스를 추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춤을 추기 위한 플로어 생음악 연주자 외에 다른 시설이나 프로그램은 없었다. 따라서 뒷골목에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영세한 비밀 댄스홀에서는 음반만 틀어놓고 춤을 추는 곳도 있었다. 이에 비해 카바레는 단순히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눈요기가 될 만한 각종 쇼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댄스홀은 파트너와 함께 들어가거나 파트너가 없으면 들어가서 눈치껏 구하는 곳이었다. 카바레는 파트너 없이 온 고객을 위해 댄서를 고용했다. 고객이 비용을 지불하면 댄스파트너를 제공했다. 따라서 카바레는 댄스홀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성인 유흥업소의 대표격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카바레들의 이름을 보면‘후로리다 캬바레’‘파라다이스 캬바레’등 영어로 작명된 곳도 있지만‘종로회관’‘동화홀’과 같이 명칭만 봐서는 구분이 안 되는 곳도 있었다. ‘서울구락부’ ‘국제구락부’와 같은 명칭도 카바레였다. ‘구락부’라는 말은 클럽(club)을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다. 그러니까 ‘국제클럽’은 지금의 홍대 앞 클럽이 아니라 중년들의 유흥업소인 카바레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춤이 ‘춤문화’가 아니라 ‘춤바람’이라는 주홍글씨를 얻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54년 영화 ‘자유부인’ 때문이다. 유부녀 춤바람 논쟁에서 시작됐다. 또한 1955년 댄스홀에서 부녀자를 농락해서 쇠고랑을 찼던 원조 제비족 박인수 사건으로 그 비극적인 운명이 시작됐다. 그 이후 정부당국은 댄스홀과 카바레를 집중 단속하기 시작했다. 단속에도 불구하고 춤 업소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 1956년부터는 댄스홀은 인정하지 않고 카바레만 엄격한 규정 하에 영업하도록 관리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번성하던 카바레는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생긴 자정 분위기로 14개소로 대폭 줄어들었다. 1964년에는 다시 늘어나 50개소에 이르게 된다. 당국은 이렇게 늘어난 카바레를 관리하기 위해 1965년 4월 2일 카바레업소 위생검사 요령을 각 보건소에 시달했다. 그 주요 내용은 손님으로부터 입장료를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댄스는 손님과 댄서 간 아니면 친근한 사이끼리만 할 수 있도록 하고 정원을 지키고 30㎝ 떨어진 곳에서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촉광을 밝히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의 일류 카바레로 손꼽혔던 장안동의 ‘무학성 카바레’의 경우 좌석수가 300여 개였다. 댄서만 100여 명, 거기에 악사들, 웨이터, 쿡 등 종업원을 합치면 거의 200명에 달했다. 하루에 이곳을 찾는 손님의 연인원은 경기가 좋을 때는 400∼500명이었다. 여기는 입장료로 남자 200원(1967년 당시 한국영화 입장료가 100원), 여자 150원이었다. 싱글로 입장해 댄서를 부르려면 A급 댄서의 경우 1000원 이상을 지불해야 했다. 성인들을 위한 춤문화만 존재하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등장한 청년문화 세대들은 춤문화를 새롭게 바꾼다. 그동안 탈선으로 지탄받았던 성인들의 터치댄스를 버리고 고고라는 노터치댄스를 들고나왔다. 따라서 성인들의 불건전한 춤문화 대 젊은이들의 건전한 춤문화로 비교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 업소들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1970년부터 시내의 1급 호텔에서 고고를 출 수 있는 대형 나이트클럽을 속속 개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호텔의 ‘투모로우 나이트클럽’ 국제호텔의 ‘레이보우 나이트클럽’ 천지호텔의 ‘천지호텔 나이트클럽’ 등이 그것이다. 명칭이 나이트클럽이 된 이유는 정부가 외국인이 이용하는 특급 및 1급 호텔에 한해 외화 획득을 명분으로 철야영업을 허가해줬기 때문이었다. 카바레 측은 나이트클럽에 맞서기 위해 더욱 대형화했고 젊은이들의 음악과 춤 경향을 받아들이는 전략을 쓰게 된다. 1973년 시청 앞의 프레지던트호텔 정상 31층에 ‘황궁’이 개업했다. 업소명이 말해주듯 모든 고객을 황제처럼 대우하는 황궁을 실현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최고급 카바레를 지향했다. 340평의 넓은 공간에 실내는 특히 8색으로 변하는 화이트 스톤 조각,황궁 스타일의 테이블에 왕좌를 연상시키는 황금빛 비단의자. 30평을 할애한 대형 스테이지는 상하 2단, 평면 2단의 무대가 버튼 하나로 조작됐다. ‘황궁’의 쇼는 모두 3부로 나뉘는데 제1부(오후 6시부터 8시까지)는 코리안 쇼 & 코리안 푸즈로 한국의 전통음악과 전통음식의 결합이었다. 국악인 이은관의 창과 가수 황금심의 민요메들리,각종 민속악기의 연주,22인조 황궁전속무용단의 민속무용을 보고 들으면서 18가지 한식요리를 맛보는 눈,귀,입의 향연이었다. 제2부(오후 8시부터 11시까지)는 파퓰러쇼. 당시에 유행하던 팝과 가요를 총망라하는 무대였다. 호주에서 내한한 자니 레간,줄리 브라운,흑인 소울자매 윙키스,중국의 인기가극 미자이젠,황궁무용단의 캉캉에서 스패니시 무용까지,그리고 박춘석과 그의 19인조 전속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수를 놓았다. 제3부(밤 11시부터 새벽 4시)는 록뮤직 & 록무용쇼는 젊은이들을 겨냥한 순서였다.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트리퍼스가 비트 있는 록음악을 연주할 때 무대 상단과 좌측에 당시에 인기 있었던 고고댄싱팀 와일드캐츠가 제대로 된 고고춤을 선보였다. 고급화, 대형화하던 카바레는 강남 개발이 진행되자 1975년을 넘어서면서 강남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강남지역에만 20여 개가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강남 쪽에 카바레가 늘어난 구체적인 이유는 서울인구 소산정책에 따라 한강 이북에는 카바레 신규 허가를 하지 않고 한강 이남에만 허가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당국의 퇴폐업소단속이 심해지자 한적한 변두리로 장소를 옮겨 감시의 눈을 피하자는 이유도 있었다. 카바레가 강남지역으로 확장하면서 또 다른 터닝포인트(전환점)를 맞이하게 됐다. 1974년부터 중동지역으로 건설업 진출이 활발히 이뤄졌다. 중동에 진출한 건설노동자들로부터 국내로 달러의 송금이 이뤄졌다. 파탄이 나는 가정이 생겨났다. 남편이 장기간 집에 없으니 마음은 허전하고 들어오는 돈이 생기니 가정주부들이 카바레에 진을 치고 있던 제비족과 놀아났다. 속이 탔던 노동자들이 제비족으로부터 아내를 지켜달라는 피눈물 섞인 연판장을 신문사에 보내기도 했다. 장바구니를 든 부녀자들과 카바레에 죽치고 있으며 부녀자들을 유혹했던 제비족들은 죽이 척척 맞았다. 카바레의 정식 영업시간은 저녁 7시부터 밤 10시 반까지였다. 하지만 부녀자들이 몰려들자 오후 4시면 문을 열었다. 단속이 심하면 정문을 닫아놓고 비밀통로로 고객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이들은 주로 강남 영동지구의 카바레를 선호했다. 그 이유는 당시 시내이던 강북지역을 벗어났기 때문에 아는 사람 눈에 띌 염려가 없었고 춤 잘 추는 선수 제비들이 영동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내에선 낮시간 영업단속이 심했지만 이곳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일부 카바레는 우수고객들을 위해 특별한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부녀자들이 장바구니 안에 파 한 단, 쇠고기 두 근 하는 식의 메모지만 넣어두면 웨이터가 알아서 장을 봤다. 각종 시장바구니와 메모를 들고 짐자전거 가득히 시장을 봐다 입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카바레 출입이 익숙한 부녀자들은 웨이터에게 팁을 주고 적당한 상대를 골라 오라고 언질을 주면 알아서 해결해줬다. 고객을 위한 맞춤서비스까지 구사할 줄 알았던 카바레 측은 미리 제비족들을 10∼20명 정도 확보해 무료입장을 시키고 준비를 해두었다. 부녀자와 제비족 콤비는 뜨거운 몸짓을 나누며 그 열기를 더해갔다. 제비족이 선호하는 카바레의 명당자리는 구석자리였다. 제비족은 조명이 어두운 구석자리의 벽 쪽으로 부녀자를 밀어붙이고 최후의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부녀자들도 저녁 8시면 표시나지 않게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썰물처럼 사라져버렸다. 카바레 물이 좋아지자 여자제비족도 생겨났다. 여자제비족이 카바레에서 남성을 유혹해 관계를 맺는다. 미리 짠 건달이 회사로 찾아가 자신의 아내와 정을 통했다며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다. 영역침범도 있었다. 주변 유흥업소의 직업여성들이 카바레까지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성들을 유혹해 자신의 가게로 데려가 버리는 바람에 카바레에 전속된 댄서들이 열을 받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77년 9월 서울시 보사국은 2000여 명의 카바레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카바레 정화 촉진대회를 열었다. 제비족과 유한부인을 추방하자는 결의문을 낭독하는 집회를 갖기도 했지만 이미 관제행사 정도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사회에서 모든 춤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모든 춤업소는 타락의 온상이었을까? 댄스홀과 카바레가 난무할 당시에도 상류층들의 댄스파티는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항상 문제는 남녀가 몸을 부딪치는 터치댄스에서 일어났다. 아니 춤을 추자면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생기는 것인데 그 정도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춤을 추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1950년대에 볼룸댄스로 통칭되는 터치댄스가 들어오기 전 한국사회는 여전히 남녀 7세 부동석의 이념이 지배하는 유교사회였다. 춤의 형태도 전통악기의 리듬에 맞춰 혼자서 어깨를 들썩이고 손을 조금 내젓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해방이 되면서 남녀가 붙어서 추는 춤을 추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급속히 진도가 나가버린 것이다. 이 볼룸댄스의 원조인 서양에서는 학교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춤을 가르쳐 춤문화가 교양으로서 자리 잡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국에 들어온 터치댄스는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노터치댄스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카바레라고는 모르는 순박한 우리 어머니들이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하다가 하루 야외로 계모임 나들이를 나가는 것이 낙이었다. 오랜만에 동네사람들과 술 좀 먹고 장구 치며 전통 춤 좀 추었다고 고성방가라는 억지 조항을 들이밀며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했었다. 어머니들은 순박해서 그렇게 당했다고 치자. 새롭게 들어온 노터치댄스인 고고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세대인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건전한 춤이었음에도 고고장을 장발과 퇴폐풍조 단속으로 몰아쳤다. 과거에 한국사회에서 춤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던 것은 춤문화에 대한 국가적인 준비와 교육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지 사실은 춤의 형태나 개인의 도덕심이 문제는 아니었다. 어떤 빌미를 만들어서라도 춤문화를 억누르고자 했던 국가의 음모가 춤바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춤이란 결국 몸짓이고 몸짓은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고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사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해방의 단계로 나아가는 통로였던 것이다. 국가주의 이념 속에 국민들을 가둬두고 국민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정권의 춤에 대한 혐오가 한국사회에서 춤이 ‘춤바람’이란 주홍글씨를 부여 받은 원인이었다. 억울하게 피해를 본 춤과 카바레를 대변해 한마디만 하겠다. “왜 만날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
    Munhwa ☜      김형찬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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