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42> 아코디언 거장 심성락 ‘추억의 명소’를 따라서…

浮萍草 2014. 2. 8. 10:48
    오아시스 다방서 만난 아코디언 선율… 내 인생의 ‘오아시스’가 되다
    한국 아코디언 연주의 대가 심성락은 평생을 악사로 살아오다 지난 2009년 발표한 독집으로 인해 한국 아코디언의 거장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바람을 넣어야 소리를 내는 아코디언처럼 그의 인생도 바람 같다. 그의 기억에 살아 꿈틀거리는 추억의 명소를 살펴보는 작업은 흔적조차 사라진'그때 그 시절의 그곳’을 기록하는 뜻 깊은 일이 될 것 같다.
    한국 아코디언 연주의 대가 심성락은 평생을 악사로 살아오다 지난 2009년 발표한 독집으로 인해 한국 아코디언의 거장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바람을 넣어야 소리를 내는 아코디언처럼 그의 인생도 바람 같다. 그의 기억에 살아 꿈틀거리는 추억의 명소를 살펴보는 작업은 흔적조차 사라진 ‘그때 그 시절의 그곳’을 기록하는 뜻 깊은 일이 될 것 같다. 1936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난 심성락(본명 심임섭)은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해 왔다. 명문인 부산 경남고를 졸업한 그가 어떻게 악사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심성락은 학교 야구부 투수였던 임종호로 인해 대중가요의 맛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유행가가 없었던 그는 손가락 2개가 없었지만 기타를 뒤집어 연주를 하며 노래도 잘 불렀던 친구 였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당시 서울에서 피란 온 배영복 사장이 운영한 부산 광복동의 악기점에서 우연하게 아코디언을 독학으로 배우게 되었다. 남포동과 광복동은 지금도 멋과 낭만을 경험할 수 있는 부산의 문화와 상업적 중심지다. 부산국제영화제 광장이 있는 부산 남포동 극장거리 광복동을 거쳐 옛 부산시청에 이르는 부산의 중심 거리는 심성락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아롱새겨져 있는 그때 그곳이다.
    1951년에서 1952년 당시, 부산에는 음악다방이 참 많았다. 경남중(당시는 5년제) 2학년생 심성락은 음악다방들이 밀집해 있던 부평동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에 이르는 길을 졸업 때까지 매일같이 하루 두 차례 순례했고 졸업 후에도 젊은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소일했다. 당시 선생님에게 적발되지 않으려 교복과 모자를 벗고 몰래 들어간 그곳에서 최고의 연주가로 성장할 음악 자양분을 수혈받았다. 심성락이 운전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을 함께 순례해 보자. 첫 번째 여정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부산의 명소였던 부평동 오아시스다방이다.
    ㆍ부평동 오아시스다방
    오아시스다방은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조그만 다방이었지만 음향 시스템이 좋고 무엇보다 좋은 판이 정말 많아 이곳에 가야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주로 클래식을 틀어주었는데 가끔 신청곡이 없을 때는 미국 모던재즈 음악을 틀곤 했다. 다른 곳에선 들을 수 없는 흑인 5인조 밀스 잭슨 악단의 연주와 데이브 브루벡 악단이 연주하는 ‘테이크 파이브(TAKE5)’를 이곳에서 처음 들었다. 주인은 50대로 10대부터 배를 탄 선장(혹은 기관장)이었는데 외국에 나가면 음반만 사가지고 와서 다른 집에 없는 판이 그 집에 다 있었다. 키가 조그마한 분인데 심성락은 딱 한 번 주인을 봤었다. 이곳의 주 고객은 음악을 제대로 아는 음악교사들이었는데 현재 서울의 유명 음대 총장 학장이 되어 있는 분들이 피란을 와 죄다 이곳에 몰려들었다. 단골 중 서울대 작곡과에 다녔던 가곡‘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선생도 있었다.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던 이곳은 행색이 남루한 사람은 피란시절이라 동냥하러 온 것으로 여겨 그냥 나가야 했다. 연탄 한 장에 100∼200전 했는데 커피 한 잔 값이 그보다 비싼 200∼300전 정도로 비쌌다. 카운터 양쪽 옆에 있었던 알텍 스피커는 굉장히 컸다. 앰프도 최고급 매킨토시였다. 10대 후반의 DJ는 나이가 비슷해 심성락과 친해졌다. 어느 날 최영섭 교수가 음악동료들과 와서 신청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DJ 친구가 심성락이 온 것을 보고 볼륨을 슬쩍 죽이면서 음반을 살짝 바꿔주었다. 난데없이 음악이 바뀌니 최 교수 일행은 왜 갑자기 음악 바꾸나며 DJ실을 쳐다봤다. 눈치없이 두 번이나 음악이 변경되자 미안한 마음에 심성락은 최 교수 일행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는데 음악이 좋다며 괜찮다고 했단다. 훗날 두 사람은 음악저작권협회에서 만났는데 최 교수는 그때를 기억하시고 반가워했다
    ㆍ남포동 향촌다방, 모나미다방
    향촌다방은 대중가요 모나미다방은 탱고 음반이 많았다. 향촌다방 주인은 한복을 정갈하게 입은 여주인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매일 같이 음악다방을 순례했다. 심성락은 21세 때 담배를 배웠다. 당시 최고 인기가 많은 담배는 ‘아리랑’인데 귀했다. 여주인에게 아리랑 담배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면 단골인지라 담배 3갑을 구해 한복 안에 숨겨놓았다가 주었는데 어느 날 담배를 주려다 바닥에 떨어트려 손님들의 질시어린 눈길 속에 줍곤 했다. 모나미다방은 나이 많은 아저씨가 DJ였다. 탱고 ‘라쿰파르시타’ 음반을 신청하면 아저씨가 여러 음반을 자랑하느라 연주 스타일과 악단이 다른 8가지 음반을 계속 판을 바꿔가며 들려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심성락은 약관 21세의 나이에 논산 제2훈련소 군 예대 악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형님이 운영하는 다방 근처 공터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워가며 편곡과 화성학 공부에 매진 음악공력을 배양했다. 이후 부산 KBS MBC TBC 등 각 방송국 경음악단의 멤버를 거쳤다. 23세 때 부산 KBS에서 주최했던 아마추어 노래자랑대회에 아코디언 반주자로 들어갔다. 당시 작곡가 이재호 선생 집에서 기거했던 노래하는 친구 덕에 선생과 인연을 맺은 그는 노래자랑대회에 따라갔다. 당시 심사위원은 황문평 손석우 한복남 등 반주를 맡았던 미군무대 출신 연주인들은 뽕짝을 전혀 몰랐다. 당시 예심이 없어 구름처럼 몰려든 수백 명의 출연자들이 어떤 노래를 무슨 키로 부를지 몰라 노래자랑대회 진행은 엉망이 되었다. 그때 아코디언 연주자가 그만둔다고 해 이재호 선생의 추천으로 심성락은 4번째 노래자랑대회부터 연주를 맡게 되었다. 당시 부산 KBS의 노래자랑대회가 열렸던 장소는 남포동에 위치한 보림백화점 4층 강당이었다.
    ㆍ남포동 보림백화점 4층 강당
    남포극장 바로 앞에 위치했던 보림백화점은 5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지금은 다 헐려 사라졌지만 1953년 당시 부산에 있는 거의 유일한 백화점이었다. 정전 후, 이곳 강당에서 부산KBS의 노래자랑대회는 악단도 없이 아코디언과 기타 두 대로 1주일에 한 번 열렸다. 예심이란 걸 몰랐던 그때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200∼300명씩 아침부터 백화점에서 장사진을 이뤘다. 무료입장인지라 만석을 이룬 대회장은 준비한 의자가 모자라 대부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나운서가 노래 부를 사람 올라오라 하면 서로 먼저 하려고 싸움까지 벌어졌다. 가수 윤일로가 가수가 되기 전에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휴가를 나왔을 때 이 노래자랑대회에 출전했었다. 당시는 방송출력이 500와트밖에 되질 않아 녹음기로 녹음한 중계방송만 하던 시절. 출전자들의 노래를 녹음해 너무 못하거나 말을 더듬는 사람 분을 편집해 30∼40분짜리 릴테이프로 만들어 방송을 했다. 테스트로 처음 시작한 방송은 반응이 대단했다.
    ㆍ광복동 미화당백화점 음악실
    1953년 보림백화점 다음으로 생긴 미화당백화점도 지금은 사라졌고 유명브랜드 대형매장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1958∼1959년 즈음 그곳 4층에는 ‘부산의 세시봉’ 같은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실이 있었는데 지역방송국의 공개방송도 진행되었다. 1960년대 초반, 미화당백화점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입장하는 호수카바레가 생겨났다. 부산의 춤쟁이들이 다 모여들었던 그곳은 홀 중앙에 플로어가 있는 춤만 추는 댄스홀이었다. 그곳에서 노래했던 남일해, 트위스트 김 윤일로 모두 서울로 올라가 일류가수가 되었다. 심성락은 그곳에서 몇 년간 악단장을 하다 음반 녹음을 부탁받고 상경했다. 1966년에 서울로 올라와 장충동녹음실과 마장동녹음실을 오가며 작업했다. 장충동녹음실은 당시 시설 면에서 최고의 녹음실이었다. 박지연이 노래한 박춘석 작곡의 꿀밤 삼백석은 그가 세션맨으로 녹음한 최초의 노래다.
    ㆍ 서울 을지로6가 천지나이트클럽
    천지나이트클럽은 배호가 드럼을 치며 노래한 공간으로 유명한 곳이다. 1967년 심성락은 배호에게 자신의 창작곡 ‘인생나루’를 줬다. 아파서 누워있어 연습도 못하고 악보만 주고 왔는데 황당하게도 판이 나왔다. 주점이 들어선 1층은 아르바이트 카바레라고 했다. 진짜 나이트클럽은 입장료를 받았던 2층으로 돈 없는 사람은 가지 못했던 고급 공간이었다. 지구레코드에서 일했던 그는 한 유명 작곡가로 인해 일거리를 잃었다. 그때 작곡가 김인배가 천지나이트클럽의 피아니스트가 그만뒀으니 나오라 했다. 피아노 연주가가 아닌지라 고사했지만 억지로 끌려가 그날 저녁부터 김인배악단의 피아니스트로 들어갔다. 당시 악단에는 김학송, 김인배까지 피아니스트가 3명이었지만 두 사람은 저녁에 일찍 빠져 새벽 2시까지 혼자서 연주를 했다. 힘들었지만 재미있어 감수했다. 당시 그는 악단의 아코디언을 빌려 반주하며 가수들의 노래연습을 시켰다. 그 모습을 본 아세아의 최치수 사장이 이봉조와 공동으로 첫 아코디언 연주집 ‘경음악의 왕’을 제작했다. 이후 260여 장의 경음악집과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가수들의 앨범 녹음에 참여했다. 당시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그는 을지로6가 전화국 뒤에 위치한 천지나이트 앞 전일여관에 묵고 있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내한을 하자 집이 바로 10m 앞인데 경찰들이 나가지 못하게 해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사람들은 로비에서 모두 밤을 꼴딱 새웠단다. 심성락은 대통령의 악사로 널려 알려져 있다. 시작은 1970년 삼청동에 있는 총리공관에서 열렸던 김종필 총리 생일연회였다. 그때 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해 애창곡인 고복수의 ‘짝사랑’ 한 곡을 불렀다. 그 곡은 남자가 부르면 키를 잡기가 애매한 곡이라 고민을 했다. 대통령이 직접 키를 ‘F마이너’로 잡으라 했다. 너무 낮아 저음 여가수 문주란도 부르기 쉽지 않은 음인데 능숙하게 소화해 깜짝 놀랐다. 총리공관 행사가 끝난 몇 개월 후 청와대에서 ‘각하가 좋아하는 경음악을 녹음해 달라’고 연락이 와 20여 곡을 녹음해 보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그 음악을 평소에 조용하게 틀어놓고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명의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ㆍ삼청동 안가
    박 대통령이 시화호 시찰을 다닐 때 청와대 안가에 처음 들어갔다. 당시 안가는 a, b, c 3곳이 있었고 각각 떨어져 있었는데 행사 때문에 간다고 하면 통과되었다. 노태우 정부 당시 그는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대통령의 노래실력에 대한 평가를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전두환 대통령은 노래를 많이 알았고 잘 불렀다고 한다. 사실 노래는 노태우 대통령이 가장 잘 부르지만 너무 기교를 넣으려 해 음악인 입장에서는 전 대통령이 더 잘 부른다고 말했던 것. 그런데 그 말이 기사로 나가자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불려가 ‘돈을 얼마 받았기에 현직 대통령을 무시하고 그런 이야기를 해줬느냐?’고 문초를 받았다. ‘ 돈을 받고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한강에 떨어져 죽어버리겠다’고 벌컥 화를 내자 오해가 풀렸다. 심성락 생각에는 현직 대통령을 칭찬하면 사람들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 솔직하게 백담사로 유배간 전 대통령이 더 잘 한다고 했던 것. 청와대에서 안전과장이 금연지역이었지만 마음이 불편한 그에게 커피 잔을 재떨이로 쓰라며 기사를 쓴 기자 연락처를 물었다. 당시 인터뷰를 했던 여기자는 방송국 PD를 하다 퇴직을 당해 5, 6공 정권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던 남편과 함께 왔었다. 이미 가수, 탤런트들에게 다 들었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말이라 거짓말이라 했다. 글을 다 써 놓은 상태였는데 이야기가 연결이 안 되니 당황스러워했다. 백지에다 연회가 열린 안가의 직사각형 내부 방에 자신이 앉은 자리와 대각선에 대통령, 외국 귀빈들 그림까지 그렸다. 당시 심성락은 작은 4쪽짜리 병풍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르간이 가정용이라 제 소리가 나지 않아 구해 온 dx7 전자키보드의 복잡한 줄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사에는 연회가 열린 밤이 아닌 대낮에 행사장 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 실렸고 연회는 진수성찬으로 가득했다고 썼다. 심성락은 이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술은 양주를 마셨지만 안주가 마른 반찬 몇 가지밖에 없어 김상협 총리가 집에 돌아가면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어야 되니 안주를 좀 개선하자고 했을 정도라 했는데 무슨 진수성찬이냐 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기사에는 또 화장실에 못 가게 해 병풍 뒤에서 소변을 봤다고 했다. 기사를 쓴 여기자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작은 병풍인지라 다 보이는데 뒤에서 치마 내리고 사람들 앞에서 소변을 볼 수 있냐, 왜 거짓말을 하냐고 흥분했다고 한다. 심성락은 자신의 고초를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하려 만든 시나리오라 생각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불손하게 보였던 자신을 가만 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 2000년대 들어 심성락은 탁월한 아코디언 연주로 반세기가 넘는 그의 음악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인터뷰 끝 무렵에 심성락은 아코디언을 보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지낸 지가 몇 개월이 되었다며 모든 게 허무해졌다고 말했다. 사라진 명소들만큼이나 그런 선생을 보니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Munhwa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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