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46> 가리봉 음악다방

浮萍草 2014. 3. 14. 22:05
    하루치 노동 마친 ‘공돌이·공순이’… 노래 한곡 들으며 ‘나’를 찾던 곳
    1970년대와 1980년대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DJ)들은 ‘죽순이(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는 여성)’들의 로망이었다.왼쪽은 1970년대 서울 시내 한 음악다방
    의 DJ. 오른쪽은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최근의 서울 가리봉동 거리. 문화일보 자료사진
    시절 우린 여고생이었다. 정치는 잘 몰랐지만 교사도 노동자라는 1989년 선언이 획기적인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외모가 권력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는 미스코리아의 열풍이 정말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미스코리아의 전성시대였으니 87년 미스코리아 진 장윤정, 88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령,89년 미스코리아 진 오현경,미스코리아 선 고현정까지,톱 스타들은 모두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함께 모이기만 하면 다음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곤 했던 것이다. “책 볼 시간에 거울을 보자!” “외모 가꿔 미스코리아 나가자!” 구호대로 우리는 열심히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옥에 티가 자꾸 눈에 띄는 것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는 “난 예쁜 속옷은 절대로 입으면 안 돼. 예쁜 속옷을 사면 보여주고 싶어서 사고칠 것 같아”가 입버릇이 된 내 친구 유정이는 쌍꺼풀 없는 눈에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었고 지금은 아이 둘 낳고 잘 살고 있는 윤희는 남보다 1.5배는 큰 사이즈의 얼굴 크기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나는 왼쪽 입술 위에 콕 박혀 있는 점이 싫었다.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 우리는 당연히 화장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참새가 방앗간에 들러듯이 수시로 이대 앞 화장품 가게에 들러 화장품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견물생심이라고 나중에는 화장품을 사서 직접 화장을 해보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얼굴에 분 바르고 눈썹 그리고 립스틱까지 발랐더니 오호! 세상에! 이게 내 얼굴이 맞단 말인가! 스스로 놀라며 환호작약하게 되었는데, 그때 지금은 애 둘 낳고 잘 살고 있는 윤희가 대뜸 이러는 거였다. “야! 화장을 하면 뭐하냐. 화장하고 갈 데도 없는데.”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윤희의 그 한마디에 우리의 흥분된 가슴은 두근거림을 멈추고 말았다. 그 뒤로 몇 달 동안 우리들은 거울도 잘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다. 거울 들여다보고 화장까지 해봤자 어디 갈 데도 없는 터라 완전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럴 즈음에 우리의 평온한 일상에 화력이 엄청난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진짜! 선주가 가출했다고?” “가리봉동에 무슨 음악다방이 있는데 거기 죽순이가 됐다는데?” “세상에! 그럼 학교는? 벌써 며칠째야? 당장! 무슨 일이 있어도 가서 선주를 끌고 오자!” 우리 친구 선주가 가출을 했는데 가리봉동에 있다는 뭔 음악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우리는 열일곱 여고생이었고, 가족보다도 친구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춘기 소녀였던 터라 우리 친구 선주를 찾아 발걸음도 요란하게 가리봉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꾼 ‘가리봉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주춤주춤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리봉역 저 너머로 보이는 가리봉동의 풍경은 영등포에서 나고 자라 낡고 허름한 것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눈에도 너무 허름 하고 너무 낡아 발 들여놓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게다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여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야! 선주 있는 데가 음악다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 꼴을 하고 갔다가는 들어가지도 못할 걸?” “맞아, 누가 봐도 우린 십대잖아.” “안 되겠다, 일단 화장부터 하자!”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가리봉역 근처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립스틱 하나 사지 않으면서 주인 몰래 화장품 가게 펜슬로 눈썹 그리고 샘플 립스틱으로 입술도 칠했다. “이러니까 진짜 아가씨 같은 걸?” 눈썹 그리고 립스틱 발라봤자 누가 봐도 십대로 보였을 게 뻔한 데도 우리는 그렇게 자화자찬하며 문제의 그 음악다방이라는 곳을 찾아 가리봉 시장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여긴가?” “아니, 여기 같은데?” 가리봉동에만 가면 선주가 죽치고 앉아 있다는 그 음악다방을 금방 찾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음악다방은 왜 이리 많고 나이트클럽은 또 왜 이리 많은지 아무튼지 그렇게 가리봉 시장을 휩쓸다시피하며 돌아다닌 끝에 드디어 우리는 선주가 죽치고 앉아 있는 음악다방을 찾아냈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담배 냄새.그러나 담배 냄새보다도 더 먼저 우리를 사로잡아버린 것이 있었는데 바로 DJ 오빠였다. 머리에 헤드셋을 끼고 뮤직 박스 안에 앉아 있는 DJ 오빠는… 멋졌다. 목에 두른 스카프도, 뒤로 몽땅 빗어 넘긴 머리도,늠름한 목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흰색의 셔츠 깃도 멋졌다. 패션 잡지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처럼 잘생긴 DJ 오빠를 보자마자 우리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머머, 저 사람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 아니니?” 윤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윤희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음악다방 구석에 앉아 있던 선주가 벌떡 일어나 우리한테 달려왔다. “너희들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왔어? 얼른 이리 들어와 앉아.” 선주는 누가 우리를 볼까 무서운지 우리들을 구석진 자리로 내몰았다. 슬픔은 곧 잊을 수가 있지만 상처는 지울 수가 없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질 뿐이예요 사랑하는 그대여 이것만은 기억해줘요 그토록 사랑했던 내영혼은 지금 어두운 그림자뿐이네 자리에 앉자마자 히트곡이 우리를 휘감았다. 원준희의 ‘사랑은 유리같은 것’이라는 노래로 그 당시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흥얼거리는 노래였다. 뒤이어 나한테는 얄라얄라 얄라리 송~~이나 다름없는 샹송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 죽이지? 나나무스꾸리의 ‘돈 데 보이’라는 노래야! 돈 데 보이~~~ 돈 데 보이~~~.” 선주가 샹송을 흥얼거리는데 정말 내가 아는 선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멋져 보였다. 우리를 넋 놓게 만들어놓은 선주는 뒤이어 우리의 입을 쩍 벌리게 만들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쪽지에 뭔가를 열심히 적더니 뮤직 박스로 가서 DJ 오빠한테 전해주는 것이 아닌가! 쪽지라니! 그것도 남자한테 쪽지를 전해주다니! 우리가 입을 쩍 벌리고 쳐다보자 선주는 너희는 이런 것도 모르니, 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너희들도 듣고 싶은 노래 있으면 적어서 DJ 오빠한테 갖다 줘 나처럼 예쁜 애가 신청곡 틀어 달라고 하면 뭐 거의 백퍼센트 틀어 주거든.” 그날 나는 그렇게 음악다방을 알아버렸다. 신청곡이라든지, LP판이라든지, DJ 오빠를 판돌이라고 부른다든지, 운이 좋으면 음악다방에 노래 들으러 온 사람들과 노래 한 곡으로 한 마음이 되어 친구처럼 지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들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리봉동 음악다방의 죽순이가 되었다. 물론 선주는 우리가 그 음악다방으로 찾아간 그날 이후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에 나오기는 했지만 음악다방만은 끊지 못했다. 왜? 그야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으니까. 우리까지 덩달아 음악다방에 출입하기 시작했으니까. 선주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허름한 음악다방의 DJ 오빠를 짝사랑했고 우리는 의리랍시고 그 음악다방에서 선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곤 했다. 그러다 보고, 듣고,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가 ‘여고생’이라는 사실이었다. 가리봉동의 음악다방에 출입하기 전까지는 우린 정말 몰랐다. 우리가 ‘여고생’이라는 사실을. ‘여고생’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여고생’이라는 신분은 어떤 이들에게는 꿈이고 희망이고 내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당시 가리봉동에는 영11이나 나포리 커피와 같은 유명한 음악다방들도 많았고, 디스코 경연대회를 실시하는 나이트클럽들도 많았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가리봉동의 음악다방을 자주 찾았고 어디에서건 그들의 열정을 받아주는 곳을 찾지 못해 춤밖에는 출 줄 모르는 춤꾼들 또한 가리봉동으로 흘러 들어왔다. 가리봉동 거리엔 노동자들과 춤꾼들이 넘쳐 났는데 우리처럼 십대였던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내가 학교에 가 교실에서 수업 받고 쉬는 시간이면 매점으로 뛰어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 내 또래의 공돌이 공순이들은 하루 종일 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의 고민이래 봤자 용돈이 적다, 엄마랑 싸웠다, ○○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십대다운 고민이었다면 가리봉동 키드들의 고민은 생존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루치의 노동을 끝내고 음악다방에 들러 한 잔의 커피를 시키고 쪽지에 이에로나 루이스 터커의 ‘미드나이트 블루’를 적어 뮤직 박스 안 DJ에게 전해주고, 드디어 “오늘 생일 맞으신 김순녀 씨가 신청하신 곡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자신이 신청한 신청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올 때,그때 비로소 수많은 공돌이 공순이 중의 한 명이었던 그와 그녀는 이름을 가진 자기 자신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짧고 그들이 음악다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들은 다시 식구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고 젊음과 미래의 가능성을 담보로 매달 월급을 받아야 하는 노동자로 되돌아가야 했다. 신청곡이 나오면 한없이 기뻐하고 까르르 웃고 박수를 치다가도 월급에 대한 이야기, 노동 환경에 대한 이야기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곧 그 얼굴에서 십대 다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인이 되어버리는 내 또래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나와 내 친구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최소한 ‘여고생’이구나. 우리는 최소한 ‘오늘 당장’이 아니라 ‘내일’을 말하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구나. 그렇게 나는 내 나이 열일곱에 내 문학의 주인공들을 만났다. 198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휴식처였던 가리봉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삐끼(음식점이나 노래방 등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청소년들)들의 주거지였다가 어느 순간 외국인 노동자들의 밀집지역이 되었다. 어느덧 작가가 된 나는 2000년대에 들어서 가리봉동에 모여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취재차 다시 가리봉동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나 학업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소설을 쓰지 못한 채 2011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2011년에 다시 찾은 가리봉동은 2000년대 초반과는 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가리봉역’은 ‘가산디지털단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골목 초입에서부터 눈에 띄던 붉은색의 한자들도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들, 특히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 살던 그곳은 이제는 패션 아웃렛으로 탈바꿈했고 여기저기에서 옌볜(延邊) 사투리가 들려오던 그곳에선 대신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이제는 패션 아웃렛으로 변한 가리봉동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한 발 한 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빌딩들이 하나씩 뒤로 물러나고 내 앞엔 어느새 그때 그 시절의 낡은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돈 데 보이~~~ 돈 데 보이~~~” 나나무스꾸리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하루치의 노동을 마치고 이제 막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모여들고 어서오세요! 이리로 오세요! 하루 종일 목 놓아 손님을 부르던 삐끼들이 덩달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쫓아오고, 철거촌의 허물어진 벽들이 살아 움직이고, 텅 비어 있던 골목은 그 시절의 온기를 머금은 곳으로 다시 태어난다.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서로 어깨동무를 한 그들과 함께 걸어간다. 가리봉오거리 앞 가리봉의원을 지나 나포리 음악다방 앞을 지나쳐 엄지만화방을 흘낏거리다 전진고물상에 나뒹구는 양은 냄비에 동전 하나 던져놓고 홍루몽 노래 연습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장단 맞추며 우리는 함께 앞으로 앞으로 추억 속으로 걸어간다. 나는 지금도 도시의 빌딩 숲에 갇힌 내가 문득 회색빛으로 물들어간다고 느낄 때면 가리봉으로 간다. 가서 내 마음의 추억 상자의 뚜껑을 열고 내 문학의 주인공들과 함께 가리봉으로 걸어 들어간다.
    Munhwa ☜       이명랑 소설가·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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