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43> 왕십리 곱창 골목

浮萍草 2014. 2. 21. 10:34
    잡내 참아가며 먹던 곱창… 그 ‘비릿했던 가난’을 곱씹다
    나는 마산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공작기계 기술자였다. 아주 어렸을 때는 주택가에 살았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공장지대로 이사를 하였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 바로 옆에 살림집을 마련하였기 때문이었다. 기계공장 외에 주물공장, 연탄공장, 기와공장 등등이 있었다. 동네는 탄가루와 공장 굴뚝 연기로 컴컴하였고 기계 소리로 시끄러웠다. 환경 탓인지 동네 아이들의 성정도 거칠었다. 좋은 추억은 적었다. 왕십리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다 내 어릴 적 동네 풍경을 떠올렸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왕십리는 공장지대였다. 기와공장, 연탄공장, 전구공장, 메리야스공장 따위가 있었다. 서울이라 하지만 ‘반듯한’ 도시인의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1980년 서울 이주 후 나는 왕십리에 가본 적이 거의 없다. 누구든 탄가루 날리고 기계 소리 요란한 동네를 좋아하겠는가. 그곳에 밥을 벌 일이 아니면 갈 일이 없는 것이다. 좋지 않았던 내 추억이 들추어질까 싶어 부러 피했을 수도 있다.
    서울 왕십리의 곱창골목 풍경.곱창집 주인들은 곱창을
    미리 데치거나 애벌구이를 해서 준비해둔다.손님이 오면
    그때 양념을 해서 볶는다. 황교익 씨 제공
    ㆍ영원한 변두리십리는 한국인 모두에게 영원히 변두리일 수 있다. 왕십리에 가본 적도 없고 어디에 붙어 있는 어떤 동네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냥 변두리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십 리를 가세요(往十里)” 하는 무학대사 전설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의 멘토 무학대사가 왕궁 자리를 찾아나섰는데 지금의 왕십리 자리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대사에게 이 말을 하여 그곳의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의 일은 아닐 것이나 이 전설은 한국인이면 겨우 글자를 배울 때에 그림동화책에서부터 배운다. 왕십리 주민 입장에서는 자신의 동네를 서울의 영원한 변두리로 만든 무학대사가 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왕십리 일대는 조선의 한성부에 속하면서도 동대문 밖에 놓여 있었다. 한성에 기대어 살면서도 사대문 안에는 들지 못하는 조선 당시의 이 동네 사람들이 신세 한탄 비슷한 마음을 이 무학대사 전설로 남겼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타당하다.
    원래는 왕궁 자리였을 정도로 지세가 좋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는 전설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왕십리는 지금의 행정동인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지역만을 뜻하지 않는다. 청계천의 남쪽 땅인 황학동 즈음에서부터 그 청계천이 남으로 꺾어지는 지역인 마장동 일대 그리고 청계천이 합쳐지는 중랑천의 북쪽 땅인 행당동 일대를 아우른다. 왕십리는 행정적 구역이라기보다 심리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대체로 서울의 동쪽 변두리라는 공간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조선은 사대문 안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였고 성 안 사람들이 먹을 채소는 왕십리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었다. 왕십리는 중랑천이 청계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땅이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왕가의 김장용 채마밭도 이 일대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권역이 크게 넓어지면서 왕십리는 공장지대로 재편되었다. 왕십리가 공장지대로 선정된 까닭을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이다. “삼십만 인구가 모여 사는 경성으로 말하면 현재 상태에 만족한 것이 아니오 장래에 더욱더욱 늘어날 것은 자연의 사세이므로 큰 경성을 건설할 만한 온갖 계획과 준비에 대하여… 그중에 공장지대를 잘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론이 있어 왔고… 경성은 북한산과 남산 틈에 있어서 지형상 관계로… 팔구월에는 동북풍이 불고 그 나머지 열 달 동안은 서풍이 부는 터이므로 공장 연돌에서 뿜어내는 연기를 피하려면 불가불 동편으로 왕십리나 혹은 청량리 방면을 선택하는 것이….” 그러니까 서울의 동쪽 변두리라는 지리적 운명에 따라 왕십리는 공장지대가 된 것이다. 서울의 채마밭이었던 왕십리의 역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경성 사람들이 쓸 여러 물자를 생산하고 보관하는 기지로 바뀌었다. 기와공장 석탄공장, 방직공장 주물과 공작기계공장 등이 들어섰다.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 영세 공장들은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공장의 이름도 일본식으로 ‘마찌꼬방’이라고 부른다. 기와공장, 석탄공장 등은 사라지고 방직공장은 동대문시장 일대로 흩어졌다. 그래도 ‘봉제’라 쓰여 있는 작은 공장들을 왕십리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공작기계 공장들도 제법 눈에 띈다. 선반과 밀링머신 프레스 등을 갖춘 ‘마찌꼬방’은 그 허술한 설비에도 오랫동안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도면만 주면 어떤 물건이든 척척 만들어낸다.
    ㆍ왕십리 곱창과 마장동 도축장의 관계
    서울 왕십리 곱창골목은 1890년대 배추밭이었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공장지대로 변모했던 지역이다.지난
    12일 왕십리의 곱창집들이 높이 솟아있는 주변
    아파트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황교익 씨 제공
    내게 왕십리는 곱창으로 기억된다. 왕십리에 의도적으로 처음 간 것이 곱창을 먹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1990년대 중반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니 곱창과의 인연 아니 왕십리와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다. 처음의 그 곱창집은 어느 길목에 있던 것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제법 여러 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는데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년 남짓의 시간이 서울에서는 100년도 더 될 것이다. 한순간에 집이 헐리고 길이 놓인다. 추억 따위를 챙기려면 서울에서 살면 안 된다. 옛 흔적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황학동의 포장마차식 곱창이다. 양념하여 익힌 곱창을 수북이 쌓아놓고 팬에 볶아 낸다. 여기에 소주 한잔. 참 낭만적으로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격이 싸다 보니 곱창의 질은 최하급이어서 온갖 잡내를 감당하면서 먹어야 한다. 위생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야 한다. 추억도 좋다지만… 그렇다. 옛 모습이 제법 남아 있는 곳은 청계8가에 있다. 황학동시장에서 동묘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흔히 ‘황학동 곱창 골목’이라 부른다. 30년 정도 된 가게들이다. 주인들에게 곱창집의 내력을 들으면 그 내용이 흡사하다. “처음에는 포장마차에서 팔았지. 마장동에서 곱창을 가져와서는 밤새 다듬어 연탄불에 구워 팔았는데 그게 인기가 있어 가게를 얻고….” 여기서 우리는 늘 ‘마장동’에 주목하게 된다. “아, 마장동이 가까우니까 곱창집이 많이 생겼구나” 하고. 마장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은 1963년 개장하여 1998년 문을 닫았다. 지금은 축산물 도소매 가게들만 남아 있다. 왕십리 곱창이 도축시장과 연계되어 번성한 것이라면 그 연대는 훨씬 위로 잡아도 될 만한 자료가 있다. 1922년 개장한 ‘동대문외 가축시장’이 왕십리와 멀지 않다. ‘동대문외 가축시장’은 경성부 가축시장 동대문 밖 가축시장 동대문 가축시장 숭인동 가축시장 등으로 불렸다. 동대문 가축시장은 지금의 숭신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동묘공원 앞이다. 소 돼지가 거래되었고 도축장도 운영되었다. 그 규모가 상당하여 당시 경성의 명물 볼거리 중 하나였다. 1935년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해 11월 한 달 동안 소 3158마리 돼지 790마리가 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이 동대문 가축시장 바로 곁에는 청계천이 흐른다.
    청계천 다리인 영도교를 건너면 왕십리의 서쪽 시작 지점인 황학동이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많이 사라졌지만 이 황학동에도 곱창집이 수없이 있었다. 왕십리 곱창의 근원을 찾는다면 일제강점기의 이 동대문 가축시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왕십리에서 곱창이 번창하게 된 까닭이 가축시장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지역에서 특정 음식이 크게 번창하는 원인을 파악할 때에 버릇처럼 재료의 수급을 따지는데 일부 맞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왕십리의 경우 소·돼지를 잡는 도축장이 곁에 있으니 그 내장을 쉽게 구할 수 있어 곱창이 크게 번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식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근처에서 소·돼지를 많이 잡았으면 그 소·돼지의 고기를 이용한 음식도 많이 팔려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지 않은가. 오히려 그 동네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이 특정 음식의 번창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십리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곱창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ㆍ왕십리에 곱창이 여전한 까닭
    소든 돼지든, 곱창구이가 특히 왕십리에서 많이 먹은 음식이라 볼 수는 없다.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소·돼지를 먹었고 그 내장도 먹었다. 그러니 전국 어디에 곱창구이집이 있든 어색한 일은 아니다. 곱창구이집은 전국 어디에든 있었다는 말이다. 서울에서는 1960∼70년대 상황을 보면, 종로, 명동, 충무로, 무교동 등 사대문 안 뒷골목 술집에서 곱창구이를 흔히 팔았다. 직화로 굽기도 하고 번철에 볶기도 하였다. 얼큰하게 전골로도 먹었다. 서울 남자들의 안주로 곱창은 한때 크게 번창한 음식이었다. 곱창은 고기에 비해 싸다.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가끔 곱창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 가격이 역전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곱창은 싸다. 이 곱창의 주요 고객은 따라서 서민이다. 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사람들이 고기 먹는 기분으로 먹는 음식인 것이다. 소곱창의 경우는 특히 기름이 많아 불판에서 지글지글 타면서 연기를 피워올려 고기 굽는 기분을 한층 끌어올려주는 매력이 있다. 가난하였던 서울 사람들에게 곱창은 심리적으로 큰 위로를 주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서울에 갑자기 먹을거리들이 늘어났다. 수입육이지만 고기를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삼겹살 돼지갈비 소갈비 불고기 등심 등등이 서울 남자들의 안주로 자리를 잡아갔고 곱창은 점점 밀려났다. 서울의 부가 집중된 사대문 안과 강남에서는 이 현상이 특히 두드러졌다. 그러면서 곱창은 별식이 되었다. 그러나 왕십리는 그 활황기에도 여전히 서울의 변두리였다. 1980년대 이후 왕십리 ‘마찌꼬방’의 사정은 더 안 좋아졌다. 사회와 역사 교과서에는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 배경에는 1970년대 정부의 중공업 육성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기업 중심의 중공업을 말하는 것이지 일제강점기부터 버텨온 자생적 소규모 공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내 고향 마산의 공장지대도 그랬다. 창원에 대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산의 전통적인 자생적 공장지대는 사라졌다). 소비재 시장을 점령해 나가던 대기업에 생산재 시장까지 열어준 것이었다. 일부 대기업의 하청 물품을 주문받기는 하였지만 턱없이 낮은 제조단가에 버텨낼 수 있는 데는 많지 않았다. 왕십리 사람들은 사대문 안 사람들처럼 오래전부터 곱창을 먹었을 것이다. 서울의 여러 곱창집들은 사라져갔으나 왕십리에서는 이 곱창이 사라질 수가 없었던 것은 고기를 먹을 만큼 넉넉한 삶이 왕십리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십리는 아직 왕성하게 재개발 중에 있다. 가난한 곱창집과 고급한 아파트가 어우러져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곱창을 씹으며 보는 이 기묘한 풍경이 오히려 서울의 삶을 직시하게 해준다.
    Munhwa         황교익 음식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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