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新줌마병법

나는 대한민국의 외줄타기 청소부

浮萍草 2014. 1. 19. 11:25
    키 150㎝, 마흔네 살의 女子 로프공… 일당 15만원이래서 귀가 번쩍했지요
    로프는 그녀의 밥줄이자 생명줄… 8년만에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출
    오늘밤 산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희망이란 이름의 선물, 이미 받았으니
    김윤덕 여론독자부 차장
    벽 6시. 알람 소리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일어난다. 영하 5도. 현관문 사이로 숭숭 스며드는 칼바람이 밉다. 계란말이 김치 콩나물국…. 세 아들 먹을 밥상을 장만해놓고 아직 푸른 어둠 떠도는 골목으로 나선다. 춥다. 오늘은 15층 빌딩의 외벽을 청소하는 날. 햇수로 5년째인데도 밧줄 하나에 목숨 걸고 하는 청소 작업은 만만치 않다. 엘리베이터가 문제다. 고장만 안 났으면 무조건'운수 좋은 날'. 지난달 12층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옥상까지 밧줄과 청소 장비 짊어지고 올라갔다가 밤새 몸살을 앓았다. 키 150㎝가 안 되는 체구였다. 바람 불면 날아가게 생겼다고 청소용역업체 사장은 그녀가 로프공을 자원했을 때 극구 말렸다. 온통 코발트빛 유리로 둘러싼 건물은 햇살에 빛나는 바다 같다. 바람이 분다. 체감온도는 영하 10도쯤 될까. 밧줄을 묶는다.
    줄타기보다 어려운 일이 밧줄 묶기다. 초보 시절 엉뚱한 곳에 매듭을 묶었다가 5m가량 줄과 함께 미끄러져 내린 적이 있다. 로프에 안전판을 건다. 거기 앉아 종일 작업을 할 것이다. 바람에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내복 두 겹 입기를 잘했지. 얼음장 같은 공기가 양 볼을 때린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랬다. 쨍하니 정신 번쩍 들 때도 있어야지. 발밑은 보지 않는다. 그놈의 어지럼증. 대신 묵은 트로트를 흥얼댄다. # 절박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일당 15만원이란 말에 가슴이 뛰었다. 기초생활수급자에다 이혼녀인 그녀에게 아이 셋 먹이고 입히려면 돈 돈이 필요했다. 남자들 줄 타는 모습 보니 못할 이유 없었다. 다들 제정신이냐며 혀를 찼다. 여자라서,작아서,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단다. 담력만큼은 자신 있다고 우겼다. 죽어도 좋아! 남편과 헤어지고 식당 일, 가사 도우미, 대리운전까지 안 해본 일 없었다. 줄을 타려면 팔 힘이 세야 한대서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랑에 눈멀어 스무 살에 시집 간 뒤 온갖 잡일로 굵어진 팔뚝이다. "독해!" 울며 겨자 먹기로 사장은 허락했다. 처음엔 밧줄도 겨우 들어 올렸다. 이제 밧줄 묶고 안전판 걸어 내려가는 데까지 몇 분이면 뚝딱이다. 줄에서 한 번 미끄러진 뒤 실수란 없다. 한 치의 오차란 죽음이다. 로프는 그녀의 밥줄이자 생명줄이었다. 유리창 너머에는 전혀 딴 세상이 펼쳐져 있다. 순백의 와이셔츠를 입고 사무실을 바지런히 오가는 신사들. 숏커트에 투피스 멋지게 차려입은 커리어 우먼들. 내 아이들도 에어컨, 스팀 빵빵하게 나오는 사무실에서 폼나게 일할 수 있을까.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보리차 한 모금에 냉기가 가신다. 달콤한 휴식. 이상하게도 공중에 매달려 있을 때만큼은 지나간 어둠이 생각나지 않는다. 버려졌다는 사실에 암담하고 암담했으나 샛별처럼 빛나는 아이들 눈동자를 보고 선택한 삶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세 아들은 가장 든든한 우군이다. 단칸방에 살 때도 피로에 전 엄마가 잠자고 있으면 어두워도 불을 켜지 않았던 아이들이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우리 엄마 쉬어야 한다며 추운 날에도 밖에 나가 놀았다. 엄마가 고공 청소를 한다는 걸 알고 아이들이 울었다. 멀리서 엄마의 밧줄 청소를 지켜본 큰아들이 '정 하고 싶으면 이걸 끼고 하세요'하며 털 달린 귀마개를 내밀었다. 세상 어떤 난로보다 따뜻했다. # 기적은 길모퉁이에서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신의 선물이라고 했던가. 여자가 밧줄에 매달려 청소한다고 나라에서'자활명장' 칭호를 내렸다. 기자들이 전화통에 불을 냈다. 겁나지 않느냐 물었다. 남편과는 왜 헤어졌느냐 물었다. 어떤 여기자는 휴대폰 벨소리를 트집 잡았다. 비발디의 사계 중 왜 하필 '봄'이냐고? '한겨울이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다'고 주워섬겼다. 고공 청소 언제까지 할 거냐고도 묻는다. 오십이고, 육십이고 체력 될 때까지 할 거다. 돈 아쉬워 시작한 일이지만 이젠 흥이 나서 한다. 앨범 속 그녀가 웃는 사진은 예외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작업할 때 찍은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나. 신바람 나서 하면 그게 귀한 직업이지. 누가 '우빈앓이'를 한대서 신종 전염병이냐 물었다가 망신을 당했다. TV를 마지막으로 본 적이 언제였을까. 억척곰탱이로 산 8년 만에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떼던 날, 허공에서 만세를 불렀다. 사위에 어둠이 내린다. 멀리 교회 종탑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별이 빛난다. 귤이랑 막대 사탕 얻어먹으러 주일학교 갔던 때가 아홉살 때였나 열살 때였나 성탄절 소원을 빌라기에 여군이 되고 싶다고 했지. 교회도 부자 우대라는 걸 알고 발길 끊은 지 오래이나 크리스마스는 그냥 좋았다. 케이크라 치고 붕어빵이라도 사 들고 가야 섭섭하지 않았다. 지상이 가까워져 온다. 산타가 선물보따리 메고 굴뚝에 내려앉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산타가 오지 않는대도 희망의 꽃은 계속 피울지니. 삶이 시린 그대여, 메리 크리스마스!
    Premium.Chosun   김윤덕 조선일보 여론독자부 차장 sion@chosun.c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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