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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종교개혁의 공과

浮萍草 2014. 2. 22. 10:22
    
    9. 종교개혁 - 또 하나의 실패작
    태리반도를 중심으로 르네쌍스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동안 카톨릭적인 틀에 박힌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보려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네덜란드 지방의 에라스무스(서1466∼1536)와 영국지방의 토마스 모어(서1478∼1535)와 독일지방의 마틴 루터(서1483∼1546)는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저작 '우신예찬(愚神禮讚)'을 통하여 중세교회의  형식주의와 부패상을 신랄하게 풍자했고 토마스 모어는 그의 저작 '유토피아'를 통하여 중세
    유럽의 가치관이나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 등을 다 비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 중에서, 
     "유토피아인들은 전쟁을 할 때는 다른 나라 사람을 용병으로 고용한다."
    는 등의 지극히 편협한 인종우월론적인 일면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가 뜻하는 유토피아란 전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보여 주기도 했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신앙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당시의 교왕청과 교회에 대하여 시정을 요구했다.
    이태리반도 등지에서 전개된 르네쌍스는 이교도적인 헬레니즘을 이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유럽북부지방에서 전개된 종교개혁은 기독교 초기의 순수한 종교정신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으로서 순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장려해야 할 성질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사회가 루터시대에 와서 특별히 더 타락된 상태로 떨어졌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자체 내에서도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고 있던 중이었으며, 
    카톨릭의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루터가 개혁을 요구했던 면죄부판매 건만 해도 이미 십자군광란 당시에 크게 성행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개선의 징후가 있다고 해서 카톨릭의 현실적인 타락상이'면죄'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면죄부판매는 루터 당대에 와서는 교왕청과,독일의 금융재벌인 푹거가(家)와 독일의 마인쯔 대주교간의 유착관계에 의하여 교왕 레오10세(재위 서1513∼1521) 때
    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레오10세는 로마에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려고 더욱 다량의 면죄부 판매를 시도했으며 해마다 2,000여개의 성직을 매매하여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의 목적은 허물어져 가는 카톨릭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려는 마지막 발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그 건축물은 바로 유럽민중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졌던 부끄러운 증거에 불과할 뿐이다. 
    그 당시에는 성직자들의 축첩행위는 일상화되어 있었으며 주점이나 도박장을 경영하는 성직자들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반면에 그처럼 혼탁일로를 가고 있는 카톨릭의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노력하는 진지한 종교가들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었다.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경건한 수도자들은 교회의 형식적인 면보다 명상과 소박한 신앙생활 그리고 교육활동 등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들은 신비주의자들로 
    불리웠으나 반교회적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로마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끝없는 혼란 속에 헤매이는 유럽지방에서 유일하게 존재가치가 있었던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로마교왕청은 이들의 신앙생활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만일 정면으로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이단자로 낙인찍어 제거해 버렸다.
    루터가 나타나기 백여년 전에 영국섬의 옥스포드대학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고 카톨릭교회의 관행 중에 많이 스며든 미신적 요소를 타파하자고 
    주장했다. 
    영국 국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그는 생명만은 부지할 수 있었으나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연구하러 옥스포드에 유학왔던 휘스는 그렇지 못했다. 
    보헤미아에 돌아 간 휘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나 그는 서기1415년에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휘스의 죽음은 그때까지 독일인인 신성로마왕과 로마교왕의 지배를 받고 있던 체코인들을 분발시켜서 체코인들은 신앙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20여년간 
    전면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체코를 지배하고 있던 독일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다른 지역들이 점차로 교왕청의 권위에서 벗어나 절대왕권을 수립하고있을 때도 300여개의 연방으로 나뉘어져 있던 독일은 교왕의 최대수탈대상이었다. 
    독일왕(소위 신성로마황제) 수입의 10배 이상이 교왕에게 돌아가는 지경이었으므로 도탄에 빠져들어 간 독일인들 사이에는 자연히 불만이 커져 갔다. 
    이렇게 폭발직전에 처해있던 독일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인 것이 루터였다.
    서기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대학의 신학교수인 루터가 교회문짝에 95개조에 달하는 교왕청에 대한 항의문을 게재하여 본격적으로 면죄부 판매행위를 공격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노성당의 천정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때인 르네쌍스 말기에 1개월여간 여행하면서 교회의 온갖 타락상을 목격한 바 있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면죄부판매를 독려하기 위하 여,
     "면죄부를 사는 돈이 돈상자 속에 땡그랑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
    라는 등의 황당무계한 감언이설로 민중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던 교왕청에서는 루터의 공격을 체제수호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었으나, 그는 비텐베르크의 동쪽 광장에서 교왕의 통첩을 불태워버렸다. 
    이로써 독일 전국에는 반로마적인 열기가 고조되어 갔으며 작센선거후인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비밀리에 그를 발트부르크성에 은신하도록 
    도와주었다. 
    루터는 그 성에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 당시 독일에서 쓰이고 있던 수많은 방언 중에서 비교적 많이 쓰이고 있던 어휘들을 선별하여 
    사용했으므로 뜻하지 않게도 독일어의 표준화작업에 크게 공헌한 셈이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표준화가 이루어져감에 따라서 동족의식이 강해져 간 독일인들은 점차 통일국가를 지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루터 자신은 발트부르크성에서 신약·구약의 번역에 겨를이 없었지만 독일인 사이에서 번져간 반로마·반교회적 운동은 점점 과격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상적인 평등사회를 건설하겠다고 선두에 나선 토마스 뮌쩌는 이미 수차례 영주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왔던 가난한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서기1524년 6월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대대적인 반란은 전 독일지방의 2/3가량의 지역을 휩쓸었는데 그들은 독일지방의 독특한 군사제도에 의하여 각자의 전투
    장비를 스스로 갖추고 있었으므로 완전무장한 정식군대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하기는 전혀 불가능했으므로 다음 해 5월부터는 영주들의 조직적인 군사력에 밀려 와해되기 시작하여 결국 10여만명이 학살당한 
    끝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영주들은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구축해 버렸고 독일지방 농민들은 그 후 300여년간 영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묘한 것은 농민반란에 대한 루터의 태도였다. 
    독일의 농민들은 전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지지했던 까닭에 반란까지 일으키게 되었던 것인데 루터는 오로지 종교적인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영주
    들의 수탈을 만류하는 동시에 농민들에 의한 폭력사태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나중에는 농민에게만 집중적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는데 '모든 폭력'을 증오했다는 루터는, 
     "농민들이 하는 짓은 미친개나 다름없다. 
    그들을 쳐 죽이고,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라!"
    하고 짖어댐으로써 영주들을 즐겁게 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루터에 의하여 미친개로 취급당하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독일지방의 농민들은 루터에게 크게 실망하여 루터보다는 오히려 급진적인 개혁운동가들에게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농민반란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서기1525년 6월에 루터는 자신의 평소의 주장이었던 '성직자도 마땅히 결혼해야 하고 수도원은 폐쇄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서 
    카타리나라는 수녀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루터가 국법과 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수도원에서 탈출하려는 것을 도와 주었던 12명의 수녀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단순히 수녀와 결혼하는 모범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3남 3녀의 자식을 거느리는 왕성한 정력을 자랑함으로써 금욕주의의 대선배이기도 했던 예수 크리스트의 
    참된 제자가 되기에는 애초부터 부적당했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마치 왜열도에서 불교가 변질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루터는 결국 무너져 버리기 시작하던 교회의 권위에 돌 한 개를 던진 격은 되었으나 그 자신이 진실로 돌을 던질 자격이 있었는지는 매우 의아스럽게 보인다. 
    아씨씨의 성 프란체스코가 그 돌을 던졌었다면 또 몰라도.
    하여튼 이런 혼돈상태를 거쳐 가면서 농민반란 이후에는 루터보다도 오히려 영주들 쪽에서 자신들의 기반인 농민대중을 회유하기 위하여서라도 종교개혁에 앞장
    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독일왕은 그러한 영주들의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때마침 막강한 세력으로 소아시아 반도와 발칸반도지방을 휩쓴 오스만터어키가 오스트리아까지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독일왕으로서는 매우 다급한 지경에 빠졌다. 
    터어키애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주들의 종교개혁을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독일왕에게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다시 영주들을 압박하여 신교의 창궐을 막아 보려 했는데 영주들을 비롯한 신교파가 단합하여 왕에게 
    항의했으므로 이때부터 신교파를'프로테스탄트(항의자)'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독일왕은 그들과 타협하여 서기 1555년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종교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고 '지배자의 종교'를 그 지배자의 땅에서 자유로이 시행한다는 정도였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종교선택의 자유를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0. 칼빈의 종교개혁 - 또 하나의 광란
    유럽지방의 중앙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스위스는 그 지역적 특성(고산지대) 때문에 많은 소부락들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한 특성에 의하여 통일을 이루지 못한 까닭에 스위스 지방은 타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스위스 지역은 중세유럽 시기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였으나 서기16세기에 이르러서는 13개의 주가 연맹을 맺고 실제적으로 독립된 연방국가로 행세 하였다. 그러나 형식상으로는 신성로마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자원이 빈약한 까닭에 많은 스위스인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유럽각국에 용병으로 팔려 다니며 생활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끼리의 싸움에서 그렇게 고용된 스위스인들끼리 전투를 수행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유럽의 남·북을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몇 개의 도시들이 발달하기도 했으며 따라서 유럽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수시로 전해져 들어 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이스어 신약을 읽을 수 있었던 스위스의 인문주의적 종교개혁가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한 살이 적었는데 루터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충실함으로써 카톨릭의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적인 구원의 대상을 기독교인에 한정시켰던 루터의 편협성과는 달리 그는 이교도들에게도 비교적 관대한 아량을 지니고 있었던 한편 애국주의적인 경향도 매우 강했다. 취리히 시에서는 그의 주장을 대폭적으로 받아 들여서 종교개혁에 착수하였고 각 도시들을 거점으로 개혁운동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극히 보수적인 산간 지방의 여러 주에서는 카톨릭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으므로 스위스는 두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두 번에 걸쳐서 큰 내란에 말려 들어갔다. 서기1531년에 벌어진 제2차 카펠전투에서 쯔빙글리가 카톨릭 연합군에 패하여 전사하자 루터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복음의 이름으로 칼을 든 자에 가해진 신의 심판…"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쯔빙글리의 죽음과 함께 일단 약화되었던 스위스 지방의 종교개혁운동은, 5년 후인 서기1536년에 프랑스로부터 스위스의 상업중심지 쥬네브로 피신해 온 '장 칼빈 (또는 칼벵)'에 의하여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20여년 간에 걸친 우여곡절끝에 서기 1555년에 드디어 모든 반대파들을 처형하고 세력을 확립한 칼빈은 지나치게 엄격하면서도 가혹한 종교정치를 단행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을 잊으라 이 세상을 잊으라. 신의 영광의 가장 적은 부분이 격하될 지경일지라도 차라리 전 세계가 파멸하기를 택해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주장은 갈팡질팡하던 루터가 명색으로라도 '인간의 구원'을 내세웠던 것보다도 한층 더 퇴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혹한 형벌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술에 취해서 칼빈을 욕한 인쇄업자의 혀를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구멍 뚫어서 추방… 칼빈의 학설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자는 매질한 후에 추방… 이러한 예 말고도 세르베토 같은 강력한 반대자는 아예 화형에 처해 버리기도 하는 등 자신의 주의·주장만을 거의 편집광적으로 쥬네브시민들에게 강요하였다. 그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카톨릭식의 종교재판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게 명백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도 칼빈은 루터만도 못했다. 루터는 폭도들에 대한 처형은 인정했으나 신앙상의 이유로 처벌하는 짓은 인정하지 않을 정도의 기본적인 양심은 있었던 것이다. 11. '칼빈교'의 확립
    크리스트교적인 원칙에 충실해 보려던 쯔빙글리와는 달리 칼빈은 매우 현실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권력장악은 쥬네브의 금융업자들과 기업가들에 대한 그의 세심한 배려와 무관하지 않았다. 즉, 농촌사회다운 전원적인 생활을 염두에 두었던 루터 등과는 달리 칼빈은 매우 실무적으로 경제생활을 다루었다. 그는 상업이나 금융업 등에서의 이윤을 통한 자본획득에 대해서 중세때처럼 죄악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루터조차 '부당이득'이라고 공격해 마지않은 교역과 금융업에서의 이윤을 다른 소득과 마찬가지로 존중해 주는 방향을 택했다. 칼빈의 그러한 단면은"기업으로부터의 소득이 토지소유로부터의 소득보다 커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있는가? 상인의 이윤은 그의 근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기술했던 그의 편지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처럼 획기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은 전 중세기를 통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중간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들을 도둑놈으로 비난해 온 전통에서도 탈피한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그러한 방침은 도시에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마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사회윤리학적인 이론구조가 세워진 것도 상업적 기업과 도시산업의 실제적 기초위에서였으며 신학적인 배경이라고는 매우 찾아내기 힘들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경제적인 미덕을 인정하고 찬양한 유럽지방 최초의 체계적 종교사상이 되었다. 전통적인 크리스트교의 입장은 어떤 거래에 있어서도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공정성과 정의에 입각하여' 이자받는 행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에 있어서의 적정한 이자라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기준이라는 것이 "자연의 정의(正義)와 황금률이 지시하는 이자를 넘지 않도록 하는 책무를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것…" 이라는 대단히 모호한 원칙(?)이었다. 또한 그는,"부의 축적은 죄가 아니지만 방종과 허례허식을 위한 부의 오용(誤用)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로마교회는 그 통치자들의 본보기를 통하여 사치와 허례허식을 장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개혁되는 교회는 절약하고 검소해야만 한다." 는 일견 매우 상식적이면서도 바람직한 의견을 내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겉으로라도 이윤획득을 금기시해 왔던 중세적 교회의 방침으로부터 크게 방향전환을 도모한 그는 특히 금융업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물한 셈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물질적 이익에 대해서 무관심한 대신에 그 이익을 신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사용하자." 라는 일견 그럴듯한 논리를 전개하고, "크리스트교도는 자기의 기업 자체를 하나의 종교처럼 진지하게 운영해야 한다." 고 역설함으로써 신흥 자본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축재기술과 직업에 신의 은총을 기대해도 좋으리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칼빈은 빈곤한 사람들을 죄인다루듯 한 반면에, 번창하는 상인의 기업은 "크리스트교적인 미덕인 동시에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 고 주장하였다. 예수·크리스트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법한'미덕'을 그가 발견해 낸 사실은 그 자신과 예수·크리스트를 칼빈이 혼동하고 있던 거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증거로 보인다. 도대체 예수님의 거룩하신 가르침의 어느 구석에 그러한 획기적인 '미덕'에 대하여 언급했다는 말인가? 자본획득에 보인 그의 관심은 크리스트적인 것이 아니라 탈무드적인 것에 더욱 가깝다. 그의 도덕 및 법률적 체계라는 것이 구약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보다 더 '유태적 가치관'의 소유자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새로운 교리와 함께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도 새로운 척도를 창출해 내었고 따라서 그의 논리는 더 이상 크리스트의 참된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즉 신흥자본가들의 취미에 알맞도록 각색되어 짜 맞추어진 유사종교로서의 '칼빈교'가 탄생한 것이다. 토니(R.H. 토니)가 지적하고 있듯이 '칼·마르크스가 서기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서 한 일을(즉 사회혁명을) 칼빈은 16세기의 부르조아들을 위해서 했다'고 보는 관점은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그나마라도 자신의 주장에 '도덕성'이라는 것을 짙게 부여하려고(?) 종교재판소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이단자'들에 대하여 합법적이고도 조직적인 고문과 화형을 서슴치 않고 심지어는 부모를 때린 혐의를 받은 어린이를 참수시키기까지도 하였던 그의 기묘한'도덕성'은 부정한 상행위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제를 단행함으로써 쥬네브를 '도덕성이 높은 도시'로 유럽인들에게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강압적 수법은 이미 로마교회에서도 낯설지 않았던 방법이었고 또한 그런 방법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고 따라서 오래 갈 수도 없다는 점도 로마교회의 몰락과정에서 보여준 바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가 '상업적 이익'에 대하여 대단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변질되고 오도되어 간 크리스트교도(사실은 칼빈교도)들이, 이제는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서 보다 많은 '상업적 이익'을 획득하려고 바쁘게 날뛰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본획득의 열망과 금욕주의적 생활이라는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개념을 교묘하게 꿰어 맞춘 '크리스트의 가면을 쓴 칼빈교'는 일종의 심각한 정신적 혼돈의 산물 이었다고나 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럽반도의 북부지방에서는 금욕주의가 보다 강하게 실시되어 더러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으나 유럽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부지방 에서는 자본획득의 열망이 더욱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결과는 그 후의 세계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은 미증유적인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칼빈의 활약에 의하여 쥬네브는 '도덕성이 높은 도시'로 평판이 높아졌으므로 서유럽지방의 각국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와 칼빈의 수법을 배워 가기도 했다. 그처럼 전투적이고도 편협한 광신에 가까운 종교적 방식이 서유럽을 통해 미주대륙 및 전세계로 퍼져 나간 것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뭔가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비슷한 종족적 구성과 문화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유럽인들끼리도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서슴치 않았던 마당에 소위 '이교도의 땅'에서 무슨 짓인들 벌이지 못할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복음서에 대하여 구구각색으로 저마다 해석을 달리한 결과 그에 따라서 소위'신교도'들도 곧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버렸고 각 종파간에도 분쟁이 격렬 해져 갔다. 그런 현상은 유럽인들이 복음서의 참된 정신이 아닌 단지 형식에 불과한 문자해석에 너무 광적으로 집착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어리석은 장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적 혼돈에 빠져 들어간 유럽지방이지만 그래도 진정한 종교가도 아주 없지는 않아서, 칼빈의 광적인 포학성을 목격한 카스텔리옹은'서로간의 사랑에 의한 종교적 관용'을 가질 것을 호소하기도 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흥분하기 쉬운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편협한 칼빈주의에 의하여 사랑과 관용성이 급속히 엷어져 간 것은 새로운 비극을 예고하고있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소위 혁명적인 방법이 보편화 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주로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히고 설켜서 종교전쟁이라는 것이 발생했다. 서기1562년에 브왓시에서 신교도에 대한 대량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소위 위그노전쟁이라는 종교내란이 발생했는데(위그노는 프랑스의 칼빈계 신교도들을 말함), 그 내란에서 신·구교도들은 각기 주변 외국들의 원조를 얻어 싸웠으므로 프랑스는 유럽각국의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지모에 밝은 왕비 카트린느가 신교파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서기1572년 8월23일 밤의'성 바르톨로뮤 축제' 전야에 벌인 대학살 사건으로, 신교도 시민 2만여명이 구교도 시민들에게 살륙당함으로써 그 더러운 전쟁(내란)은 절정에 달했다. 그런가 하면 서기1589년에는 신교도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발보아 가문의 앙리3세가 광신적인 도미니크파 수도사에게 암살당하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은 부르봉 가문 출신의 앙리4세는 서기1598년에 이르러 마침내 낭트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신·구교도들 모두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내란에 종지부를 찍고, 국가적 통일을 꾀하면서 왕권의 절대화를 향하는 큰 자취를 기록했다. 실로 40여년간이나 '사랑의 종교'라는 이름을 걸고서 살벌한 동족상쟁을 벌여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으로 볼 때 로마 카톨릭이 아무리 우신(愚羚)이었을지라도'배금주의(拜金主義)'라는 우신보다도 그래도 나았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종교를 개혁했다고 해도 높은 인류애와 도덕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무한정한 욕망이라는 것은 결국 핵폭탄과 인간성 자체의 상실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