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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종교재판 광란

浮萍草 2014. 1. 22. 10:07
    5. 종교재판 -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파탄선고" 타리파에 대한 절멸적인 대탄압 이후에도 그들의 교리에 자극받아서 유사한 종교운동들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기독교세계의 체제유지를 위하여 로마교회측에서는 적절한 대책을 강구한 끝에 종교재판소라는 것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인류역사의 최대의 수치이기도 한 저주스러운 종교재판 시대의 막이 올랐던 것이다. 교왕은 약탈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개별적인 이단자 사냥을 금했고, 유태인 사냥도 같은 이유로 금했으며 오직 이단자 심문소(즉 종교재판소)에서만 심판을 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모든 조치는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으리라고 판단된다. 종교재판소에서 유죄로 판결이 난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화형이 집행되었으나 단순히"혐의'를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더 나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유럽이라는 세계에서 그것도 다 같이 사랑을 간판으로 내건 기독교도들끼리도 이런 무자비한 학살을 서로 밥먹듯이 해치우던 자들이 다른 세계의 다른 풍습을 가진 자들에게야 어떤 짓인들 못할 것인가? 그러한 우려는 머지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유태인들도 종교재판에 곧잘 걸려 들었으나 실제로 처형된 것은 유태인 한 명에 비해 기독교 이단자는 1000명 꼴로서 종교재판 자체가 기독교 세계 내부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자체 진통이라는 인상을 지울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향은 당시에 급속도로 강화되고 있던 절대왕권 및 그 반대로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던 교왕에 대한 민중의 지지사이의 심각한 갈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 져 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되어진 바에 의하면 이미 서기 11세기부터 기독교 세계의 인간생활은 경쟁적이면서 비인격적인 형태로 변해 갔다. 그나마 유럽기독교 세계를 지탱해 주던 봉건제도가 서서히 붕괴되어간 데서 그러한 경향은 비롯되기 시작했는데 그에 따라서 새로이 큰 성장을 하게 된 강력한 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또한 무역·시장경제·금융제도 등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토지소유자 및 자본가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봉건영주대신 등장한 지주계층은 농업을 기업화하기 시작하여 자본획득에 열을 올렸으며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대거 임금노동자로 전락해 갔다. 빈부의 차가 격심해지면서 빈곤에 시달린 민중사이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예언하는 자들이 횡행하기 시작했다. 확대일로를 걷는 이슬람제국의 세력 부의 집중에 의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의 심화 기아 및 질병과 더불어 교회에 의한 죄악과 사치 끊임없는 귀족들간의 전쟁 등은 전유럽의 민중에게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말세적인 분위기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한 지배계층에 저항하려는 의식이 싹튼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그리고 그 저항의식은 쉽사리 구세주의 출현을 기다리는 민중의 열망과 일치하게 되어 소위 '메시아니즘'이 사회의 저변으로 폭넓게 퍼져 갔다. 혁명적 열정을 동반한 메시아니즘이 자신들에게 가해올 수도 있을 가공할 결과를 눈치 챈 지배계층(즉 교회와 귀족 등)은 이러한 메시아니즘적 열정을 억누르려는 수단을 창조해 냈는데 그 결과가 종교재판 및 대마녀광란이었다. 종교재판소는 일종의 군사적 특수기관으로 볼 수 있고 이단자에 대하여 가차없는 박해를 일 삼았으므로 '이단자’들은 지하조직화하여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결과로 이단자를 색출해 내기가 어려워지게 되자 서기13세기 중엽에 이르러 알렉산더 4세 교왕은 이교도의 자백과 연루자추적을 위한 고문을 인정했다. 바야흐로 신국(神國)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괴변이 종교의 이름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이단'으로 몰린 대표적 사상인 메시아니즘은 요아킴(Joachim)·프레드릭 2세 등의 출현으로 민중사이에 깊이 파고 들었는데 프레드릭2세(서1194-1250)는 로마교왕청의 재물을 몰수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선언하는 등 정면으로 교왕과 맞선 끝에 파문당했다. 그러나 얼마 후인 서기 1284년에는 부활한 프레드릭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다가 화형당하는 등. 그 후에도 여러명의 프레드릭이 출현했다. 민중의 염원은 메시아 프레드릭의 출현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사이에는,“프레드릭이 백마를 타고 나타나서 모든 사회부조리를 일소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 모두가 재산을 공유하며 살아갈 것이다.” 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착취당하던 민중의 이러한 열망은 '프래질런트(Flagellant)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광신적 고행자들의 집단인 프래질런트들은 요아킴이 예언한 제 3의 시대인'성령의 시대'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온 유럽에 그들의 메시아적 가르침을 전파하고 다녔다. 이에 대하여 탄압이 심해지자 프래질런트운동도 점점 과격화되어 갔으나 결국 이단으로 낙인찍힌 후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하여 이 역시 지하로 잠적해 들어갔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서기 1348년에 다시 표면에 나타난 이들은 이번에는 흑사병이 유태인들 때문이라고 선전하며 모든 유태인에 대하여 저주와 학살을 자행하는 한편, 교회를 습격하여 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민중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흑사병의 창귈은 유럽민중의 메시아에 대한 갈망을 더욱 부추겼고 이에 편승하여 콘라드 쉬미트(Konrad Schmidt)라는 자가 프레드릭이라고 자칭하고 나서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서기1369년의 종교재판에 의해 화형당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종교재판의 광기가 전 유럽을 휩쓸어 서기1416년에는 하루사이에 300여명의 프래질런트들이 화형당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지방의 중심부인 보헤미아에서는 휘스(또는 '후스')파 운동이 일어나서 성직자들에게 청빈한 생활을 강요하고 때로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교왕은 휘스전쟁(Hussite war)이라는 휘스파 진압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탄압에 직면한 보헤미안 수천여명은 공동체를 만들어 시골로 다니면서 약탈로 생활해 가기도 하는 등 유럽사회는 바야흐로 혼돈의 와중에 깊이 빠져 들었다. 서기 1476년에는 한스 뵘이라는 자가 성모마리아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평등사회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 모두가 '이단’으로 탄압받았다. 결국 마녀사냥은 교회와 영주들의 착취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과 그로 인한 민중의 불만에 대처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조작에 의하여 교회와 귀족들은 마귀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선한 자들로 인식되었고 그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마녀로 몰아 붙임으로써 타락에 깊이 빠진 기독교사회의 모순에 대한 속죄양으로 삼았다.

    서기1484년에 이노센트교왕은 하인리히 인스티토르, 야곱 스프렝거라는 수사관들에게 교서를 내려서 독일지방 전역의 마녀들을 근절하기 위해서 완전한 종교재판을 실시 하도록 허락했다. 이 두 수사관이라는 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마녀들의 망치(Hammer of the witches)'라는 저서는 그후 200여년간 전 유럽을 휘몰아친 마녀사냥의 광풍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지침서로 등장했다. 그 저서에서는 마녀 색출방법·재판방법·고문방법·유죄판정법·선고방법 등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서술하여 마녀사냥제도는 완벽한 제도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마녀광란에 의해 서기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만 유럽에서 50여만명이 마녀 또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화형당했다. ㆍ50만명의 마녀들!'
    우리는 화형당한 '마녀'들의 숫자에도 놀라지만 그들 화형당한 자들이 마녀로 낙인찍히게 된'혐의사실'이라는 조항들을 보고도 놀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적용된 혐의사실이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을 맞춘 죄, 불법적 악마 연회에 참석한 죄, 남녀 악마들과 음란행위한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다닌 죄 등이며, 그 밖에도 이웃의 암소를 죽인 죄, 우박을 불러온 죄, 농작물을 망친 죄,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먹은 죄 등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맹랑한 '악마적'인 조항들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죄목들을 씌워서 마녀들을 만들어 내는 데는 그야말로 악마들이나 생각해 낼 수 있을 듯한 모든 고문방법이 총동원되었다. 야만적인 유럽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고백하게 하는데 고문이 사용된 것은 서기 1180년 이후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에는 '악마와 함께 있었다'는 누명을 썼다고 해서 처형당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기 1000년 경에는 '빗자루 타고 날아 다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할 정도로 악마의 권세따위를 무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농담으로라도 신국에서 악마가 설치고 다닌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기 1480년 이후부터는'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전 기독교 세계가 악마들의 대침략을 받고 있다고 믿은 탓일까? 처음에는 마녀들에 대한 고문을 허용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던 교회가 서기 1484년 이후에는 어떠한 잔인한 고문행위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이기 시작하자 유럽세계는 마침내 마녀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지옥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마녀광란이 한창이던 때 비평가이던 '요한 매토이스 메이파르트'가 기록해 놓았던 마녀고문실의 참담한 광경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손발, 머리통에서 빠져 나온 눈알들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발목들 관절에서 뒤틀린 힘줄, 몸통에서 뒤틀린 견갑골 부풀린 동맥, 밀리어진 정맥, 천정까지 끌어올려 졌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빙글빙글 돌리고 머리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매달리는 희생자들을 보았다. 나는 고문자들이 피의자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회초리로 두들기고 스크루로 손가락을 찌부러뜨리고 무거운 물건을 몸에 묶어 공중에 매어 달고 굵은 밧줄로 꽁꽁묶고, 유황으로 지지고, 뜨거운 기름을 온 몸에 발라 불에 그을리는 모양들을 보았다‥" 스트라페이도(strappado ;죄인의 손을 뒤로 묶어 매달았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는 고문)·래크(rack :선반고문대)·썸스크루(thumbscrews :엄지손가락을 비틀어 부러뜨리는 고문)·아래로부터 불로 달구는 낫박힌 의자·가시박힌 신·바늘꽂힌 띠 빨갛게 달군 쇠·빨갛게 달군 뻰치 등의 모든 고문방법이 총동원되었으며 한 번 마녀로 낙인찍힌 피의자에게는 추호의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마녀 용의자들 중에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도 많이 포함되었으며 고문실에 끌려갔던 모든 마녀들의 단 한가지 소원은 빨리 화형당하여 잔인무도한 고문의 고통 에서 한 순간이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것 뿐이었다. 더욱 웃지도 못할 일은 마녀로 낙인찍혀서 끌려간 피의자들의 가족들이 마녀를 화형시키기 전에 열리는 재판관들의 연회비용 화형시킬 때 쓸 나뭇단의 비용도 부담했을 뿐 아니라 수사관이나 고문자들의 용역비까지 부담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방관리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마녀사냥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저들 마녀사냥꾼들에게 마녀나 마법사의 혐의를 받은 자들의 전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한 탐욕추구에 몰두하게 된 마녀사냥꾼들은 나중에 재산이 많은 부유층·고위층·권력층까지도 마녀후보자로 들먹거리기 시작했으며 묘하게도 그 무렵부터 마녀광란도 가라 앉아가기 시작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한 자들의 일대 잔치판이나 다름없던 대마녀광란이 유럽인들의 심성을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교회와 사회체제에 불평·불만이 있는 의식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짓이기고 전 유럽을 지옥같은 광란 속에 몰아 넣었던 자들이 그 후로도 뻔뻔스럽게 기독교 세계의 지배자로 변함없이 군림해 간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유럽세계에서 요란떨던 마녀광란은 컬럼버스 이후에는 유럽의 해적선단을 따라서 전 세계로 퍼져 가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평화스럽던 지구촌에 일대 혼란이 찾아들고 있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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