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44) 유태인의 발흥

浮萍草 2014. 2. 12. 14:08
    ㆍ* 유태인의 부흥을 위한 여명
    페인지방에서 거주했던 유태인들은 세파르딕(Sephardic) 유태인으로 불리웠고 동유럽지방으로 추방당해간 유태인들은 아쉬케나직(Ashkenazic) 유태인으로 불리웠다. 세파르딕계는 대체로 범세계적으로 활동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아쉬케나직계는 유태교를 순수하게 지키려는 성향을 가져서 히브리어와 토라와 탈무드를 신봉하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차후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게 되는 유태인들은 대부분 세파르딕계 출신이 많았다. 유태인들이 경제적으로 다소나마 윤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중세 유럽사회 자체의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즉, 중세 유럽봉건사회에서 중산계층의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신분은 유태인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중세 유럽봉건사회는 승려·귀족·농민이 그 골격을 형성하고 있었고 상공업은 대체로 경시되었으며 이자돈을 받는 금융행위는 경멸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일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상태에 처해 있던 유태인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의 사상적 경향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에 의하면"상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탐욕에 봉사하기 때문에 마땅히 단죄를 당해야 한다."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이었다. 따라서 상공업 및 금융활동에 있어서만은 거의 유태인들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했다. 중세유럽의 금융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는 서기 14세기 말엽에 이르러 유태인들을 끌어 들여서 기독교도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던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한 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유태인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축적된 부로써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게 되었다. 돈 이외에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바로 그 재산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어차피 유태인들이 믿을 수 있는 다른 도구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록 천대받는 한이 있어도 악착같이 부를 쌓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태인의 거주지역은 게토(Gheto) 또는 슈테틀(Shtetl)이라고 불리웠다. 게토는 이태리반도에서 번성하던 항구도시 베니스에 있던 최초의 유태인 거주지가 대포공장(게타:Gheta) 옆에 있었던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그 거주지의 성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게토출신 유태인들은 주로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 가는 국제적·사회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비하여 슈테틀의 유태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고 신비주의·미신 등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다. 유럽지방의 중세를 통하여 유럽지방의 지중해 연안을 무대로 한 유태인의 상업활동은 매우 활발했고 금융업에도 많이 진출했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태인들은 흔히 고리대금업자로 인식되어서 기독교도들에게 악평을 받았으나 중세가 지나가면서부터는 오히려 기독교도들이 그와 같이 이윤이 많은 유태인들의 직업을 빼앗으려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유태인 추방이 국제정세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유태인 자본가들은 당시 한창 발흥하고 있던 유력한 도시인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가서 계속 그들의 생업이던 상공업 활동에 종사했다. 그에 힘입어서 암스테르담 상공업 활동은 대단한 활기를 띄게 되었고 얼마 안 가서 유럽의 금융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가 되었으며 홀란드는 그로 인하여 번성을 구가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들 중의 1만여명 정도는 아예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서 같은 유태인 출신 항해사인 컬럼버스가 갔던 길을 뒤쫓아 미주지역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스페인에서는 서기 1495년, 1497년에도 유태인 대추방을 단행했으며 그 중 약 10만여명 정도가 유럽을 떠나 멕시코 부근에 이민가는 쪽을 택했다. 미주대륙으로 향한 초창기 유럽이민은 이들 유태인들이었다. 주로 스페인에서 별로 재미를 못 보며 살고 있던 자들로 구성되었던 초창기 미주침략자들의 무리 중에 유태인이 많이 끼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스페인 침략자들 및 유태인들의 대거 이주와 함께 시작되는 미주대륙의 새로운 역사는 원주민들에게는 파멸적인 재앙이 닥쳐왔음을 의미했다. 인디오(Indio)들의 참담한 수난의 역사가 '서구 기독교문명의 이름' 아래 그 시작을 알린 것이었다. * 유태인의 미주대륙 이주
    nbsp; 유태인 컬럼버스가 신항로 발견을 목표로 몰고 간 함대에는 많은 다른 유태인들이 같이 타고 있었다. 선원 통역 지도전문가들은 물론 유태인 외과의사도 끼어 있었는데 험한 항해끝에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을 때 통역이었던 유태인 루이스 드 토레스는 원주민에게 먼저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본격적인 유태인의 미주대륙 이주는 유태인 페르난도 드 로론하와 포르투갈왕인 마누엘 사이의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드 로론하는 브라질 지방에서 정주할 권리를 얻기 위해 매년 브라질 연안을 7,000평방 키로미터씩 탐험하고 같이 항해한 자들이 살 장소에 요새를 쌓기로 약속했다. 그에 따라서 서기 1502년에 드 로론하는 5척의 배에 종교재판을 피하려는 마라노(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을 가득 태우고 브라질로 출발했다. 그들은 서기 1503년에 최초의 요새를 브라질 지방에 구축했고 그 후 유태인 이민은 급증했다. 그들은 서기 16세기 중반경에 이미 담배농장과 사탕농장을 여러 곳 소유했으며 각종 원료들을 수출하고 유럽제품들을 수입하는 데 종사하여 대상인이나 자본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종교재판의 광풍이 식민지까지 몰아쳐 오자, 많은 유태인들은 다시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을 탈출하여 북미주 뉴암스테르담(뉴욕)에 도착했다. 서기 1654년 9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십여년 후 영국 해적들이 네덜란드 해적들에게 승리하여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고 뉴욕으로 지명마저 바꾼 후에도 유태인은 계속 남아서 영국인 행세를 하며 살게 되었다. 당시 북미대륙에 이주해 온 영국인들은 주로 청교도였는데 그들은 유태인들과 종교적으로 유사성이 많았으므로 노골적인 적대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교도들도 유태인처럼 구약을 중시했고 영국섬에서 탈출해 온 것을 구약의 내용중에 있는 유태인들의 출애급에 견주었으며 매사추세츠만 연안의 식민지를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들이 북미대륙으로 대거 이주한 증거로는 그 후 미합중국의 헌법에 모세법전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는 점 하버드 대학교 창설때 이미 라틴어·그리이스어와 함께 히브리어도 가르쳤다는 점 심지어는 히브리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던 점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에 이어 독일에서도 많은 유태인이 이주하여 선주(船主)·직공·개척자·노예매매업자 등으로서 사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미주대륙이란 그야말로 모든 면에 있어서 '자유의 천지'였다. 유럽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듯이 유태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기업가로 성장해 갔다. 재산을 모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던 이들 유태인 이민들은 그대신 그들의 전통이었던 교육은 오히려 등한시하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하여 유태인 이주자들의 세력은 북미주 원주민들의 모든 생활터전을 발판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게 창귈해 갔다. <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