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47) 조선개국 후의 한민족 사회상

浮萍草 2014. 3. 6. 11:11
    조선의 영토(?). 청에서는 조선이 대륙의 중앙에 있다고 해서 중국이라 불렀다... © 편집부

    ㆍ조선개국 후의 한민족 사회상 성계,즉 조선 태조의 등극은 사회 풍조면에서도 대단히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삼국 중엽이후 고려말까지 성황을 이루었던 불교가 일부의 훌륭한 불교학자들을 배출해 낸 이외에는 사회에 미신풍조를 만연시켰고 타락이 극에 달했으며, 사원 에서 소유하고 있는 전답과 노비들의 수는 엄청났다. 불도(佛道)에 대해서는 대단히 호의적이던 이 성계 태조도 이러한 세속적 불교의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지 않는 한 어떠한 사회개혁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일종의 종교개혁도 함께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유럽지방의 중세에 교회와 봉건영주들이 함께 암흑시대를 연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 정립시기에 있어서의 신라의 투쟁적인 호국불교로부터 비롯된 고려 까지의 세속 불교적 사회조직은 이로써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보다 합리적인 성리학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성리학은 사회적 목표를'보다 이성적인 인간''보다 현실에 합리적인 인간'그러면서도 '인간의 본질과 우주의 원리를 추구하는 교양인'을 만들어 내는 데 두고 있었다. 남송시대의 주희와 정이에 의하여 정리되어'정주학'이라고도 불린 이 새롭게 단장된 유교적 사상은 그러나 지나지방에서는 이론만 무성했을 뿐 별로 현실화되지는 못하였으나,조선은 처음부터 성리학을 실천에 옮겨 응용하였다. 성리학은 관념적인 불교에 비하여 실생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실학(實學)'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대경세가(大經世家) 정 도전이 성리학을 대폭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성리학이 그런대로 많은 가치있는 이론들을 지니고 있다고 본 때문이다. 성리학의 인간중심 사상은 홍익인간 사상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우리 민족은 외래종교의 구복신앙에 너무 오랜동안 미신적으로 탐닉해 온 결과 홍익인간의 정신을 잊어 버렸었고 고려말엽에는 남송에서 새로이 정리된 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을 역수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은 지나지방 중심적인 왜곡된 역사인식(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도전은 강력한 역사인식을 기본으로 하여 민족적 긍지를 십분 유지하면서 성리학의 장점만을 취하는 실리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대체로 봉건적이고 귀족독재적인 사회는 극도의 빈궁민들을 양산하게 되며 그에 대한 불만을 '운명'탓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미신을 조장하는 게 동·서양을 막론한 인류사회의 일반적 경향이다. 그에 반해서 대폭적으로 민본적(근대 민주주의에 가까운) 정치제도를 추구한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정 도전에 의하여 수립된 갖가지 독재방지 제도와 언론보장 제도, 엄격한 토지분배 및 토지관리 제도를 통한 부의 편중방지와 민중생활보장 등으로 인류문명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근검절약 장려와 과다한 물질숭배에 대한 배척을 통하여 민중이 고루 잘 사는 민본적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근거로 하여 예의를 법보다 한층 우위에 둔 법치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 법은 민중은 물론 제왕까지도 지켜야 할 갖가지 인간생활에 필요한 도덕률을 기본으로 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간본위의 법이었다. 단군조선이래의 홍익인간 이념도 이로써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시 그 참다운 실천을 보게 된 것이었다. 조선왕조도 후기에는 세도정치의 출현에 의한 부와 권력의 집중으로 고려말기의 봉건적인 상황을 닮아가다가 멸망의 비운을 맞는 한 요인을 만들게 되지만,이러한 개국이념은 수백년간이나 조선의 인간중심사회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조선의 민본적 제도는 실로 인류역사상에 되살아난 신시의 건국이념의 실현이었으며 현대의 어떠한 '민주제도'보다도 우수한 것이었다. 물질의 가치를 최소한으로만 이용하면서 인간성에 대한 추구만은 최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 부국강병의 기초를 민중생활의 풍요에서 건설하려 한 조선. 우리는 민중생활의 향상을 목표로 삼는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마치 서양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던 독점물인 양 서양제일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해온 것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이전에 고려의 강군에 의하여 수차례 격파당한 적이 있는 반란군 출신으로서 영토에 대한 야심이 대단하여 산해관 이북의 만주지역까지도 독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방은 대대로 단군조선 후속국가들의 신성한 강토로서 산해관 이남의 패권자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던 곳이다. 몽골인들을 장성 북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 주원장은 고려에 대하여서도 강압적으로 영토를 빼앗으려 하였으므로 최 영 장군 등 명나라 군사의 허약한 실력을 뻔히 아는 고려의 호랑이같은 장수들은 명나라 공략을 주장하였던 것이나 실리주의적인 신진세력 이 성계장군은 우선 내정부터 튼튼히하여 민생을 안정시킨 후에 서서히 도모하자는 정 도전의 만전시책을 받아 들였던 것이며 그에 따라서 만주출병은 잠시 연기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더이상 고려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눈치채고는 곧 고려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취소하였고 따라서 만주지방은 임자가 불확실한 어중간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이 성계장군 자신이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요하(서압록)지역까지 출병하여 석권한 적이 있었고 국호를 조선으로 한 것도 단군조선의 아름다운 풍속과 강대한 국가 적 발전을 다시 중흥시키자는 뜻이었던 만큼,조선 개국 후에도 만주 전역을 되찾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정 도전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태조 7년에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정 도전이 모함을 받아 죽게 되어, 만주 전역을 회복하여 만리대국을 이루려던 계획은 포기되었다. 대경륜가 정 도전의 죽음은 그 자체가 조선의 대명정책(對明政策) 대부분을 바꾸게 하는 최대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로서도 요하 이동의 천산(千山) 산줄기 동쪽지방에 대해서는 조선의 관할 지역으로 잠정적으로 인정했으므로 동압록강 서쪽과 두만강 북쪽의 남만주· 동만주지역은 조선의 영토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들인 옛 금나라의 후손들은 건주여진·해서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조공을 하여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불렀다. 이들은 산해관 남쪽의 보다 야만적인 명나라보다는 동족국가이기도 한 문명국 조선을 가까이 하려 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국경분쟁을 사전에 피하기 위하여 압록강 서쪽의 넓은 지역을 중립지대로 설정하였고,민중이 그 지역에 들어 가서 사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마치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천산 산줄기의 요충지인 봉황성 이동은 엄연히 조선의 관할 지역이었던 것이며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이 곳은 두 나라 사이에 첨예한 영토분쟁의 초점이 된다. 조선은 개국후에 욕심 많은 왕자 이 방원에 의한 추악한 권력 장악싸움(소위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태자와 정 도전이 개죽음하고 말았다. 이에 실망한 태조 이 성계는 권좌에서 물러나 함흥으로 가서 실의속에 지내게 되었는데 이러한 초기의 내분에 의하여 고구려본토 회복은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진인들은 때로는 그러한 조선을 우습게 알고 가끔 변방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한 경향은 사실은 몽골의 침공이후 자신들의 나라를 가지지 못하고 있던 여진인들이 다시 한번 재기하기 위하여 세력을 키워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실력행사 행위의 일부이기도 했다. 대략 명나라 선종왕으로부터 영종왕 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왕성해지기 시작한 산해관 북방의 배달민족 방계세력(즉 여진족)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여진인과의 국경충돌도 빈번히 일어났다. 조선의 제4세 임금 세종은 북방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김 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두만강변에 6진(六鎭)을 설치케 하고 최 윤덕 장군으로 하여금 압록강변에 4군 (四郡)을 설치케 하여 만주를 도모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세계사상에 가장 영명한 군주의 하나였던 세종임금은 외면상으로는 명에 대한 조공무역 정책을 유지하여 실리를 구함과 동시에 명의 경계심을 풀면서, 국력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실용적인 과학기술의 진흥과 문자통일에도 주력했다.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선비이자 명군인 세종임금은 현명한 선비들과 유능한 장수들을 두루 기용하여 조선의 기초를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여진인들은 조선의 풍부한 산물을 얻기 위하여 조공무역을 간청해 왔으므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서 변방에 시장을 개설하였고, 그러한 남·북 교류는 매우 빈번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가끔 가다가는 소규모의 사소한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세종임금의 서거후 보위를 물려 받은 문종은 매우 영민하였으나 몸을 돌보지 않은 과도한 공부로 인하여 체력이 쇠약해져서 요절하고 말았다. 문종의 아우인 수양대군은 불안한 정황속에서 문종을 이어 보위에 오른 어린 조카 단종을 쿠데타를 일으켜 폐위시킨 후 스스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했다. 대의명분에 투철한 사군자(士君子)들은 그러한 수양대군의 폭거에 분노했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는데 수양대군은 관련자(사육신등)들을 색출해 내어 잔인무도한 악형을 가한 끝에 참형에 처해 버렸다. 또한 자신의 형제로서 영남지방의 순흥대도호부로 귀양간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 보흠 및 그들의 추종자들과 단종복위를 추진하다가 발각당하자, 순흥부사와 금성대군을 중벌로 다스려 처형함은 물론 많은 순흥주민들을 학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순흥읍 자체를 완전히 파괴해버리고 폐읍(廢邑) 조치를 내리는 한민족 역사상 전무후무한 폭거를 자행했다. 이는 물론 반대자들에 대한 커다란 경종을 울리고자 한 폭력행사였으나 수양대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어린 단종마저 귀양지인 영월에서 교살시켜 버림으로써 민심은 그를 떠나게 되었다. 국내에서 지지기반을 얻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대부들에게 둘러 싸이기는 했어도 그는 융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북방정책을 실시하여 만주회복을 기도 했다. 그러나 세조의 야심을 눈치채고 강력히 견제해 온 명에 대해서는 외관상 저자세로 일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신 양 성지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학진흥의 기풍이 일고 자주성을 견지하려는 기상이 높아가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조선의 문물은 매우 융성해져서 여진과 왜의 사신이 항상 수천명씩 내조하여 대궐뜰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명의 사신마저 조선을 가리켜서 '천당(天堂)' 또는 '벼슬하고 싶은 나라'라고 부러워해 마지 않았다. 세조말엽에는 명이 여진인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하여 건주 여진에 대한 협공을 요청해 왔다. 당시 여진이 몽골의 에센·칸 휘하 군사들로부터 침공을 받은 후부터 여진에 대한 명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므로 여진과 명과는 공공연한 충돌이 잦았다. 명에 대해서만은 저자세이던 세조는 유능한 젊은 장수 남 이로 하여금 동압록 북방의 건주위를 정벌케 하여,그 부족장인 건주위도독 이만주(李滿住)부자를 격살 하고 큰 승리를 얻음으로써 건주위 여진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세조는 명에 대한 외교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건주위를 공략하도록 했고 또한 이를 발판으로 용장 남 이와 함께 만주공략을 도모하려 하였다고 하나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존명사대적인 얼빠진 사대부들의 참소를 받아들여서 이 시를 역적모의하려는 증거로 삼아 그를 처형시켜 버리고 말았다. 1년 남짓한 재위기간에 해 놓은 것이라고는 남 이 장군을 처형해 버린 것밖에 없던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였으나 남 이 장군 처형 이후로는 만주회복을 도모 하는 진취적 기상은 점점 약화되었다. 반면에 춘추대의를 내세운 얼빠진 존명사대론자들이 득세하면서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소중화로서의 의식에 사로 잡히는 자폐증적인 현상마저 두드러져 갔다. 실로 태조 이 성계의 진정한 뜻이 담긴 국호'조선'의 의미가 무색해져 버리는 망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종을 이은 성종임금 시절에는 모든 분야에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워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며 당시 환관들의 발호와 내정문란으로 쇠퇴 일로를 걷고 있던 이웃 명나라와 좋은 대조를 보여주기도 했다. 성종임금은 세조때 편찬된 바 있던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하여 강역을 확정하기도 했으며 만세불변하는 왕도정치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류문명 최고봉의 대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시켜서, 세종임금에 이어 조선 대중흥의 기반을 굳건히 마련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르네쌍스를 맞이하고 있던 유럽지방에서 이태리 피렌체의 서기관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를 총망라한 말세적 정치교과서인 '군주론'을 써내어, 그 후 서양 대부분의 나라들이 약육강식적 패권정치를 유일한 생존논리로 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현상과는 좋은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luskorea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