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달팽이 박사의 생명 이야기

겨울잠은 곰만 잔다고? 나무들도 안간힘을 다해 冬眠합니다

浮萍草 2014. 2. 22. 09:58
    부터 조상들은 엄동설한의 풍광을 청송백설(靑松白雪)이라 했겠다. 늘 푸른 소나무에 눈부신 하얀 눈! 질펀히 깔린 대지의 설경이 아스라이 한눈에 들지 않는가. 겨울은 휴식의 계절이요, 휴식은 노동의 연속이라 한다. 저기 저 논밭뙈기들도 여름 내내 곡식들에 잔뜩 진을 빼앗긴 터라 이른바 땅심 올리느라 쉬고 있다. 자연도 저렇게 일없이 푹 노는 한가한 철이 있었구나. 겨울잠은 동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온대·한대의 나무는 한겨울엔 안간힘을 다해 동면한다. 추우면 굴 속에 푹한 날이면 굴 밖에서 서성대는 곰이 가짜동면 중이라면 송곳 추위에 체온이 따라 내려가 얼음 덩어리 되어서 겨우겨우 명맥만 부지하는 나무들의 동면이 진짜다. 살을 에는 지독하게 아린 혹한에 온 생명이 깡그리 얼어 죽을 것 같은데도 좀처럼 죽지 않고 질기게 버티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다. 그중에도 송죽(松竹)은 초한(峭寒)을 즐기듯 독야청청하니 어찌 겨우내 만취(晩翠)를 뽐낼 수 있단 말인가. 겨우살이란 사람도 그렇지만 나무도 죽살이치는 일이다. 그러나 몹시 시린 엄동이 있기에 봄의 따사로움을 느낀다. 쫄쫄 배곯는 애옥한 삶을 살아보지 않고 어찌 배부름의 고마움을 알겠는가. 사람이나 나무도 모질게 시달리면서 더욱더 강인해진다. 나무의 겨울나기를 소나무에서 본다. 낙엽귀근이라고 뿌리엔 켜켜이 쌓인 솔가리가 솜이불 되고 줄기는 용린(龍鱗) 같은 두둑한 수피가 더덕더덕 붙어서 과동(過冬)에 문제없으나 고추바람에 잎사귀들이 문제로다.
    솔잎도 밤새 꽁꽁 얼어 철심같이 빳빳이 굳으나 대낮엔 햇볕에 스르르 녹아 싱싱해진다. 그런데 늦가을에 접어들면 소나무는 일찌감치 고달픈 냉한을 알아채고 월동 준비하느라 부동액을 비축하니 이를 '담금질(hardening)'이라 한다. 세포에 프롤린(proline)이나 베타인(betaine) 같은 아미노산은 물론이고 수크로오스(sucrose) 따위의 당분을 저장한다는 말이다. 솔잎의 세포질에는 얼음결정(핵)이 생기질 않고 세포와 세포 사이의 틈새(세포간극)에만 결빙(結氷)되는데 세포벽은 셀룰로오스·리그닌·펙틴으로 돼있어 고래 힘줄 같이 질기기에 여간해서 세포가 깨지지 않는다. 결국 틈새의 얼음알갱이가 더 커지려면 연방 세포질 안의 물을 밖으로 빨아내는 수밖에 없다. 허나 물을 빨아내면 빨아낼수록 세포액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더욱이 빙점(氷點)이 낮아져 잘 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포에 유기물(용질)이 잔뜩 걸쭉해지므로 저온에 순응하여 동해(凍害)를 입지 않으니 이는 소금기 짙은 바닷물이나 유기물이 한껏 늘어난 한강이 예전 보다 결빙이 잦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더없이 영민한 나무들의 생명력에 감복을 금치 못한다. 나무는 그렇다 치고, 풀은 어떻게 세한을 거뜬히 날까. 추위에 영 약한 놈들은 죄 죽는 대신에 쉽게 얼지 않는 바싹 마른 씨앗을 남겼고 더덕이나 도라지는 잎줄기가 쇠락해버리지만 여린 싹을 머리에 인 억센 뿌리를 땅 속에 깊게 박았으며 냉이나 민들레는 비록 핼쑥해진 잎사귀가 푸름을 잃고 시푸르죽죽해졌지만 땅바닥에 납작납작 겹겹이 포개져 태양열과 지열을 한껏 받는다. 그 모양새가 장미꽃을 닮았다고 이들을 로제트(rosette) 형이라 한다. 푸나무(풀과 나무)들아 힘내라. 노루꼬리만큼 남은 매운 동절기를 조금만 더 참으렴. 어김없이 칼바람 그치고 새록새록 화사한 새봄이 오고야 말 터이니 정녕코 봄을 이기는 겨울 없다.
    Chosun         권오길·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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